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어디 감히 학생이 총장 선거를 하려고?"..'돈' 낼 의무만 남은 대학가

김찬호 기자 2018. 8. 15.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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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수천명의 학교 구성원 중 총장선거의 유권자는 딱 1명, 이사장뿐이다.”

기록적인 무더위 속에서 8일간의 단식농성을 끝낸 홍익대 총학생회장 신민준씨(26)는 대학 총장선거를 이렇게 설명했다. 신씨는 지난 1일 ‘학생들이 참여하는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신씨의 단식이 길어지자 지난 9일 학교 측은 ‘학생대표와 총장은 정례 간담회를 갖는다’, ‘총장후보추천위원회(총추위)의 규정을 개정한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학생 측이 주장한 ‘총장 후보자 공약 발표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학 측은 ‘총장선거에 출마한 후보 3명이 모두 괜찮은 분’이라는 이유를 내놨다.

현재 제 19대 총장을 뽑고 있는 홍익대는 총추위가 총장후보를 추천하면 법인 이사회가 지명하는 방식으로 총장을 선출한다. 이를 두고 간선제냐, 임명제냐는 논란이 있지만 어느쪽이든 이사장이 최종 결정을 한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신씨는 총추위 규정이 개정되는 10월까지 단식을 보류하기로 했다. “목숨 걸고 단식을 해도 총장 후보자의 공약도 물어보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신씨는 “대학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홍익대 학생들이 학교에 붙인 플랜카드/홍익대 총학생회 제공

대학 총장 선거를 둘러싸고 ‘투표할 권리를 달라’는 학생들과 ‘줄 수 없다’는 학교 법인 측의 갈등이 거세진다.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학생들은 대화를 요구하며 1인 시위 등을 하고 있지만 각 학교 법인들은 일관되게 ‘무시’한다.

현행 사립학교법 제 53조는 ‘각급학교의 장은 학교를 설치·경영하는 학교법인 또는 사립학교경영자가 임용한다’고 규정하며 이러한 총장선출 방식을 정당화한다. 이에따라 이화여대, 성신여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립대학은 이사장 1인이 총장을 결정한다. 국립대의 경우 ‘교육공무원법’에 적용을 받는다는 것 외에 총장을 뽑는 절차는 같다.

학생이 총장 선거의 유권자가 아니다보니 ‘총장 후보자 공약 발표’ 같은 소통은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신씨는 “총장은 이사장의 이익을 대변할 뿐 학교 운영 방향이나 구성원과의 소통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며 “현재 홍익대 학생들은 총장 후보자들이 왜 입후보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은 올해 하반기 새로운 총장을 선출하는 고려대, 동국대도 마찬가지다. 고려대 학생들은 지난 1일부터 ‘대통령도 내 손으로 뽑는데, 학교 총장은 간선제?’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지난 9일에는 고려대 ‘이만총총 프로젝트’(2만명의 총학생회원의 염원을 담아 총장을 직선제로 선출한다)팀의 학생들이 ‘총장 직선제’ 요구에 대한 답변을 듣기위해 법인 사무실을 방문했다. 법인 관계자는 이들에게 “법인이 언제 답변을 할 지 알 수 없고, 답변을 할 지 말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답변을 하지 않으면 법인이 학생들과 대화할 뜻이 없는 것으로 간주해도 되냐”는 질문에 “네”라고 답했다.

학생들은 면담 내용을 카드뉴스로 만들어 고려대 총학생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고, 현재 많은 학생들이 학교 법인을 성토하는 댓글을 달고있다. 동국대 학생회는 ‘총장 직선제’를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하고 새 학기부터 시위 등을 할 방침이다. 이외에도 전국 19개 대학 총학생회와 전국교육대학생연합 등이 참여한 ‘학생참여 총장직선제를 위한 운동본부’는 각 학교의 시위를 지원하며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이만총총 프로젝트’팀이 학교 법인 관계자와의 대화 내용을 카드뉴스로 정리했다/고려대 총학생회 페이스북 갈무리

대학가에 ‘총장 직선제’ 요구가 거센 것은 이유가 있다. 지난해 총장 직선제로 선거를 치른 이화여대에서는 총장 후보자들이 학생 질의서에 대한 답변과 공약을 발표했고, 올해 처음 총장 선거에 학생 의견을 반영한 서울대에서도 후보자들이 공개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제출했다. 처음으로 총장 후보들이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소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학생 의견을 수렴해 선출된 총장에 기대하는 측면도 있다. 지난 5월 서울대 징계위원회가 ‘사회대 H 교수 성폭력 사건’에 대해 ‘정직 3개월’ 결정을 내리자 학내에는 ‘사실상 봐주기’라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당시 성낙인 총장은 여론을 수용해 징계위원회에 재심을 요청하고 퇴임 때까지 징계안에 결재를 하지 않았다. 총장의 양심에 따라 법인 등의 결정에 제동을 걸 수도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사립대학은 이사장을 대표로 하는 법인의 재산이기 때문에 이들이 총장을 결정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대학재정알리미가 발표한 ‘2018년도 사립대학 예산 분석’을 보면 사립대학들의 운영수입총액에서 등록금이 차지하는 비율인 ‘등록금의존율’은 59.1%였다. 자금수입총액에서 국고보조금이 차지하는 비율도 15%에 달한다. 사립대학이 순수히 법인의 재산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신씨는 “홍익대는 등록금의존율이 70%에 달하고 교직원 수 역시 사립대학 평균의 절반에 불과하다”며 “심지어 법인 부담금을 등록금에서 지출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총장 직선제’ 요구를 두고 고려대 총학생회장 김태구씨는 “19~20세기 참정권 확대 운동과 닮았다”고 말한다. 과거 참정권 확대 운동처럼 돈 낼 ‘의무’만 남은 학생들이 대표자를 뽑을 ‘권리’를 요구하면서 학내 민주주의도 발전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총장 직선제’ 요구와 ‘참정권 확대 운동’은 권리를 요구하는자와 지키려는자 사이에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도 닮았다. 1913년 영국의 에밀리 데이비슨은 ‘여성 참정권 확대’를 외쳐도 정부가 허용하지 않자 국왕 조지 5세의 경주마가 참가한 엡섬 더비 경마 경기에 뛰어들어 사망했다. 2018년 대학가에서는 ‘총장 직선제’를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고 누군가는 39도가 넘는 폭염에도 야외에 서서 시위를 해야 한다.

경향신문과 만난 학생들은 모두 “법인 측과 제대로 대화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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