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간송미술관이 소유했던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뉴시스 DB
간송미술관이 소유했던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뉴시스 DB

‘C4J0K21O19’
육중한 금고의 비밀번호(Pass Word)처럼 보이는 이것은 무엇일까. 그 상세한 의미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우선 훈민정음 창제를 살펴보자. 조선 4대 왕인 세종대왕(1397~1450)은 1446년 9월29일 ‘훈민정음’을 반포했다. 3년 전에 이미 만들었지만 최만리를 비롯한 일부 조정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새로 만든 글자가 정말 쓸 수 있는지 실험해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느니라. 그래서 여러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안하게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해례본> 중 어제서문·御製序文)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백성이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글로 쓰지 못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니 그런 일이 없도록 하려고 쉬운 글을 만들었다는 것. 그의 따듯한 애민정신을 느낄 수 있다.

◆유네스코의 ‘세종대왕상’에 빛나는 위대성

1999년 작고한 세계적 언어학자 제임스 맥콜리 미 시카고대 교수는 매년 한글날(10월9일)이 되면 강의는 물론 모든 일을 제쳐두고 학생과 지인들을 집으로 불러 ‘Hanguul Nal Party’(한글날 파티)를 연 것으로 유명하다. “한글날이 전 세계에서 언어학자들의 영광을 기념하는 유일한 공휴일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와 페어뱅크 교수는 1960년대에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기록체계”라 했고 제레미 다이아몬드도 <디스커버리지>지 1994년 6월호에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썼다. 

1997년 10월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유네스코는 세계에서 문맹퇴치와 언어학적 업적을 쌓은 사람에게 주는 상을 ‘세종대왕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이라 부른다(박현모, <세종이라면>, 미다스북스, 2014, 53~93쪽 참고). 

‘우리 것이라면 대부분 창피한 것이라서 내세울 것이 없다’는 자괴적 ‘식민주의사관’에 세뇌된 우리가 훈민정음의 진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바다 멀리 외국에서 먼저 ‘한글의 위대함’을 먼저 평가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15세기에 출판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이 사람의 발음기관을 본떠(상형화) 글자를 만든 사실을 정확히 전달했고 ▲백성의 편리한 문자생활을 위해 사전에 기획해서 언어를 창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례인 데다 ▲훈민정음을 만든 유래, 사용법, 창제의 세계관을 동시에 밝힌 인류역사상 유일무이한 보물이다. 

일제는 이런 가치를 가진 <훈민정음 해례본>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동안 혈안이 돼 찾아다녔다. 이를 없앰으로써 훈민정음 창제 사실 자체를 허구로 몰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지 않아 절멸의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해외로 반출됐거나 반출될 위기에 놓인 문화재 수집에 나선 간송 전형필(간송미술관 설립자) 선생이 1940년대 초 비밀리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했다. 현재 국보70호로 지정된 바로 그 해례본이다. 

◆한글창제와 C4J0K21O19의 비밀

세종대왕은 575년 전 어떻게 이처럼 위대한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은 C4J0K21O19와도 연결된다. 과연 무슨 뜻일까.

일본의 이토 준타로 등은 1983년에 편찬한 <과학기술사사전>에서 세종대왕이 왕위에 있던 1418~1450년 당시 세계과학사에서 최고기술로 평가받은 실적이 중국(C)은 4건, 일본(J)이 0건인 반면 조선(K)은 무려 21건이라고 규정했다. 

한중일 3국을 제외한 전 세계(O)도 19건에 불과했다고 평가한 데 비춰볼 때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구체적 사례로는 ▲금속활자 경자자(1420년) ▲자격루(자동물시계·1434년) ▲측우기(1441년) ▲칠정산내외편(천문책력·1442년) ▲철제화포주조(1444년)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처럼 작은 신생국가(1392년 건립)에서 26~58년의 짧은 기간 동안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비밀은 열린 마음으로 앞선 나라의 기술을 적극 받아들이고 국내 기반과 인재풀을 최대한 활용한 ‘패치워크’(짜깁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국내외의 앞선 기술에 대한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세종은 이를 위해 고려 때 만들었으나 유명무실하던 집현전을 대폭 확대해 각종 연구개발의 축으로 만들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반포 준비 과정에서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를 13번이나 요동에 파견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명의 황찬이라는 한림학사이자 음운학자가 요동에 귀양간 것을 알고 그에게 자문을 구하고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 언어를 수집해 참고하기 위함이었다. 

민생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 실험정신도 중요했다. 백성의 문자생활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훈민정음 활성화를 위해 금속활자를 만들어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각종 서적을 출판했다. 농사문제 해결을 위해 농부들의 경험을 들어 <농사직설>을, 질병치료를 위해 <향약집성방>을 편찬했다.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신분장벽도 과감하게 뛰어넘었다. 조선 초기 최고의 발명가로 꼽히는 장영실은 관노 출신이었지만 세종은 개의치 않고 그를 중용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들어 보답했다. 종3품까지 올랐던 장영실은 그의 감독 아래 만든 세종 가마가 부서진 뒤 탄핵을 받고 물러났다. 관노 출신이라서 그의 생몰 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안타까운 것은 세종 때 꽃피운 세계최고의 짜깁기 문명이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1420년 설치한 집현전이 1456년(세조2년) 37년 만에 폐지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계유정난(1453년)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세종의 둘째아들)이 자신의 집권을 반대하는 사람 중에 집현전 학자가 많자 이를 아예 없애버렸다. 그 뒤 정조가 규장각을 만들 때까지 왕조의 씽크탱크 역할을 하는 곳이 없었고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과학기술은 계속 쇠퇴했다. 조선의 운명은 이미 그 때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53호(2018년 8월15~2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