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무덤에서 꽃피운, 메디치 가문 ‘부활의 꿈’읽음

이진숙 | 미술평론가

미켈란젤로공작 줄리아노·로렌초의 무덤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분묘에는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위)와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의 무덤(아래)이 마주보고 있다. 줄리아노의 발밑에는 ‘낮과 밤’, 로렌초의 발밑에는 ‘여명과 황혼’을 상징하는 남녀 한쌍 조각이 놓여있다. 시간의 반복을 보여주는 조각 위에 앉아있는 줄리아노와 로렌초는 영원한 세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분묘에는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위)와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의 무덤(아래)이 마주보고 있다. 줄리아노의 발밑에는 ‘낮과 밤’, 로렌초의 발밑에는 ‘여명과 황혼’을 상징하는 남녀 한쌍 조각이 놓여있다. 시간의 반복을 보여주는 조각 위에 앉아있는 줄리아노와 로렌초는 영원한 세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 내 메디치 가문의 분묘에 들어서는 순간, 500년 가까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던 오랜 시간의 무게가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다. 천장과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이 장소를 신성하게 만들며 이곳과 저곳을 구분 짓는다. 저곳, 성당 밖 바깥 거리에는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의 시끄러운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곳은 고요와 영원함, 그리고 경이로움이 지배하고 있다. 무덤의 주인들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세인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해졌지만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의 전성기 작품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청소년기에 이미 그의 재능을 알아본 ‘위대한 자 로렌초’(Lorenzo the Magnificent·1449~1492)에 의해 발탁되어, 열다섯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3년 동안 메디치궁에서 생활했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아들들의 선생이었던 마실리오 피치노, 아뇰로 폴리치아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등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덕분에 르네상스의 철학을 접할 수 있었고, 이후 조각과 회화뿐 아니라 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492년 로렌초가 급서하면서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간 미켈란젤로는 24세의 나이에 ‘피에타’로 명성을 얻는다. ‘위대한 자 로렌초’의 장남의 실정으로 메디치 가문이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했을 때, 미켈란젤로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가 ‘다윗’상으로 주가를 올렸다. 1506년에 이미 율리우스 2세의 부름으로 교황의 작가가 된 미켈란젤로의 예술가로서의 이력은 화려하게 채워졌던 셈이다. ‘위대한 자 로렌초’의 차남은 교황 레오 10세로, ‘위대한 자 로렌초’의 조카도 교황 클레멘트 7세로 즉위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메디치 가문의 인연이 이어졌다. 두 교황은 피렌체 산 로렌초 성당 내에 메디치 가문의 분묘를 의뢰했다. 무덤의 주인은 레오 10세의 동생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와 조카인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였다. 추방되었던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에 부활시키려는 두 교황의 꿈은 두 사람의 단명으로 허무하게 좌절되었다. 그리고 좌절된 가문의 부활의 꿈은 무덤으로 꽃 피웠다.

■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두 조각상 발밑의 남녀 한 쌍
시간의 반복 상징…‘초월’ 뜻해

하나의 방으로 꾸며진 공간의 정면 제단을 기준으로 줄리아노와 로렌초의 묘비가 서로 맞은편 벽에 위치하고 있다. 줄리아노의 발밑에는 ‘낮과 밤’을 상징하는 남녀 조각 한 쌍이 놓여있는데, 그중 ‘낮’은 미완성이다. 로렌초의 발밑에는 ‘여명과 황혼’이라는 제목의 남녀 한 쌍을 조각한 작품이 놓여 있다. 해가 뜨면 모든 것이 환희로 가득 차리라는 일말의 희망으로, 밤새워 잠 못 이룬 감미로운 피로가 ‘여명과 황혼’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낮밤, 여명과 황혼 등 영속하는 시간의 반복을 보여주는 조각들 위에 줄리아노와 로렌초가 위치하면서 그들은 시간을 초월하고 영원한 세계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메디치 가문의 남자들은 외모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줄리아노상은 ‘조각미남’이라고 불릴 만큼 특히나 아름다웠다.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나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모두 정치적인 면에서는 실망스러웠음에도 무언가를 이뤄낸 사람처럼 로마시대의 군인 같은 차림으로 등장한다. 생전 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이 조각품이 무덤의 주인과 전혀 닮지 않았다고 항의했다고 하는데, 미켈란젤로는 그에 대해 “그게 무슨 상관이냐? 천년이 지난 다음에 메디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가 신경 쓰겠냐?”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본심을 숨겼는지도 모른다. 초상화도 번듯이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외모와 닮지 않은 멋진 이상적인 인물로 만든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분묘에는 또 다른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안치되어 있다. 바로 레오 10세의 아버지 ‘위대한 자 로렌초’와 그의 동생이자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아버지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묘다. 이름을 돌려쓰는 이 집안의 관습 덕택에 삼대에 걸쳐서 두 명의 로렌초와 줄리아노가 이곳에 잠들어 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미켈란젤로가 주문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더 큰 영감을 주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작업했을 것이라 추론한다.

특히 깊은 사유에 잠긴 모습의 로렌초는 실패한 통치자였던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가 아니라 할아버지인, 미켈란젤로의 마음속에 있는 ‘위대한 자 로렌초’일 수도 있다는 추론이 제기된다. ‘위대한 자 로렌초’는 나름 성공한 통치자였고, 신플라톤주의 아카데미의 열렬한 후원자였고, 시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철학자들의 통치를 주장했던 플라톤의 이상에 잘 부합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렌초상과도 잘 부합한다. 실제로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라는 이름도 바사리가 붙인 이름이다. 정작 주문자였던 레오 10세도 다른 화가에게 “미켈란젤로는 무서워. 아무도 그를 다룰 수 없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 생각하는 사람의 비밀

‘문명의 접촉’ 담긴 로렌초 무덤
깊은 생각에 빠진 조각상 자세
손의 모양, 부처 ‘수인’과 유사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자세는 미켈란젤로가 1508년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예언자 예레미야’(위)의 모습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자세는 1531년 완공된 메디치 분묘의 로렌초상으로 다시 등장하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아래·1902년)에도 영향을 미친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자세는 미켈란젤로가 1508년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예언자 예레미야’(위)의 모습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자세는 1531년 완공된 메디치 분묘의 로렌초상으로 다시 등장하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아래·1902년)에도 영향을 미친다.

로렌초상은 군복을 입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 때문인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가 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문명의 놀라운 접촉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앞선 글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그리스도의 조롱’에 담긴 성 도미니크의 명상적 자세가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과도 묘하게 닮았다고 서술했다. 턱에 손을 괴고 생각에 잠긴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다. 1508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그린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에서다. 이 자세는 1531년 완공된 메디치 분묘의 로렌초상과 1541년 완공된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의 저주받은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 사이에서 고뇌하는 사람으로 또 등장한다. 여기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긴 흐름의 중심에 로렌초상이 있다. 유럽에 이와 유사한 도상이 없다는 이유로, 이 조각품은 미켈란젤로의 혁신성이 강조되어 평가받았다. 안젤리코의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로렌초상에서 볼 수 있는 명징한 명상의 기쁨과 반가사유상의 유사성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논문도 있다. 바로 모스크바-피렌체 협회의 회원인 피터 바렌보임(Peter Barenboim)이 2017년에 발표한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분묘에 조각한 쥐’다. 이 글은 미켈란젤로의 메디치 분묘의 로렌초상과 동양 불상의 상호연관성을 주장한다. 로렌초의 한쪽 팔은 불상처럼 턱을 괴고 있고, 다른 쪽 팔은 살짝 틀어 바깥쪽을 향하지만 그 손의 검지와 엄지가 부처의 서원을 나타내는 손의 모양인 수인(手印, mudra)과 유사하다는 점, 쓰고 있는 투구가 티베트 전사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 옷의 다른 부분과는 상관없이 목 주변에 늘어져 있는 끈, 살짝 꼰 듯한 다리 등이 불상을 연상시킨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조용한 정신적인 집중 상태의 표현”이 가장 닮았다고 강조한다.

팔꿈치 아래에 넣은 쥐 형상
서양선 두려운 존재였음에도
동양에서는 신상 아래의 도상

로렌초상에서 가장 해독되지 않았던 부분이 왼쪽 팔꿈치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입을 가진 쥐의 형상이다. 당시 서양 문화에서 쥐는 페스트를 퍼뜨리는 두려운 존재였다. 쥐가 이토록 아름다운 조각품과 왜 함께 등장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았다. 1939년 서양미술사의 권위자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로렌초상의 팔꿈치에 새겨진 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간의 상징’이라고 지적한 정도다. 이 쥐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일종의 비밀의 열쇠다.

가령 모스크바-피렌체 협회의 부의장인 알렉산더 자하로프와 세르게이 쉬얀은 2006년 네팔 여행길에서 가네샤 신(God Ganesha)상을 보게 되는데 가네샤 신의 손 아래에도 쥐가 있음을 발견한다. 물론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샤 신은 고대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을 형상화하는 그리스 로마시대의 전통을 따르는 르네상스적 취향에는 맞지 않았고 로렌초의 모습은 티베트식 투구를 쓴 모습으로 최종 형상화되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서양예술사에 없는 도상을 가져오면서 힌트를 하나 남겨놓았다. 유럽적 맥락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쥐가 바로 동서양 만남의 비밀스러운 암호였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이런 불상을 보았을까?

■ 이질적인 문명의 접촉

바렌보임은 피터 프랑코판의 <실크로드 세계사>를 인용하면서 실크로드를 따라 사상과 종교도 함께 전파됐을 거라고 말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로 진출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간다라 지방의 불교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문화의 교류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기에 그 반대에도 영향을 준다. 불교와 기독교 외에도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등도 실크로드를 따라 퍼져 나가면서 고대문화의 꽃을 피웠다. 실크로드를 통해서 50㎝ 이하 작은 크기의 불상들이 꽤 많이 서양에 유입되었을 거라는 추론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진위 여부를 떠나 서양인들에게 동양에 대한 환상에 불을 붙였다. 특히 포르투갈 사람들은 숱하게 인도에 다녀왔다. 포르투갈의 예술가이자 미켈란젤로의 지인이기도 한 프란시스코 데 홀란다의 회고록 <미켈란젤로와의 대화>에 따르면 두 사람이 유럽과 인도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정확한 텍스트는 알지 못하지만, 힌두교와 불상에 다양한 이념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미켈란젤로가 불상을 보았음을 의미한다. 미켈란젤로는 분명한 종교관을 갖고 있었기에 이교도의 신상에 대한 투쟁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이 조각품이 가지고 있는 동양적인 요소는 적절하게 암호화되어서 아무도 읽어내지 못했다.

사실 르네상스의 역동성은 중세의 기독교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가 서서히 무너지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피렌체 종교 회의(1439)에 참석했던 철학자 게미스토스 플레톤을 통한 신플라톤주의의 유입이 그 신호탄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는 ‘위대한 자 로렌초’에게 발탁되어 그의 집에 기거하면서 피렌체 최고의 인문학자이자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강의를 직접 들으면서 성장했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당시 은밀하게 보급되던 영지주의(Gnosticism) 기독교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영지주의는 불교 교파에서 일부 영향을 받아 일종의 범신론적인 세계 이해를 드러낸다.

미술에서는 마사초 때부터 성경 이야기를 그리기 위해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상들을 새로운 예술의 원천으로 사용해서 르네상스 미술을 꽃 피웠다. 미켈란젤로 역시 부처상에서 몇몇 요소를 가져온다고 자신의 작품이 비기독교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적 편견과 이교도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졌던 것은 종교개혁 이후다. 기독교적 정통성을 주장하던 시기에 가장 많은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반가사유상 접한 미켈란젤로
두 문명 섞어낸 것으로 추론

세계사는 동종교배가 아닌 이질적인 문화들 간의 접촉으로 발전해왔다. 영웅주의 사관에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문명 간의 접촉은 전쟁을 야기했고, 승패를 갈라서 정복과 재정복의 피를 흘리면서만 역사가 발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인류의 역사는 교류의 역사이다. 각 종교의 근본주의 분파들, 순혈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모든 종교와 문화는 끊임없이 다양한 영향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융합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로렌초상은 서양미술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수수께끼이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그리고 메디치 분묘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조각상이 두 점 더 있다. 바로 ‘군신상’(Military Trophy)이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실비오 코시니가 제작했으며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다고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다. 서양미술에서 가장 회피되는 이미지가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형상으로 대개 괴물로 분류된다. 이 조각품은 마치 우리나라 12간지 상처럼 쥐의 얼굴에 로렌초가 썼던 것과 유사한 투구와 동양적인 갑옷을 입고 있다. 전면에는 다시 줄리아노상처럼 로마의 복장을 한 듯한 남자의 토르소가 형상화되어 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메디치 분묘는 그저 누군가의 무덤이 아니라 그동안 잊혀졌던 문명교류사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모스크바-피렌체 협회 사이트의 이 논문은 인터넷상으로 전문이 공개되어 있고, 첫 번째 이미지는 로렌초상과 반가사유상의 병렬이다. 아마 누군가와의 새로운 접촉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한국미술과 서양미술을 사랑하는 젊은 학자들이 도전해볼 만한 흥미로운 연구테마가 등장한 것이다.

■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이진숙의 휴먼 갤러리](8)무덤에서 꽃피운, 메디치 가문 ‘부활의 꿈’

산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 분묘 :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하며 미켈란젤로의 전성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 필자 이진숙

[이진숙의 휴먼 갤러리](8)무덤에서 꽃피운, 메디치 가문 ‘부활의 꿈’

서울대학교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여행을 하며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에 큰 감명을 받아 미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롤리타는 없다 1, 2> <시대를 훔친 미술> <위대한 미술책> 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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