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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여름 특집 ‘한국의 구곡’|<3>한국의 대표 구곡 ‘화양구곡’ 르포] 송시열이 금방 놀다 간 듯 석각·정자 그대로…

월간산
  • 입력 2018.07.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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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곡 모두 거의 원형 유지… 구곡으로 유일하게 ‘명승’ 지정

화양구곡 중에 절경으로 꼽히는 제9곡 파곶에서 주변경관을 감상하고 있다.
화양구곡 중에 절경으로 꼽히는 제9곡 파곶에서 주변경관을 감상하고 있다.

문헌에 기록되고 실체가 확인된 전국 102개 구곡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구곡이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華陽九曲’이다. 구곡으로서 무려 300회 이상 등장한다. 더욱이 화양구곡은 국가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유일한 구곡이기도 하다. 그만큼 문화적 가치가 높고 경관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문화재청이 2014년 8월 화양구곡을 명승 제110호로 지정할 때 밝힌 이유를 보자.

‘명승 제110호 괴산 화양구곡은 속리산국립공원 내 화양천을 중심으로 약 3km에 걸쳐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좌우 자연경관이 빼어난 지점에 구곡이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구곡이 있지만 괴산 화양구곡은 1곡부터 9곡까지 거의 완벽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화양구곡은 조선 성리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 머물던 화양계곡에 설정된 구곡으로, 우암 사후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1641~1721년)가 설정하고, 이후 단암 민진원(1664~1736년)이 구곡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제1곡 경천벽擎天壁, 제2곡 운영담雲影潭, 제3곡 읍궁암泣弓巖, 제4곡 금사담金沙潭, 제5곡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암臥龍巖, 제8곡 학소대鶴巢臺, 제9곡 파곶巴串이다.

화양구곡은 구곡의 주요 구성요소인 바위, 소沼, 절벽 등 자연경관이 우수하며, 보존이 잘 돼 있다. 또 우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유적과 암각자 등 역사·문화적 요소가 많은 장소다.

국립수목원에서 조사한 바로는 1666년에 화양구곡이 설정됐으며, 길이는 3km 남짓 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계곡 길이는 10km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양구곡이 있는 괴산은 단일 지역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구곡이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괴산에만 7개의 구곡이 있다. 안동 10개, 영주 8개 다음으로 많다. 괴산의 구곡은 화양구곡을 비롯, 선유구곡, 연하구곡, 고산구곡, 쌍계구곡, 갈은구곡, 풍계구곡 등이 있다.

괴산에 이같이 구곡이 많은 이유는 첫째, 사상적·학통적으로 우암 송시열宋時烈을 존숭하는 기호 사림들이 그 학통 계승의 상징으로 구곡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둘째, 화양구곡이 가까운 곳에 있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참배하기 쉽고, 그곳을 탐방한 후 구곡을 설정하고 암각하는 방법 등을 답습해 구곡을 설정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시대 정치사에 있어 구곡에서 남긴 자취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는 망한 명나라를 지키려는 의리와 절개로 그가 숨어든 구곡의 이름도 화양이라 명명했다. ‘화華’는 중화의 의미로서 명나라를 지칭한다. ‘양陽’은 ‘일양내복一陽來復’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군자의 도道가 사라졌다가 다시 회복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시 말해, 명나라가 망했지만 다시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란 기대를 은연중에 비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화양동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의 극단을 보여 준 장소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사진 충북대박물관 소장,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제공
사진 충북대박물관 소장,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제공

9곡까지 성리학 공부단계로 나타내기도

그가 남긴 화양구곡을 속리산국립공원사무소 자연환경해설사인 이천순씨의 안내로 답사했다. 이씨는 “1곡부터 9곡까지 각각의 단계마다 빼어난 경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와는 별개로 성리학을 공부하는 단계로 설명하기도 한다”며 “점점 더 깊어가는 학문의 깊이를 9곡까지의 이름을 분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문의 깊이와 단계별 구곡 이름도 충분히 연관되어 있을 성싶다.

제1곡은 경천벽擎天壁이다. <화양지> 권1 동천구곡에 ‘물가에 가파르게 솟은 바위 모습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 같아 경천벽이라 명명했다. 계곡의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실제로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다. 우뚝하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귀신이 깎아놓은 듯하다. 바위가 층층이 쌓여서 높이가 몇 백 장은 족히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자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을 상상하면 ‘참 절묘하게 묘사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 솟은 바위 옆으로 화양천은 수백, 아니 수천 년 동안 유유히 흐르고 있다. 하천 수량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옛날 그림에는 배가 띄워 있다. 아마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배이지 않을까 싶다.

2곡으로 향하는 하천 옆에 아늑한 길을 조성했다. 가로수로 아름드리느티나무가 화양동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된 듯하다. 운치가 있다. 하천과 느티나무가 잘 어울린다. 안내한 이씨는 “뱀이 나무 속의 빈 공간에 둥지를 튼 새들의 알을 훔쳐 먹기 위해 가끔 침입하는 경우가 있다”며 “뱀이 가끔 출몰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천 옆에 갈대도 나온다. 그 사이로 나무데크를 조성해 사람들이 다니도록 했다. 초록의 푸른 잎들 사이로 걷는 기분은 매우 상큼하다. 초행길의 사람들에게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이윽고 2곡 운영담雲影潭이 나온다. 경천벽에서 걸어서 20분가량 걸렸다. <화양지> 권1 동천구곡에는 ‘운영담은 계곡의 북쪽에 있다. 계곡 물이 맑은 못을 만들었기 때문에 운영담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주자의 시 “하늘 빛天光 구름 그림자雲影”의 시구에서 취하여 명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늘의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 속에 맑게 비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 옆의 기이한 바위 한켠에 ‘雲影潭’이라 쓴 석각도 보인다. 바로 물 위에 있다. 장마로 수량이 불어나면 잠기겠다.

화양구곡의 하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화양구곡의 하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감탄 절로 나오는 절경의 연속

권진웅이 남긴 ‘운영담’이라는 구곡시에는 ‘이곡이라, 맑은 못 푸른 봉우리 감싸 안고/ 하늘의 구름 시원스런 자태 언제나 거꾸로 비치네/ 높은 산은 막막하고 영험한 발원지는 숨겨져 있는데/ 흐르는 물결에 복숭아꽃 아득히 흘러가네’라고 노래했다.

운영담에서 3곡 읍궁암 가는 중간에 하마소가 있다. 궁궐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마비 대신 하마소가 2기 세워져 있다. 여기 전해져오는 일화가 있다. 흥선대원군이 말을 타고 만동묘 앞을 지나가다 하마소에 이르러도 말에서 내리지 않자 만동묘지기에게 발길로 걷어차였다고 한다. 이에 후일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전한다. 아무리 송시열의 화양서원이 기세등등하더라도 만동묘지기가 대원군에게 발길질을 할 수 있었을까….

3곡 읍궁암은 계곡의 남쪽에 있다. 우암이 효종을 그리워하며 제사 날이면 이곳에 올라 통곡했다고 해서 명명됐다. 큰 바위가 희면서 둥글고 매끄러우며 면도 가지런하다. 운영담에서 걸어서 4분 정도 거리로 가깝다. 송시열 유적인 화양서원과 만동묘 맞은편 계곡 아래 있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죽은 지 6년 뒤인 1695년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배향하기 위해 세웠다.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 가장 유명하고 위세 당당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정도니 만동묘지기가 대원군의 말을 걷어차는 일화가 전해질 듯싶다. 올라가는 계단도 3개 혹은 5개, 11개 등 홀수, 즉 양수로 돼 있다. 모든 걸 양으로 맞춘 듯하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하던 사당이다. 황하가 수없이 흘러도 결국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처음과 끝자를 따서 ‘만동묘’라 칭했다.

읍궁암 계곡 위 걷는 길 옆으로 4기의 읍궁암비가 있다. 그중에 2010년 화양계곡 모래 속에서 권상하가 친필 로 새긴 읍궁암비가 발견됐으며, 가장 오래 됐다고 한다.

이윽고 제4곡 금사담이다. 화양구곡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송시열이 정계 은퇴한 뒤 금사담 반석 위에 집을 지어 이름을 암서재巖棲齋라 하고, 이곳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했다. 암서재를 중심으로 아래 위 구곡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금사담은 계곡물이 또 못을 이뤘는데 물이 맑고 모래가 깨끗하기 때문에 명명됐다고 전한다. ‘읍궁암에서 거슬러 올라가 동쪽으로 십 보를 가서 내를 건너면 이 못에 다다른다. 못의 북쪽 언덕은 암서재다. 송시열이 계실 때는 작은 배가 초당과 암서재를 연결해 남북의 냇가 길이 있었다. 지금은 못의 물이 점차 흐려지고 배도 없다’고 <화양지> 권1 동천구곡에 전한다.

우암 송시열이 정치를 은퇴한 뒤 머문 곳으로 알려진 암서재가 화양구곡 계곡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암은 이곳에서 학문을 익히며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암 송시열이 정치를 은퇴한 뒤 머문 곳으로 알려진 암서재가 화양구곡 계곡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우암은 이곳에서 학문을 익히며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양구곡의 9곡 파곶 주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화양구곡의 9곡 파곶 주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암서재 맞은편 석각 많이 남아

암서재 맞은편 도명산 등산로 입구 주변 암벽에 많은 석각이 남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석각은 ‘萬折必東만절필동’. 방향을 바꾸면 ‘非禮不動비례부동’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등도 보인다.

비례부동은 <중용>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원이자 핵심이다. 예가 아닌 비례는 사사로운 욕심을 의미하며, 예는 곧 하늘의 이치로서 사사로운 인간의 개인 욕심을 제거할 수 있는 근원이자 방편인 셈이다. 비례는 우암에게는 오랑캐족 청나라를 섬기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자연스레 명, 즉 중화를 숭배하는 게 예로 통하는 것이다. 대명천지 숭정일월에서 대명은 명나라를 높여 부른 말이고, 숭정은 명나라의 연호다. 그리 보면, 조선의 온 세상이 명나라의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화 사대주의의 극단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제5곡 첨성대는 금사담에서 5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높이 솟은 바위에 올라 별을 관측했다고 해서 첨성대라 불렀다. 첨성대 앞 다리는 암서재와 금사담, 첨성대를 비롯, 아름다운 화양계곡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경관 포인트로 꼽힌다.

<화양지> 권1 동천구곡에는 ‘낙양산의 아래 기슭에 있다. 층층 암석이 서로 쌓여 대를 이루었으며, 높이가 몇 백 장丈이 된다. 대 아래에 감실 같은 마애석벽이 있어서 선조 임금의 어필  만절필동 네 글자를 새겼고, 또 대 옆 절벽에 명나라 황제의 글씨를 새겼다’ 고 돼있다.

온통 명나라 찬양 일색이다. 송시열의 굳은 절개와 충절을 표시했다고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문구로 비난 받을 만한 것으로 판단된다. 화양천은 이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유유히 흐르기만 할뿐이다.

계곡 따라 얼마 오르지 않아 제6곡 능운대凌雲臺가 나온다. 큰 바위가 우뚝 솟아 능히 구름을 찌를 듯하다 하여 능운대라 부른다. ‘바위가 갑자기 솟아올라 계곡에 임하여 높기 때문에 능운대라고 이름한 것이다. 첨성대에서 계곡을 건너 북쪽으로 조금 오르면 이 대에 다다른다’고 <화양지>에 소개돼 있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바위들이 살아 꿈틀거리는 듯하고 더욱 기이해진다. 제7곡 와룡암臥龍巖도 그중의 하나다. <화양지>에 ‘큰 바위가 계곡변에 가로로 걸쳐 있고, 전체가 구불구불하여 마치 용과 같으며, 길이가 10여 장 정도 되기 때문에 와룡암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능운대에서 거슬러 올라가 2~3리 가면 이 암에 다다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능운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다. 길도 평평하게 조성돼 걷기 편하다. 바위가 어떻게 용과 같이 생겼는지 이리저리 뜯어본다. 뭔가 닮긴 닮아 보이긴 하다. 와룡암이란 글자도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제8곡 학소대鶴巢臺는 와룡암에서 불과 4분 거리에 있다.

학소대는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장송이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곳으로, 옛날 청학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 치며 보금자리를 이뤘기 때문에 명명된 것으로 전해진다. 운치 있는 바위와 하천은 정말 학이 둥지를 틀었을 법한 상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소나무와 바위가 학소대란 이름과 잘 어울린다.

9곡 파곶은 화양동 첫째가는 절경

마지막 제9곡 파곶巴串에 다다랐다. 문화재청에서 명승으로 지정할 때 사유서에는 파곶으로, 또 다른 책에서는 파천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원래의 의미를 따지면 파관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대 화폐로 사용하던 조개에 실로 꿴 모양을 본뜬 글자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는 파곡葩谷으로도 많이 쓰였다. 파곶은 화양구곡 중에서 가장 절경으로 알려져 있다.

<화양지>에는 ‘파곶은 계곡 가운데 있다. 흰 바위가 편편하게 퍼져 있는 것은 옥반과 같다. 깨끗하고 반드러우며 티끌이 없어서 수천 명이 앉을 수 있다. 계곡 물이 바위를 꿰고 흐르는 것이 마치 큰 뱀과 같기 때문에 파곶이라 이름 했다. 이곳은 화양동의 첫째가는 절경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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