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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개화기 첫 예방의학서 한글로 집필… ‘천한 문자’ 오명 벗다

입력 : 2018-07-31 09:00:00 수정 : 2018-07-30 21: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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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끝> 천연두와 한글, 그리고 지석영 / ‘우두 의사’·국어학자이었던 지석영 / 천연두 퇴치·의료인력 양성에 앞장 / 자전·어학교재 펴내 근대 문물 확산 / 쉬움 탓에 열등하게 여겨지던 한글 / 지식 전달 매개체… 인식 변화 가져와 한글을 자랑스러운 한국의 문화유산이라 할 때 이의를 제기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글’과 ‘사랑’이 종종 함께 쓰이는 것을 보면 한국인에게 한글을 사랑한다는 것은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일인 듯하다. 하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한글은 ‘암클’, ‘상말’, ‘언문(諺文)’ 등으로 비하되며 한문보다 열등하고 천한 문자로 여겨졌다. 누구나 쉽게 배워 쉽게 쓰기를 바란 세종대왕의 마음과 달리 그 ‘쉬움’으로 인해 ‘한문도 모르는 무식자’들이나 쓰는 글자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한글에 대한 인식에 급격한 변화가 생긴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개화사상에 눈을 뜬 근대의 지식인들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이자 ‘선왕에 의해 창제된 우리 고유의 문자’로서 한글이 갖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사용해 편리한 문자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배경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뿐 아니라, 한글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 근대의 선각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지석영(1855∼1935)은 그중에도 근대 의학과 국어학이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학문 분야를 개척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지석영(왼쪽)은 한글의 가치를 인식하고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선각적 지식인이다. 지석영의 ‘(증정부도) 자전석요’(1920) 중 ‘心’(심), ‘骨’(골), ‘臟’(장) 항목 및 부록의 도안(오른쪽 상단 사진). 1909년 처음 발간된 자전석요는 모든 한자의 뜻과 발음을 한글로 풀이해 ‘최초의 근대적 자전’으로 평가받는다. 1908년 발행된 ‘아학편’(1908)에 실린 ‘女’(여), ‘士’(사), ‘酒’(주) 항목(오른쪽 하단 사진). 각각의 표제 한자에 대해 오른쪽 상단부터 한국어 발음과 뜻, 중국어 발음과 성조, 일본어 발음과 뜻, 영어 발음을 제시했다.

◆근대 의학의 선구자이자 국어학자 지석영

지석영은 이 땅에서 두창(痘瘡), 즉 천연두를 퇴치한 일등공신이다. 당시까지 국내에서 두창 치료를 위해 두창에 걸린 사람의 병변 부위를 정상인에게 주입해 면역을 기르도록 하는 인두법(人痘法)이 행해졌는데 부작용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1749∼1823)가 사람이 아닌 소의 병변 부위를 활용하는 우두법을 발명했고 치료 효과가 매우 뛰어났다.

책으로만 우두법을 접했던 지석영은 1879년 부산에 있는 일본 해군 소속의 ‘제생의원’(濟生醫院)을 방문해 일본인 의사들로부터 두 달 동안 우두술을 배웠고 우두의 원료인 두묘(痘苗)와 종두침을 구해 귀경했다. 하지만 두묘를 직접 제조하지 않는다면 우두법 보급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 1880년 제2차 수신사의 일원으로 직접 일본에 가 두묘 제조법을 배웠다. 귀국 후 한성에 종두장을 차려 본격적으로 우두 접종을 실시하는 한편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 출판된 서구의 근대 과학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1899년 설립된 의학교의 초대 교장을 지내며 근대 초 의료 인력 양성에 앞장섰다.

지석영의 선각적인 인식과 적극적인 실천은 의료 분야에만 그치지 않았다. 1896년 ‘대조선독립협회회보’에 ‘국문론’을 발표하여 한문을 하는 이들이 한글을 천시하는 풍조를 비판하며 세종대왕이 글자를 만든 본뜻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05년 고종에게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올려 당대의 혼란스러운 한글 표기를 통일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을 두고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한글을 연구하는 최초의 국가기관인 ‘국문연구소’가 설립되었으니 근대 의학과 근대 국어학의 뿌리를 모두 지석영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석영은 의학 분야에서 먼저 두드러진 업적을 보이다가 이후 국어학 분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혔다. 의사로서의 지석영과 국어학자로서의 지석영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이 있었을까.

지석영이 한글과 관련된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게 된 것은 부산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들을 접촉했던 시기였으리라 생각된다. 당시 지석영은 종두술을 배우는 한편 일본인 의사들의 부탁으로 한국어 학습서의 오자를 교정해 주었는데 이때의 경험을 통해 한글 표기의 현황을 생생히 직면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최초의 예방의학서 ‘신학신설’(1891) 서문에서 지석영은 약을 먹고, 의사를 찾아갈 필요도 없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책을 지었다고 밝혔다.

◆근대 격동기, 문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

조선시대에도 소설이나 편지 등에서는 한글이 쓰였지만 지식을 전달하는 문자는 어디까지나 한문을 의미했다. 국가의 주요 기록과 문서들이 한문으로 작성되었고 과거시험 역시 한문으로 치러졌다. 조선시대에 지식이란 곧 한문 소양을 의미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19세기 말 지석영은 지식 전달의 매개체로서 한글이 갖는 잠재적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있었다. 종래의 한문에 기반을 둔 지식 전통에 더하여 한글을 매개로 근대적 지식을 적극 수용하고자 했는데 그 시도의 출발점은 바로 자전(字典)의 편찬이었다.

자전은 한자를 일정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한자의 형태, 발음, 뜻에 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기술한 책이다. 물론 그전에도 ‘전운옥편’(全韻玉篇)과 같은 자전이 존재했지만 1909년에 발행된 지석영의 ‘자전석요’(字典釋要)가 ‘최초의 근대적 자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수록된 모든 한자의 뜻과 발음을 처음으로 한글로 풀이했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로 쓰이는 한자의 경우 하나하나의 뜻을 모두 한글로 밝혀 적었는데 당시의 맥락에서 더 널리 쓰이는 뜻을 먼저 배열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心’이라는 한자를 보면, 종래에 ‘마음’으로만 풀이되던 것과 달리 ‘마음, 염통, 속’의 세 가지 의미로 풀이하였다. 한편, 부록으로 덧붙인 도안을 보면 신체 부위나 내장 기관을 의미하는 한자에 대해서는 서구 의학의 해부학적 지식을 적극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석영은 1908년 광학서포에서 ‘아학편’(兒學編)을 출간했는데 이는 정약용이 편찬한 한자 학습서 ‘아학편’(1804)을 재편집한 것이다. 그런데 지석영의 아학편은 한자 학습서라기보다 종합 외국어 학습서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이다. 다산이 선정한 학습용 한자 2000자를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풀이하였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지석영은 외국어에 능통한 전용규의 도움을 받아 ‘유럽과 아시아가 긴밀히 교역하는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전례 없는 신개념 어학 교재를 편찬한 것이다.

◆최초의 근대적 예방의학서를 순 한글로 집필하다

지석영이 품고 있던 의학자로서의 고민과 국어학자로서의 고민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국 최초의 예방의학서 ‘신학신설’(1891)이 탄생했다. 민간에서 참고할 만한 서구의 근대 의학 지식을 순 한글로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지석영은 ‘햇빛’, ‘열’, ‘공기’, ‘물’, ‘음식’, ‘운동’ 등과 관련해 일상생활에서 주의할 점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성인이 모유를 먹는 일이 있지만 건강상 이득이 없고 모발을 윤택하게 하는 효과도 없다고 하여 종래 동의보감에서 소개한 인유(人乳)의 효과를 부정하기도 했고, 밥을 많이 먹은 후에 ‘가배’(??), 즉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졍신이 잇슴”을 깨닫게 된다고 하여 외국의 식습관을 소개하기도 했다.

신학신설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외국의 사례들이 풍부하게 인용되어 있는데 모두 중국에서 편찬된 한역 서구 의학서들을 참고한 것이다. 서양의 의사가 총알이 위를 관통한 부상자를 치료하며 위의 작용을 연구한 결과 생선과 달걀은 소화가 잘 되고 기름지고 소금에 절인 음식은 소화가 더뎠다는 이야기, 영국에서 창문의 수대로 세금을 걷는 조세제도가 시행되자 다들 창문을 막거나 없앤 결과 일조량이 부족해져 사망자가 늘었다는 이야기, 외국에서는 다들 기차나 마차를 타고 다녀 운동부족이 심각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에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요동하는 것’과 같이 일부러 운동을 하는 풍습이 있다는 이야기 등 전통적 의학서와는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안예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글이 국가의 공식 문자로서 선포된 것이 1894년 갑오개혁 당시였고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된 것이 1896년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당대의 최첨단 의학 지식이 1891년에 오직 한글로만 기술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당시까지 한글은 일정한 표기 규범도 없었고 한글 저술에 대한 식자층의 거부감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신학신설의 서문에서 지석영은 모든 사람이 ‘보신지학’(保身之學)의 이치를 깨달아 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의사를 찾아갈 필요도 없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책을 지었다고 하였다. 자신이 먼저 배우고 익힌 유익한 지식을 세상에 널리 알려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다짐이 읽히는 대목이다. 한글은 그 다짐을 실천하기 위한 유용한 매개체 역할을 했고 이러한 노력들이 이어지며 한글도 ‘무식자의 천한 문자’라는 오명을 벗게 되었다.

안예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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