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사라진 장군들, 김재규 말고 또 있었다
[오마이뉴스 글:김종성, 편집:김지현]
▲ 건설부장관 시절의 김재규.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2년동안 건설부장관을 역임했다. |
ⓒ 국가기록원 |
김재규는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령부의 제16대 사령관이다. 1979년 박정희 살해(10·26 사태) 뒤, 전두환 군부에 의해 내려진 그의 사진이 근 40년 만에 다시 걸리게 되는 것이다. 또 김재규가 지휘했던 육군 3군단과 6사단 같은 부대들에서도 그의 사진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이 김재규의 명예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죽기 전에 스스로를 민주화투사로 자처했다. 이번 조치로 그가 민주화투사로 포장되는 게 아니란 이야기다. 그가 해당 부대들의 '관리자'였다는 사실이 사진 게시를 통해 시각적으로 재확인되는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진 지휘관 사진, 왜?
▲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은 1980년 3월 11일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구형 공판에서 검찰관의 논고가 계속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경청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
ⓒ 연합뉴스 |
"동부전선의 3군단사령부 강당 벽에도 역대 군단장들의 사진이 걸려 있으나,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및 정승화씨의 사진만은 보이질 않는다."
박정희 살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김재규의 초청을 받아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로 그해 12월 12일 체포됐다(12·12 쿠데타). 김재규 입장에서는, 박정희 살해 뒤에 정권을 잡으려면 참모총장을 자기 옆에 둬야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정승화를 초청해놓고, 현장 근처에서 기다리도록 한 것이다. 정승화에게는 내란방조죄가 적용됐다.
1980년 4월 30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은 김재규를 '패륜아'로 규정했다. 이날 <경향신문>에 따르면, "일부 항간에서 김재규 구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데"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는 이렇게 답했다.
"김재규가 한 일이 무엇인가. 아비를 죽인 자식과 다를 바 없는 패륜아이다. (중략) 인륜을 짓밟은 패륜아를 한때의 정치적 계산으로 의사(義士) 운운하며 구명운동을 전개한다면, 이는 극소수 종교인들의 인도주의적 차원보다는 도덕적 퇴폐와 윤리관의 말살을 입증하는 행위라 하겠다."
김재규를 패륜아로 규정한 전두환의 태도가 군 부대에서 김재규를 더욱 더 금기시하도록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전두환이 꼭 그 이유만으로 김재규를 미워한 건 아니었다.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으니, 전두환도 당연히 박정희 피살을 슬퍼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가 죽자마자 정권 장악에 골몰하고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두환은 다른 사람한테 패륜을 운운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패륜을 운운한 것은 김재규를 응징하는 분위기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측면도 있었다.
박정희가 전두환을 총애하고 후원한 것은 그가 4년제 정규 육사의 시초인 육사 11기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육사 11기 이하를 지원하고 그들 중 일부를 '하나회'라는 불법 사조직으로 묶었다. 5·16 쿠데타에 동참한 육사 11기 이전, 특히 5기 및 8기 출신들을 견제할 목적에서였다.
이런 구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전두환의 심리 속에는 선배 기수들에 대한 경쟁심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측이 육사 2기인 김재규와 육사 5기인 정승화의 사진을 내린 것은 1차적으로는 두 사람이 박정희 피살과 관련됐기 때문이지만, 이들에 대한 전두환의 개인적 경쟁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자신을 중심으로 군대 문화를 재편하고자 했던 전두환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상관 사진을 없앴던 박정희
그런데 전두환만 이렇게 한 게 아니다. 그를 양성한 박정희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박정희한테 걸림돌이 되는 인물의 사진도 군부대에서 제거됐다. 위의 <동아일보>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이다.
"육군본부 기밀실 벽에는 창군 이후 지금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이 차례로 걸려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장도영·김계원·정승화씨 등 3명의 전(前) 육군참모총장 사진만은 보이질 않는다. 장씨의 사진은 5·16 이후에, 김씨는 10·26 이후에, 그리고 정씨의 사진은 12·12 이후 어느 날 갑자기 떼어진 것이다."
박정희 피살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은 화를 면한 뒤에 김재규와 공범으로 엮여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를 받았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그 역시 김재규와 함께 묶는 게 유리했다.
그런데 김계원·정승화 사진을 떼어낸 것은 전두환 측이지만, 장도영 사진을 떼어낸 것은 박정희 측이다. 1960년 5·16 당시 박정희는 상관인 장도영의 암묵적 혹은 소극적 지지 하에 쿠데타를 성공시킨 뒤 장도영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반혁명사건으로 엮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가 형집행면제로 석방시켰다.
▲ '5.16 수뇌부' 장도영과 박정희 5.16 쿠데타 며칠 뒤 장도영(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박정희 부의장이 한 자리에 선 모습 |
ⓒ 정부기록사진집 |
한편, 1950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송호성(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육군 총사령관, 육사 4대 교장 등 역임)과 외무장관을 지낸 최덕신(육사 교장 등 역임)의 사진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송호성은 한국전쟁 기간에 북한군을 도운 전력이 있다(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는 이유로, 최덕신은 대통령 박정희와 불화를 겪은 뒤 월북했다는 이유로 사진이 내려졌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군 부대에서 사진이 내려진 장군들 중에는 북한군 협력이나 월북 같은 문제점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박정희나 전두환한테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박정희·전두환의 눈에 벗어난 사람들이 포함됐다는 점은 사진을 내리는 조치에 일관성이 별로 없었음을, 그리고 그 행위가 어떤 정치적 방향성을 띄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작금에 이야기되고 있는 '군의 정치적 중립성 준수'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군사안보지원사, 김재규 사진 다시 걸고 전두환-노태우 사진 내린다
- '전두환'과 '김재규' 진짜 애국자는 누구일까?
- '박정희'에 한 맺힌 85명의 노인들, 청와대 앞에 서다
- "지원금 빼돌려 대선자금으로".. 촘촘히 '부패 그물' 짠 박정희
- "박정희 제사상 차리느라 아이들 밥상 걷어차냐"
- 작전통제권 없었는데... 임성근 사단장 '직권남용' 입증 문서 나왔다
- "꼭 바꿔 달라" 험지 풀뿌리 20년, 임미애가 받아 든 미션
- "인권은 폐지될 수 없다" 외쳤지만... 학생인권조례 사라진 서울
- 김백 사장 오니, 갑자기 '노잼' 된 YTN 돌발영상
- [사진으로 보는 일주일] 검사님, 특별상 수상 축하해도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