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준

[스포츠서울 이지석기자]가수 김원준의 이름 앞에는 ‘X세대의 아이콘’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X세대’(1960년대 중반~1970년대말 출생)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개성파이자 경제적 풍요 속에 성장했던 세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던 세대’로 정의되는데 90년대 최전성기 때 김원준은 여기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그는 웬만한 홍콩 배우 뺨치는 수려한 외모의 패셔니스타였고, 음악적 유행의 최첨단인 댄스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내는 앨범마다 흥행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는데, 심지어 자신의 히트곡 대부분을 직접 만든 싱어송라이터였다.

최근 김원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강동대학교 실용음악과 학과장 겸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중이고, 상명대학교 대학원 뉴미디어음악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해 1월 태어난 딸 예은이를 돌보는 것도 그의 주요 일과다. 3인조 밴드 ‘베일’ 멤버로 틈틈이 공연과 음원 공개도 이어가고 있다.

최근 KBS2 예능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김원준 편을 녹화한 그를 만나 27년째 이어지고 있는 그의 음악 인생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김원준의 최전성기는 92년 데뷔 때부터 96년 5집 앨범을 낼 때까지 5년간이었다. 이후 그의 삶, 음악적 행보는 롤러코스터를 연상시킬 만큼 굴곡이 많았다.

-벌써 27년차 가수다.

내가 데뷔한 1992년을 돌아보면 음악 르네상스 같은 시대였다. 말로 표현 못할 만큼 황금기였다. 신승훈이 한해 선배이고, 같은 해에 서태지와아이들, 김건모가 함께 데뷔했다. 그래서 이들과는 개인적인 추억들이 있다. 신동엽.김건모와 ‘새내기 출동 Q’라는 프로그램 공동MC를 봤었다. 요즘 방송에서 김건모 형을 보면 90년대 초반 함께 놀던 기억이 난다. 데뷔 때 함께 했던 이들이 다 잘 되고 있어 기분이 좋다.

-90년대를 풍미한 가수였다.

남의 얘기 같다. 결혼하고 부쩍 그렇게 느껴진다. 직장 생활의 반복되는 일상을 경험하니 과거의 나를 점점 잊게 된다. 대학교 업무는 과거를 잊게 만든다.(웃음) 일부러 예전 영상을 보거나 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가끔 공연할 때 내 노래를 선곡하면 말린다. 낯부끄럽다.

-92년 자작곡 ‘모두 잠든 후에’로 데뷔했다. 당시 젊은 댄스 가수로는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데뷔 전부터 음악적으로 훈련 과정을 쌓았나.

80대 당시 팝음악을 좋아했던 형, 누나를 통해 라디오 ‘김광환의 팝스다이어리’를 알게 됐고, 그 프로그램이 내 교과서였다. 비틀즈, 데이빗 보위, 듀란듀란, 웸, 보이조지 등을 들으며 자랐다. 형과 누나가 교회 반주자라 자연스럽게 나도 악기를 익혔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중1 때부터 기타를 쳤다.

중2 때 송명희 시인의 시집을 읽고 감명을 받아 그분의 시에 멜로디를 입히며 습작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주무실때 몰래 카세트 더블데크로 자작곡을 녹음했다. 카세트 데크 양쪽에 공테이프를 넣고 번갈아가며 기타, 코러스 등을 녹음하는 무식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8트랙 이상을 쌓아가며 노래를 만들었다. 중3 때 친구들에게 그 테이프를 100원, 500원 받고 팔며 작곡에 몰입했다.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다.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했다.

예고를 가려다 부모님의 반대로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업(의사)을 물려 받으라 하셨는데 입시 시험에서 떨어졌고, 재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울예대 영화과 시험을 치며 내 인생이 바뀌었다.

대학교에 진학해 통기타 동아리 ‘예음회’에 들어가게 된다. 컬투 김태균이 동기인데 회장이었고, 윗선배로는 예민, 박선주, 조규만 등이 있다. 박선주 누나가 나를 예뻐해줬다. 이오스 김형중은 한 학번 후배다. 영화과인데 매일 예음회에서 살았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했던 동기로는 유재석, 김한석, 이휘재가 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서로 캐릭터가 뚜렷해 자연스럽게 친하게 됐다. 그 친구들은 개그맨 시험에 다 붙는데 나는 여러 오디션에 엄청나게 많이 도전했지만 다 떨어졌다. 91년 영화과 출신 동기들로 구성된 3인조 팀으로 강변가요제에도 출전했다. 기타 겸 백코러스를 맡았는데 본선 진출 직전에 떨어졌다.

-가요계에 어떻게 데뷔하게 됐나.

당시 제일기획에서 패션브랜드 ‘카운트다운’ CF모델 겸 가수를 뽑는 오디션에 합격했다. 마지막 오디션이란 각오로 봤는데 운이 좋았다. 음반을 취입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당시 프로듀서(그룹 ‘자전거 탄 풍경’ 멤버 강인봉)가 내가 만든 노래 ‘모두 잠든 후에’를 듣더니 “네 자작곡 참 좋다. 다른 사람 줄 생각하지 말고, 네가 불러라”라고 기회를 주셔서 운 좋게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할 수 있었다.

1992년 10월 18일 데뷔 앨범이 나오게 된다. 재밌는 건 ‘모두 잠든 후에’가 1~2번 트랙이 아니라 앨범의 7번 트랙이었다는 점이다. 타이틀곡은 당연히 1번 아니면 2번에 배치되던 시절인데, 앨범이 나오고 모니터링을 해본 결과 그 노래가 나와 가장 어울린다는 평가가 나와 데뷔곡이 됐다.

-92년 데뷔앨범의 ‘너 없는 동안’, 93년 2집의 ‘언제나’, 94년 3집의 ‘너 없는 동안’, ‘짧은 다짐’, 95년 4집의 ‘넌 내꺼’, 96년 5집의 ‘쇼’까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5년간 전성기가 이어진다.

내가 없었다. 아예 개인 시간이 없었다. 휴식기는 다음 앨범 준비기간이었다. 당시는 앨범을 내면 아무리 빨라도 4~5주 후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앨범 한장을 내면 3~6개월 활동을 했고, 1년이 금방 지나갔다.

-90년대를 대표하는 ‘댄스가수’였다. 하지만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악적 역량이 과소평가된 측면도 있다. 전성기였던 1~5집 시절, 96년 5집 타이틀곡 ‘쇼’(김동률 작사·작곡)를 제외하면 모두 자작곡이었다.

나는 댄스가수였다. 그때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한데, 누가 뭐래도 나는 댄스가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수식어가 고맙다. ‘X세대’, ‘90년대 댄스 가수’가 내 수식어다.

하지만 활동 당시에는 싱어송라이터로서 부담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1집이 잘되고, 2집이 잘된 뒤, 3집이 크게 성공했다.(주: 3집은 140만장 가량 판매고를 올렸다.) 내가 뭘 하면 바로 반응이 오던 시절이다. 반대로 욕심도 커졌다. 그 욕심이 발목을 잡은 거 같기도 하다. 지나고 나니 싱어송라이터로서 부담감,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5집까지 내가 갇혀있던 패러다임이었다.

-음악적 역량이 과소평가되는 ‘편견’에 힘들진 않았나. 단순히 얼굴 잘생긴 댄스 가수로만 평가되기도 했는데.

내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그렇게 보였을 거 같다. “자작곡 아닐거야. 자기가 쓴 곡도 아니면서 이름만 올려놓은 걸 거야”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당시로선 20대 초반 빠르게 데뷔했으니 그런 편견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마지막 ‘하이틴 스타’였다. 90년대 원조 하이틴 스타로는 김승진, 박혜성이 있고, 내 앞에는 ‘더 블루’(김민종, 손지창)이 있다. ‘아이돌’과는 다른 개념이다. 당시 우리 음악이 지금의 K팝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빨리 대중 앞에 빨리 데뷔해서인지 많이 부족했고 철도 없었다. 내가 30~40대에 데뷔했다면 음악적으로 더 인정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지나고 나서 돌아봤을 때 당시 내게 주어진 운명, 타이밍에 고마움을 느낀다. 그때엔 스무살에 자작곡으로 데뷔한 댄스 가수가 없었다. 내겐 그런 기회가 주어진 거였다.

김원준

-스스로를 ‘댄스 가수’로 인정한 건 언제부터인가.

90년대 활동할 때는 아니었다. 한참 후 받아들였다. 2012년 KBS 주말극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나를 닮은 옥탑방 가수 ‘윤빈’ 역할을 하며 생각이 바뀐 거 같다. 내 음악 인생이 좀 롤러코스터 처럼 굴곡이 있었는데 내가 ‘X세대’, ‘댄스가수’가 아니면 뭔가 라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됐다.

-활동 당시 ‘춤’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요즘 딸을 보며 확실히 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춤에 소질이 전혀 없더라. 원래 댄스 음악을 좋아했고, 데뷔곡 ‘모두 잠든 후에’도 전형적인 디스코 곡이었지만 당시 댄스음악을 하는 가수에겐 무조건 춤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큰 부담이었다. 요즘은 꼭 춤을 잘춰야 댄스음악을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때는 방송 댄스를 무조건 춰야 했다. 좋은 스타일리스트를 만나 치마 패션 등 패션 쪽으로 크게 어필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패션 관련 상도 참 많이 받았다.

-90년대 굉장히 많은 돈을 벌었을 것 같다.

어마어마 했다. 결론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웃음) 지금 그때만큼 벌었으면 달나라 여행을 두세번은 갔을 것이다. 확인도 안해봤지만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예 없더라.

-전성기 때 아쉬웠던 시행착오는 없나.

많은 음악인과 함께 작업을 하고, 더 많이 음악적 교류를 했으면 어땠을까 한다. ‘싱어송라이터’의 무게감을 내려 놓았으면 좋았을 거 같다. 96년 5집은 내려놨었다. 자진해서 내려 놓는 건 힘들었고 김동률이 ‘쇼’를 꼭 불러달라고 부탁해서 내려놓을 수 있었다. 큰 선물을 받은 거다. 혼자 발품 팔고 번민하고, 그런 방식으로 뭔가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도 큰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김동률이 내게 선물한 ‘쇼’는 참 애틋한 곡이다. 내 음악 인생의 정점을 찍을 수 있게 해준 곡이었다.

-90년대 화려했던 전성기를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까.

영화 ‘트루먼쇼’ 같다. 각본대로, 만들어진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 내 것 아닌 삶을 산 거 같다.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타임머신을 타는 거 같다. 당시 나는 만들어진 세트장에서 산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였는데 남의 얘기같다.

monami153@sportsseoul.com

<가수 김원준. 사진 | 최승섭기자 thunder@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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