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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공작` 김홍파 "숨의 깊이를 아는 배우가 진짜 배우"

김시균 기자
입력 : 
2018-08-14 15:15:01
수정 : 
2018-08-17 09:4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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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홍파 / 사진=양유창 기자
[나는 조연배우다-20] 때는 1970년 부산 영도. 이른 아침 여덟 살 소년 김홍파(본명 김홍재)는 학교를 땡땡이 치고 집 근처 허름한 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액션 스타 고(故) 박노식 배우(1930~1995)가 나오는 '남대문 출신 용팔이'('용팔이1'으로 이후 10여 편에 걸쳐 제작된 당대 액션 시리즈물)를 보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아침 8시 무렵. 소년의 눈빛은 기대와 설렘으로 반짝였고, 그렇게 첫 상영 순간이 다가왔다. 좌석에 앉은 소년의 주위로 서서히 어둠의 장막이 내리깔리며, 영사기가 쏘아댄 하얀 빛줄기가 머리 위 직선을 그리곤 눈앞의 스크린에 내리꽂혔다. 그렇게, 영화라는 세계가 펼쳐졌다. 소년은 곧바로 매혹됐다. 불의를 못 참는 사나이 용팔이(박노식)는 소년에겐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그가 거리의 무뢰배와 마주했을 땐 소년의 심장은 마구마구 두근거렸다. 현란한 액션으로 적들을 멋지게 두들겨팰 땐 통쾌함에 온몸 가득 전율이 일었다. 소싯적 헤어진 여동생을 찾아헤매는 광경에선 저도 모르게 목이 메었고, 극 말미 마약밀매단 소굴로 진입해 적들을 일망타진할 때엔 흥분의 쓰나미가 온 가슴을 휩쓸었다. 소년은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후에도 '용팔이1'은 다섯 번을 연이어 상영됐다. 소년은 하루 상영분이 모두 끝난 밤 10시 무렵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아들 어디갔나!" 그날 밤, 집안은 온통 난리가 났다. 사라진 아들 찾아 온 가족이 동네방네 헤매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와 그라는데요?" 어린 아들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기가 막혀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야 이놈아! 을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그렇게 꺼이꺼이 통곡하는 어머니 앞에 아들은 어찌할 바 몰라 가만히 얼음처럼 굳어버린다. 하지만 소년의 마음은 기쁘고 신이 났다. 난생처음 꿈 하나가 싹튼 것이다. '나도 저런 멋진 배우가 되겠다.' 이후 소년은 틈만나면 혼자 극장가를 누비고 또 누볐다.

"어무이, 나 태권도 배울게요." 용팔이처럼 되려면 일단 육체 단련이 필요하다 여긴 것일까. 아무도 시키지 않았으나 중학생이 된 소년은 태권도부터 배운다. 미친 듯이 빠져든 탓에 배우라는 꿈도 잠시 잊고 만다. 목표 하나가 더 생긴 것이다. '아프리카에 우리 태권도를 보급해보자.' 그렇게 중·고교 시절 선수로 뛰었지만 이내 그 꿈은 바스라진다. 약한 척추가 문제였다. "잠시 운동 좀 쉬어야 한다"며 동네 의사가 강권했을 땐 이미 시합이 보름 남은 시점. 포기하긴 싫었고 결국 시합에 나간다. 그러다 부상을 입어 1년간 꼼짝없이 누워 지내고 만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배우뿐이다.' 8세 때 꿈이 재귀한 것도 그즈음. 소년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고교 3학년 무렵 학교를 자퇴했고, 혈혈단신 서울로 간다. "이놈이 미쳤구나." 어머니의 격한 반대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연고 없는 대도시에서 아침엔 신문배달을 오후엔 막일을 뛰었다. 머리 싸매며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스스로 졸업장도 따낸다. 하지만 그의 20대는 모진 풍파의 연속이었다. 그 중심엔 아들의 꿈을 말리려는 어머니가 있었으니, 모자 간 갈등은 무려 10여 년간 지속된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나이 서른이 되자 그는 드디어 극단에 입단한다.

이상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김홍파(56)의 배우 데뷔 궤적을 거칠게나마 소묘해본 것이다. 부러 이를 시도한 것은 기이하게도 지금까지 그의 일생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서사에 꽤나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한 사람의 생이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 선형적으로 나아간다는 것. 사실 이러한 목적론을 나는 반대하는 쪽에 가까운 편이다. 생은 우연적 요소들의 난장이고, 그 숱한 변수들의 연쇄로 애초의 좌표점에서 비껴나갈 공산이 훨씬 크다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 조연 김홍파를 최근 만나고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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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홍파 / 사진=양유창 기자
그는 대기만성형 배우다. 데뷔 연도가 1992년이었으니, 그때 나이 서른.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배우가 됐고, 이후에도 십 수년 무명의 비애를 감내한 그다. 2010년대 들고부터 대중에게 얼굴을 서서히 알렸으므로, 그때 이미 40대 중·후반. 2012년 '범죄와의 전쟁' 엄 실장으로 단역 출연하기까지 이렇다 할 화제작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부턴 사뭇 달라진다. 2013년 초 '신세계'의 김 이사로 조연 역을 따내더니, 그해 여름 '더 테러 라이브'(2013)의 주진철 경찰청장을 호연해 화제의 배우로 비상한다.

아마 2015년은 그에게 최고의 한 해일 것이다. 극 중 김구로 분한 '암살'은 그해 여름 그에게 안긴 생애 첫 천만 영화다. 같은해 겨울에도 '내부자들'의 오현수 회장으로 분해 부패 기업인의 초상을 실감나게 표현해낸다. 2016년에는 970만 관객을 모은 '검사외전' 교도소장 역을 맡았고 이후 숱한 장르물을 거쳐 올 여름 첩보 블록버스터 '공작'(감독 윤종빈)에 이북 간부 김명수로 출연했다. 김홍파의 전성기는 이제 막 시작인 것이다.

"나에게 기나긴 무명 세월은 '배우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 그를 충무로 한 찻집에서 만났다(미리 말하지만 18화에서 다룬 남명렬 배우에 이어 분량이 가장 많다. 그는 친근한 반말과 경어체를 자주 섞어서 썼는데 가급적 있는 그대로 옮긴다).

-선생님 성함 얘기에서 출발하고 싶네요. 본명은 김홍재시죠. 지금의 김홍파라는 이름은 가명인 걸로 압니다. 홍파라는 이름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천경화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세요. 제 은사님이십니다. 제가 이십대일 때 그분을 대단히 좋아했어요. 졸졸 따라다니면서 술도 참 많이 얻어먹었지(웃음). 어느 날 은사님이 제게 '호'가 필요하다고 지어주신 게 '홍파'입니다. 큰 물 홍(洪)에 물결 파(波). 이 호가 참 가슴 깊숙이 들어오더군요. '배우라는 삶에 큰 물결을 일으키라'는 의미인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인생에 큰 역경도 있을 것이고, 그 큰 역경을 딛고 나만의 큰 물결을 이뤄 세상에 득이되어보자, 그런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삶을 살고자 한 게 저 김홍파인데, 실제로 아버지가 주신 홍재라는 이름보다 홍파라는 이름으로 더 오래 살았어요. 30여 년을 함께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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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2018)에서 배우 김홍파는 북한 간부 김명운으로 분해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이번에 '공작'에 조연 출연하셨죠. 개인적으로 올여름 대작 중 가장 애정하는 작품입니다. 선생님께서 중반까지 출연하시는데 몇몇 장면이 인상깊더군요. 흑금성(황정민)이 선물로 건넨 롤렉스 시계를 받으며 매우 기뻐하는 모습, 약간의 과장이 가미된 북한어 대사, 베이징 호텔 클럽에서 정무택 과장(주지훈)과 춤추는 장면 등. 남북 대립 국면을 다루기에 자칫 무겁고 진지하게 전개될 수 있는 '공작'에 유머와 활력을 불어넣어주셨어요.

▷롤렉스 시계 장면은 현장에서도 다들 뒤집어졌어요. 애초에 다들 웃을 것 같아 나만이라도 집중하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굉장히 했지. 그러다 앞에 있는 (황)정민이가 (웃겨서) 쓰러지고 (이)성민이는 뒤에서 쓰러지고, 그렇게 도미노처럼 스태프들이 전부 쓰러지니까 참다 참다 나도 쓰러졌어요(웃음). NG가 얼마나 났던지. 나중엔 식은땀이 줄줄 흐르더라니까요. 그런데 나도 한 번 웃겨서 쓰러지니까 도리어 긴장이 되는 겁니다. 웃으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몸 안에서 열이 살살 올라오길래 그걸 5~10분 식히고 다시 찍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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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 영화 '암살'(2015)에서 배우 김홍파는 백범 김구를 열연했다. /사진제공=쇼박스
-평소 선생님 본인 연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이번 '공작' 같은 경우에도요.

▷내가 나를 평가하진 못하겠고. 늘 그 인물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해요. 이를테면 김명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이 사람의 경우엔 내가 북한에 가본적이 없으니 북한말 전문가 백경윤 선생한테 열심히 배웠어요.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오신 지 근 20년이 된 분인데, '암살' 김구 연기 때도 그분 도움 많이 받았지. 아무튼 북한의 정치, 사회, 남자 문화 같은 걸 들려주면 최대한 경청하고 김명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나름대로 그려보는 거예요. 이 사람은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데 북한에선 제 속을 드러낼 수 없으니 내면을 감춰야 한다. 그러니 역으로 과장된 말투가 나오고 위트가 나오고 그러는 거다. 의도적인 게 아닌 거지. 그는 박석영, 그러니까 흑금성(가명)을 도와주려고 하는 인물인데 그러다보니 역으로 과장이 나오는 거예요. '술은 안 먹으면 못 합니다!' '당작 안 먹으면 안 봐, 얼른 먹으라우!' 하고.

-김명수 역엔 어떻게 캐스팅되셨어요?

▷윤종빈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 때도 함께한 분이에요. 원래 엄 실장이 아니라 다른 국회의원 역에 캐스팅됐는데, 며칠 있다가 바뀌어서 엄 실장을 한 거였어요. 그때 인연으로 '공작' 때도 책(시나리오)을 주며 출연 제안을 했는데, '선생님 알아서 해주세요' 하더군요. 윤종빈이라는 감독은 김홍파에 대한 신뢰나 믿음을 굉장히 크게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김명수라는 인물을 풀어감에 있어 한치의 의심도 없이, '마음대로 하시라'고 할 정도니까.

-그 신뢰 때문에라도 부담이 없지 않으셨겠어요. 준비 과정이 까다롭진 않으셨고요?

▷까다롭진 않았어요. 모르는데 까다로울 수가 없지. 북한 문화를 모르니 까다로운 개념이라기보다 무조건 배워야하는 개념인 거지. 백 선생한테 하루에 2~3시간씩 북한의 얘기를 수없이 듣고 그렇게 소화시키고 공감하는 시간들을 홀로 가졌어요.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김명수를 이해할 수 있으니까. 주어진 인물의 삶을 이해 못하면 말을 하기가 굉장히 난감해져요. 대사를 그냥 글자 읽 듯 하게 돼.

-그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거로군요.

▷그렇지, 인물의 삶을 알아야 숨을 쉬어요. 숨을 깊게 쉬어야 감성이 생기고 그 감성이 생겨야 글자에 숨결이 실려 상대에게 전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그 인물이 살아온 삶이 이해가 안 되면 일단 숨부터 못 쉬게 되고 그다음은 그 사람인 '척'을 하게 돼. 그렇게 하는 말은 거짓말이야. 혹자는 못 알아차릴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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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홍파 / 사진=양유창 기자
'숨의 깊이'라는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의 연기 비결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결이 조금씩 다르다. 엇비슷한 캐릭터 같지만 호흡과 발성, 눈빛과 표정, 몸짓과 걸음걸이 모두 미세하게 다른 색을 지녔다. 주어진 배역을 최대한 이해하고, 그 인물에 들어가 그 사람 숨을 오롯이 내쉰다는 것. 그래야만 그 사람 감성이 거짓 없이 전달된다는 것. 자기 연기에 대한 숱한 고민의 세월을 거쳐오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깨달음이다.

-'숨의 깊이'를 알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아마 내 나이 40대 중반이 지나서였던 것 같아요. '숨의 깊이'를 그때 알았다기보단 이 배우라는 게 도대체 뭔가를 깊게 고뇌했던 시점이지. 한 번은 집 근처 놀이터에 갔어. 거기서 아이들이 해맑게 도란도란 모여 놀고 있더라고. 그 광경을 보는 데 벼락을 맞은 것 같았어요. 그간의 내가 보이더군요. 욕심이 가득 차 있더라고. 아, 나라는 사람이 자아가 강하니 다른 사람 삶을 살아가기 힘든 거구나. 나는 배우니까 일상의 나를 최대한 빼내야 하는데 그게 아직도 너무 완고하구나. 그런 스스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내면이 처참하게 무너져 있고 아프고 힘들고 그랬구나. 그러면서 저 아이들을 다시 본 거예요. 야, 나도 저 아이처럼 해맑아져야 한다. 그때부터 하나하나 버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삶이 조금씩 달라지러군요. 속도 깊어지는 것 같고.

-당시 힘든 시기였던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연극 무대에 20여 년 오르며 참 괴로웠어요. 배우로서 근본적인 고민을 늘상 했던 거지. 내가 다른 사람을 충실히 살아내려고 20년을 정말 지랄 염병을 다 했는데 극이 끝날 때마다 힘이 들고 지치고 그 사람이 아닌 내가 보이는 것 같아. 김홍파가 아니라 김홍파가 연기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하는데 그게 아닌 거지. 그런 게 늘 두려우면서 20년을 해결 못 하고 끙끙댔어. 몸살도 자주 났고. 어느 정도였냐면 혼자 분을 못 참고 벽에다 헤딩을 하며 자학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그럴 지경이니 어느 날부터 잠도 잘 못 자겠더라고. '배우란 뭔가'에 대한 답은 이미 갖고 있는데, 그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답이 눈앞에 있는데, 내가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노력을 해도 그게 안 되는 내 자신이 너무 싫고 괴로운 거지.

-배우로서 본질적인 고민을 쉼없이 하고 계셨던 거군요.

▷그렇죠, 본질적인 거죠. 그걸 20년간 숱하게 무대에 오르면서도 해결 못 하고 있었는데, 저기 저 어린 아이들을 통해 조금은 깨닫게 된 거야. 아, 저 친구들이 스승이구나 하고. 제가 후배들한테도 하는 말이 있어요. "공명심을 버려라." 공명심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려는 노력일랑 버려라. 온전히 배우가 되려는 것 외에는 사심을 집어넣지 마라. 그 욕심이 생기는 순간 그 사람(주어진 배역)을 살기는 어렵다. 한 마디로 배우는 도 닦는 직업이예요. 그렇게 닦고 닦아야 진짜 배우가 된다고 봐요.

가만히 경청하다 문득 떠오르는 성서 구절이 있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가 10, 14) 이 구절은 다음처럼 번안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배우의 삶은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어린이와 같이 배우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그때를 기점으로 이전의 홍파와 이후의 홍파의 삶은 사뭇 달라졌겠다는 짐작이 듭니다.

▷나는 원래 굉장히 동적인 사람이었어요. 원래의 김홍파는 본성이 굉장히 다혈질적이고 미치도록 열정적이고 굉장히 직접적이고, 하여간 가만히 있질 못하는 놈이었지. 그러던 게 원래의 모습을 지우고 지금의 새로운 김홍파가 된 거예요. 정적이게 된 거예요. 평소에 움직임이 별로 없어요. 집에 있으면 가만히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해요. 아내한테 그런 내 모습은 대단히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겁니다. 그러나 배우의 삶을 내가 살아가야 하므로 이 삶을 고수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배우 삶을 택했으므로 이전의 삶은 포기해야 하는 거지.

-이전의 삶을 얘기하셨기에, 이제 시간을 저 멀리 거슬러 올라보죠. 1962년 부산 영도 태생이시죠. 어린 시절 자라온 환경은 어땠습니까.

▷금수저 집안이었어요. 잘사는 재력가 집안인데, 우리 아버지가 자수성가한 분이에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당시에 제지업계에 종이 만드는 기계가 없으니 아버지가 그걸 전부 스스로 개발하셨어요. 국민학교 다닐 때 아버지를 가만히 지켜보면, 당시에 친척들까지 해서 열한명이 모여 살았어요. 당신이 밤 새워 노력해서 종이 만드는 기계 16종을 개발했어요. 그러고 나서 사업이 대단히 번창을 했죠. 집에 공공칠 가방을 들고 오는 사람들을 어릴 적에 자주봤어요. 기계를 갖고 가려면 돈을 줘야 하니까.

-유년 시절 성격은 어떠셨어요?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달까. 어릴 때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을 일인데 중·고교 때 별명이 '정의의 사도'였어요. 누가 어린 친구들 괴롭히면 구해주는 역할 위주였어. 일 대 일로 한 판 붙자 그러면 가서 붙어줬지. 진 적이 없어요. 태권도 전문 선수였던 데다 주먹이 셌거든. 그때만 해도 체구도 컸고. 당시 178㎝였으니까 또래 중 거의 가장 컸어요. 혼자 조용히 지내는 타입이었지. 오전에 수업 4시간 하면 나머지는 운동, 그리고 극장 가는 게 일과였어요. 그때 단련하던 것이 지금도 매일 운동하는 습관으로 이어지고 있고. 촬영일만 아니면 매일 3시간씩 운동을 해요.

-대단하시네요. 3시간 운동을 어떻게 안배해서 하세요?

▷오후 촬영이면 아침 7시에 기상해요. 땀복 입고 집 앞 헬스장 가서 1시간 유산소운동부터 해. 그리고 신체훈련 1시간, 근력운동 1시간을 해요.

-신체훈련이라 하시면?

▷모든 관절을 단련하는 거죠. 목뼈부터 여하한 관절들을.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신체훈련'이라고 봐요. 근육의 단단함이 아니라 유연성을 다지는 거죠. 관절에 기름칠을 하는 거예요. 그래야 근육들이 긴장을 안 해요. 배우들은 생고무처럼 탄력이 있어야 탄력있게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어요.

-극장 가는 게 일과였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다니신 건가요?

▷어마어마하게. 땡땡이는 상습이었지. 그 시대 영화란 영화는 안 가리고 다 본 것 같아요. 중고교 때 중국 본토 영화들 인기가 대단했어요. 우리 영화는 '맨발의 청춘' '용팔이' '월하의 공동묘지' '미워도 다시 한 번' 같은 걸 혼자 보러 참 많이 다녔어요.

-언급하신 작품들은 거의 당시 나이에 입장 불가 아니었나요?

▷많이 걸리기도 많이 걸렸지. 그래도 쉽게 입장이 가능했어요. '신도극장'이라고 지금은 없어진 삼류 극장에 다녔거든. 정말 철두철미하게 어머니한테 안 걸리게 보러 다녔는데, 사실 나는 친구 보는 거보다 영화 보는 게 더 좋았어.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그 당시 중국배우는 에너지가 저리 많이 느껴지는데 우리는 안 그렇게 느껴지나. 중국 배우들과 한국 배우들이 자아내는 에너지가 다르더라고요. 중국 배우들의 그 굉장한 에너지가 참 멋있었어요.

-당시 중국 영화들이 액션, 무협 활극 위주여서 그렇게 보였던 건 아닐까요?

▷난 그리 생각 안 해요. 내면에서 나오는 힘이 있어야 외면으로도 힘이 느껴진다고 봐. 그게 내공 아닐까요. 자기 삶이 얼마나 탄탄하냐에 따라 그 삶의 힘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거지. 폼만 내는 거랑 다른 거예요.

-그 시절 꿈의 배우는 누구였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말론 브란도. 그런 배우가 없는 것 같아요.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도 개인적으론 못 따라가는 배우가 아닐까 싶어. 그렇다고 누굴 숭배하고 그런 건 꺼려해서 포스터나 사진 수집 같은 건 안 했어요. 아, 저런 배우가 되어야겠다, 내가 대한민국의 말론 브란도같은 배우가 되어야겠다, 그 시절 그렇게 결심을 하곤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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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홍파 / 사진=양유창 기자
그는 2남2녀 중 셋 째다. 위로 형과 누나가, 아래로는 여동생이 있다. 형은 대학 때까지 밴드 보컬을 했고 누나는 피아노를 쳤다. 막내 여동생은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도예가로 산다. 문제는 어머니가 셋째인 그마저 예인이 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나만 배우되겠다는 걸 극구 말리시더라"고 했다.

-아니, 셋째인데도요?

▷그러게 말예요. 한 사람은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법대 진학을 이전부터 줄기차게 요구하셨죠. 그러다보니 어머니하고 어마어마한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그게 20대에 배우한다고 서울 올라간 뒤로 10년가량 지속됐어요.

-아버지는 어떠셨고요?

▷아버지는 한번도 잔소리를 안 하셨어요. 다만 어머니와 갈등이 깊어지니까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을 하시더군요. "어머니 말을 좀 따라줘라." 제가 스물 넷일 때였어요. 건강이 악화되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런 유언을 하시는데, 그걸 안 따를 수 없겠더군요. 그래서 "알겠습니다" 하며 잠시 배우다 아버지가 중간에 돌아가시고, 그러면서 내가 해야 될 이유가 없어진 거지. 결국은 다시 내 길을 가겠다 한 겁니다.

-전쟁이 재개된 거군요.

▷참 많이 싸웠어요. 그러다 차츰 생각이 바뀌더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내가 어머니를 미워하면 안 된다. 내가 배우라는 삶을 살려면 나를 가장 잘 아는 저 어머니란 사람을 설득해내야 한다. 어머니도 설득 못 시키면서 어떻게 배우라는 삶을 살겠나. 그래서 데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겁니다. 끊임없이 이해시키려다 보니 스물일곱, 여덟이 되었고 서른 목전에 다다른 거예요.

-그러면서 극단 문을 계속 두드리셨나요?

▷굉장히 어렵더라고. 당시는 경상도 사투리 쓰는 사람은 배우가 되기 어려운 구조였어요. 아니, 자격 자체가 없었어. 연기하고 싶다고 그러면 쫓겨나기 일쑤였지. 그래서 혼자 표준어 공부도 하고 그랬어요. 돌이켜보면 어머니와 싸운 시간이 극단 기웃거린 시간보다 많아. 무대엔 정작 거의 서지도 못했고. 그러다 나이는 차고 한계에 부닥치자 일본 유학을 준비하려고 했어요. 근데 그걸 어머니가 알게 되니까 집에서 날 두고 대책회의 같은 걸 한 것 같아. 그러다 막내가 아이디어를 낸 거지.

-어떤 아이디어를요?

▷당시에 덕수궁 공연예술아카데미라고, 정부가 운영하는 학교가 있었어요. 막내가 "오빠 여기 시험보게해라, 떨어지면 엄마 하라는 대로 하고 붙으면 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자." 그렇게 제안한 거예요. 근데 이게 참, 백프로 안 될 거다라는 확신이 있었나봐요. 어머니 보시기에도 이놈이 준비된 게 전무할 텐데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짐작하신 거지. 좋다, 알았다, 할 만하다며 수락하신 거예요.

-그걸 붙으신 거로군요(웃음).

▷이전부터 얼마나 피나게 준비를 해왔는데. 어디서 주워듣기만 한 게 아니라 홀로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공부하고 연습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연기 시험 보고 덜컥 한 번에 합격한 겁니다. 그때 스물 아홉살이었어요. 일가족이 다들 깜짝 놀랐어요. 어머니도 드디어 백기를 드셨고. 그럼에도 당신은 아무튼 배우는 안 된답니다. 상관없었어요. 연출과를 가도 당시에 다 청강이 가능했거든. 연출, 희곡, 배우론 전부 하루아침에 전 강의를 다 들었어요. 그간 미친 듯이 갈망했던 걸 너무나도 신이 나서 배우고 그랬던 겁니다. 그러다 최영희 선생, 오태석 선생 등을 만나고 1년 뒤에 데뷔를 한 거죠. 그게 '종로 고양이'라고 조광화 작가가 쓴 연극이예요. 그때부터 김홍파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지요. 그러고 극단 '목화'에 들어가 20년을 보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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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홍파 / 사진=양유창 기자
극단에 들어가 처음 올린 연극은 '백마강 달밤에'(1992). 그때 나이 서른이었다. 이후 20여년에 걸쳐 오 선생 창작극 15~20편에 오르는 그다. 김홍파는 "2~3년 후 오태식 선생에게서 들은 한마디가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내가 연기 잘 하는 배우라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굉장히 신명나게 잘하고 있다고 여겼죠. 오만했지. 한 번은 '아침 한 때 눈이나 비'라고, 무용과 연극을 합친 공연을 끝내고 난 직후였어요. 오 선생이 단 칼에 내리치듯 호통치시대요. '왜 김홍파가 보이느냐!'"

-앞서 말씀주신 배우로서 본질적인 물음도 여기에서 출발하는 거군요.

▷맞아요, 당시 충격이 어마어마했어요. 그 뒤로 저의 삶은 '배우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어요. 20년간 헤매며 산 거죠.

-그런 자기 내면과의 싸움 외에 외적인 어려움 같은 건 없으셨어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오셨기에 그런 점은 덜 고민하고 살아오셨지 않았나 짐작해 보게 되긴 하지만요.

▷유복하게 자랐어도 부모님께 전혀 손 벌리고 살지 않았어요. 새벽녘이 되면 늘 신문배달을 했어요. 연극 연습 들어가고 공연 올리고 그러면 하루 시간을 못 쓰니까 새벽녘 밖에 생계비 벌 방법이 없었지. 식당 주방장, 차 세차, 노가다 등 안 해본 게 없어요. 아무튼 새벽에 신문 돌리고 운동하고 오후 1시까지 극단에서 연습하고, 공연장에서 공연하고, 공연이 없는 날엔 노가다를 하루 풀로 했어요. 그 당시 일당이 2만7000원이었나 그랬습니다.

-귀한 아들이 어렵게 사는 것에 어머니께서 많이 속상해하셨겠어요.

▷화가 대단히 많으셨죠. "저 새끼가 왜 저러고 사냐"면서.

-그런 어머니가 아들 공연을 보러 온 건 언제가 처음이었나요.

▷첫 연극 '종로고양이' 때 오시긴 했어요. 어머니한테 직접 얘기하긴 그렇고 누님한테 미리 슬쩍 흘린 거지. 근데 공연 전에 아들이 무대 위에 있는 걸 보고 바로 나가시더라고. 화가 나신 거지. 그러다 '백마강 달밤(1992)에' 공연 때에 또 누님한테 얘기했어요. 이번에 꼭 좀 모시고 오라. 그렇게 누님과 같이 오셨는데, 이번엔 끝까지 보시더라고요.

-그러곤 뭐라고 하시던지요?

▷우시더라고요. 이러시면서. "아들아, 미안하다. 너가 꾸고 있던 꿈이 이런 것이었는 줄 어미는 몰랐구나. 정말로 미안하다. 내가 네 후원자가 되어줄게." 너무나 감동받았어요. 내가 무대에서 당신에게 존재 증명을 해낸 거니까. 그게 그렇게 커다란 자신감이 될 줄은 몰랐어요. 당시 올린 극이 백제 의자왕 이야기예요. 한 마을에 우환이 일어나니 그걸 막으려 충청도에 있는 백제 의자왕에게 굿을 올려요. 그러다 당대 역사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들이 순단이를 통해 모두 화해하는 얘기예요.

-그 내용처럼 어머니와의 화해도 마침내 이뤄진 거군요.

▷화해라기보단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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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홍파 / 사진=양유창 기자
그의 영화 데뷔작은 1996년 개봉한 고(故) 김용태 감독의 '미지왕'이었다(그의 첫 영화로 기록돼 있는 1994년작 '우리 시대의 사랑'은 박철수 감독이 김홍파가 오른 연극 무대 장면을 영화에 쓴 것이라 한다). 2년 전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연극계 김홍파, 손병호, 이상희 이종국 배우 네 사람을 당사자들 몰래 오디션에 접수시킨 거였다. 김홍파는 "이 대표가 우리 넷을 매우 좋아했었다"며 "오디션 접수 사실은 나중에 우편물을 통해 알았다"고 했다. 그렇게 김홍파만 3700대1에 이르는 경쟁률을 뚫고 7차 오디션 끝에 주조연 역을 따낸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일까. 실험적 성격이 짙은 '미지왕'은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고 만다.

-첫 영화인데 아쉬우셨겠어요.

▷책(시나리오)으로는 너무 재밌었어요. 근데 시대적으로 너무 앞서간 실험 영화 성격이 강했던 것 같아. 아마 지금도 영화과에서 공부하기 좋은 영화일 거예요. 특히나 배우들 쪽에서 말예요.

-어떤 역할이었나요.

▷총경인 척 하는 사기꾼이었어요. 총경으로 분장을 해 결혼식장 부조금 털로 들어가는 인간이었지. 그런데 그렇게 털로 갔는데 신랑이 없어진 거야. 본의 아니게 사람들이 경찰인 줄 알고 나한테 신랑 찾아달라고 의뢰를 하는데 아주 블랙코미디적이었죠. 그런데 말예요. 그때가 서른 네살일 때인데 내가 이 '미지왕'을 찍으며 얻은 게 있다면 이런 거예요. '나는 아직 멀었다. 아직 배우가 안 되어 있다. 다시 공부해야 한다. 여기서 잘못하다간 단칼에 간다.' 그 뒤로 쭉 나를 돌아보면서 지냈어요. 내가 긴 기간 고민해왔던 것들을 제쳐두고 까불거리다간 결국엔 재앙이 오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않으셨던 거군요.

▷거만했고 오만했던 거지. 첫 영화부터 주조연을 해서인지 작고한 박철수 감독의 '성철'이라는 불교영화에 캐스팅 제안이 왔어요. 이 영화는 엎어졌는데 이후에도 여기저기 캐스팅이 들어왔어. 거부도 많이 하고 그랬어요. 상대 측으로부터 거만하게 여겨지는 게 당연했을 테지. 그러다 반성한 거예요. '아, 내가 잘못했구나. 다시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그러고 보면 1994년에 찍은 '미지왕'에 이어 2001년 '와니와 준하'가 개봉하기까지 공백이 길게 있으셨던데요.

▷'성철'이 엎어졌고, 배우로서 더 단련해야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다시 무대로 돌아간 거예요.

-무대로 돌아갔다고 한다고 하셨는데, 과문하기에 드리는 질문이지만 연극 배우와 영화 배우는 다르지 않나요.

▷배우는 같은 거예요. 난 연극배우, 영화배우 구분 안 해요. 단어가 무슨 의미예요. 연극이란 건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거고, 영화라는 건 카메라 앞에서 필름이 돌아가면 찍는 거고. 사실 그 차이는 지엽적인 거예요. 주어진 인물로 살아갈 수 있느냐, 그 능력이 중요한 거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대에서는 관객들에게 혼이 나고 욕을 먹으면서 내가 나를 성찰하며 발전시킬 수 있는 곳이지만 영화라는 곳은 그럴 시간이 없는 것 같다. 무대와 영화의 차이는 그거라고 여겼어요. 그래서 영화가 무서웠어요. 자칫하다간 단칼에 가겠다. 배우로서 좀 더 무게를 닦자, 단 칼에 안 죽을 수 있게. 그런 생각을 한 게 서른 중반 즈음이었죠. 이후에도 '1724 기방 난동 사건'(2008) 개봉 전에 출연작이 쭉 없었어요. 비슷한 이유였지.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것 같지만, 사실 이 기간의 일부는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 40대 초중반 무렵. 2~3년가량 캐스팅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군 가업은 무너진 지 오래였고, 소득이 없으니 그의 가정 또한 급속히 무너져갔다. 배우로서 자긍심이 강했으므로 거리에서 구걸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난생처음 극단적인 생각을 품은 시기였다"고 고백했다. "공백이 길었어요. 무대에도 오르지 못했던 때고. 모든 걸 정리하고 싶었어요. 세상이란 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구나. 그러니 떠나자." 그러다 다행히 동아줄 하나가 내려온다. 이정호 감독이 '베스트셀러'(2010) 출연을 제안한 것이다. 김홍파는 "정호가 그때 건져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관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베스트셀러'(2010) 이후 배우님의 영화 출연작이 급증하셨어요. 우선 '범죄와의 전쟁'(2011) '신세계'(2012)를 빼놓을 수 없어요. 촬영 당시 회고담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최민식, 하정우랑 같이 촬영을 하는데 보통 컷을 하면 모니터링 하러 가잖아요. 그런데 저는 모니터를 안 봐요. '미지왕'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어. 그걸 보면 머리 굴리게 되더라고요. 화면에 나는 이렇게 나오고 얘는 이렇게 나오는 구나. 그렇게 계산하는 게 보이고부터 모니터를 안 봤는데 그게 '미지왕' 촬영 중반 때부터였어. 어쨌든 나는 담배 한 대 피우려는데 윤 감독이 뒤에서 묻더라고. "선배님, 왜 모니터 안 보세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 "아니, 당신이 있는데 내가 모니터를 왜 봐. 모니터 앞에 가장 객관적인 당신이 있는데. 당신이 보고 디렉션 주면 돼." 그리 말하니 의아해 하죠. 그만큼 감독을 믿는 거예요. 나는 주어진 인물의 삶에 들어가서 그 삶을 믿고 살면 되는 거고요. 그리고, '신세계'는 박훈정 감독이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부탁하며 책(시나리오)을 줬어요. 그러고 미팅 때 만났죠. 1~2시간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 받는데 박 감독이 계속 나를 쳐다보더라고. 눈빛이 꼭 관찰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왜 나를 그렇게 관찰하세요" 했지. 박 감독이 그러대요. "'범죄와의 전쟁'을 보고 캐스팅했는데 그 모습이 안 보이네요." 제가 반문했어요. "왜 그 모습이 보여야 해요. 이게 지금 원래 내 모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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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테러 라이브'(2015)에서 배우 김홍파가 호연한 주진철 경찰청장은 그해 가장 얄미운 화제의 캐릭터로 일약 떠오른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더 테러 라이브'(2013) 주진철 경찰총장도 세간에 화제가 된 캐릭터였죠. 오만하고 안하무인한 인물이었어요. 이런 대사가 있었죠. "청장 주진철입니다. 가만히 계세요. 자기 생각만 합니까. 내가 분명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도 자꾸 불순한 생각을 하고 그러니까 이런 테러를 벌이는 거 아닙니까." 당시 네티즌들이 그랬어요. 실제 경찰청장이 TV 생중계로 저런 상황에 놓이면 배우님이 한 그대로 모습일 것 같다고요. 그만큼 실감나게 연기하셨다는 거죠.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2013)에도 출연했었는데요. 임 감독이 이런 문자를 보내왔어요.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장렬하게 전사하시던데요." 이게 가장 기분 좋은 평가였어요. 난 일상에서 뉴스를 항상 챙겨봐요. 그러다 조현오 전 경찰총장을 봤고 유심히 관찰했지. 배우로서 정치, 사회 돌아가는 풍경에 관심을 놓으면 안 돼요. 일상의 주변인은 물론이고요. 관찰을 해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평소에 사람들은 어떻게 관찰하세요?

▷난 지금도 버스랑 전철 타고 다녀요. 걷기도 자주 걷고. 그래야 천천히 관찰할 수 있거든.

-제 짐작으로는 배우님이 도리어 관찰당하는 입장일 것 같은데요?

▷(껄껄 웃으며) 사진도 많이 찍고 찍히고 그런데 괜찮아요. 어떤 분들은 너무 놀라서 못 다가오기도 하고 사인해달라고 해놓고선 손을 덜덜 떠는 분도 있고 그래요. 근데 말이죠. 지금처럼 사는 게 가장 많은 공부가 돼. 그래야 동시대에 사는 국민들은 어떤 감성을 갖고 사는지 배울 수가 있거든. 내가 운전을 안 한지가 20년이 넘었어요. 차라는 유동체로 운전을 하면 자꾸 나를 가두고 멈춰서 보지를 못하겠더라고. 내가 나이를 더 먹고 자꾸 살면서 느끼는 건데요. 배우는 죽을 때까지 배우면서 사는 직업이에요. 항상 공부하고 인물과 사물을 바라보며 관찰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멈춰버릴 거예요. 그러면 더는 내가 가진 배우의 능력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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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부자들'(2015)에서 배우 김홍파는 부패 재벌 오현수 회장을 실감나게 연기해 대중에게서 눈도장을 받는다. /사진제공=쇼박스
-2015년은 배우님께 기념비적인 한 해이실 테죠. '암살'(2015)의 김구 역으로 첫 천만영화 조연이 되셨고, 그해 겨울 '내부자들'(2015) 오현수 회장을 아주 실감나게 연기하신 터라 세간에 많이 회자됐어요. 부패 기업인의 초상을 탁월하게 보여주셔서 지금도 장면 장면 대사까지 떠오를 정도입니다. 이런 대사를 치셨죠. "서로 구린 놈끼리 가야지 냄새를 풍겨도 괜찮지 않겠나?" 모 기업인이 절로 떠오르는데 실제로 참고한 인물이 있으실 듯 해요.

▷우선 '암살'에서 백범 김구를 연기했던 건 저한테 각별한 일이예요. '더 테러 라이브'의 주진철 같은 이전 캐릭터들을 통해선 대중이 '저 사람 누구야'라는 호기심 같은 걸 자아냈다면, 이 캐릭터를 통해선 '아, 김홍파는 이런 연기하는 배우구나'라는 인식을 주지 않았나 해요. '내부자들'은 책(시나리오) 안에 담긴 걸 보고 내가 직접 구현한 거예요. 참고한 인물은 없어요. 전두환이라는 얘기도 있고 한화그룹 회장이라는 얘기도 있고 그런데 각자 생각하는대로 보시면 될 거예요. 오현수 회장의 경우엔 내가 생각해도 연상되는 인물들이 몇 있는데 그걸 다 걸러냈어요. 책 안에 있는 인물대로만 가자. 이 오현수라는 사람만 연구해서 이 사람을 살자. 그렇게 4~5개월 살아본 거죠. 촬영 끝날 때까지 이 오현수라는 사람의 호흡을 쭉 유지했어요. 바깥 사물을 봐도 그 사람의 시선으로 보려 하고 숨을 쉬어도 이 사람의 숨으로 쉬고.

-서두에 그러셨지요. 학창 시절 '정의의 사도'였다고요. 그런데 '암살'의 김구 캐릭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 사회의 부패한 위정자들을 많이 연기해오셨어요. 그런 배역과 현실 속 나의 불일치가 자아내는 묘한 아이러니 같은 느낌은 없으세요?

▷그런 건 없고, 그저 재밌지요. 오 회장이든 김구든 껍데기만 빼면 '사람'만 남아요. 난 그냥 어떤 사람이냐만을 보는 거야. 김구라 생각하면 부담이 너무 되니까 그 사람 삶을 못 풀어낼 것 같아요. 이분의 역사에 흠집을 내고 저는 저대로 배우로서 역량의 부족함이 탄로날 것 같고. 그래서 겉껍질을 싹 빼고 사람만 보려는 거지. 그렇게 캐릭터를 찾아가고 그 사람의 삶에 녹아 있는 아픔, 가치관 등은 뭔지 탐구해보고 하면서 이 사람에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서 기존의 나는 모두 빼내는 거지요. 여기에 선하고 악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이 사람으로 당분간 살아간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겁니다.

노자 41장에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것. 즉 큰 인물이 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이날 김홍파를 만나 대화하며 느낀 건 그가 이 대기만성형의 표본이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된 소이연이 그 오롯한 증거일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전하니 그는 이같이 답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항상 더 조심하려고 노력해요. 내가 걷고 있는 이 삶을 잘 살아가려면 까불지 말아야 한다. 까불다간 다친다. 그러니 늘 초심을 잃지 말자, 늘 공부하고 배우자고요." 지금까지 삶이 그러했듯, 그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럴수록 김홍파라는 '큰 물결'이 자아내는 파장 또한 더욱 커져갈 것이다.

[김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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