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식에서 간식을 거쳐 비상식으로..라면의 추억

김성희 2018. 7. 30. 09: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오래] 김성희의 어쩌다 꼰대(55)
엊그제 뭉클한 이야기를 들었다. 70 가까운 지인 한 분이 동년배 고향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나왔던 라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제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기업을 운영할 정도로 성공한 기업가가 우연히 젊은 시절 고생담을 꺼내더란다.

“단칸방에 살던 신혼 시절에 정말 형편이 어려워 라면 한 개로 끼니를 때워야 할 때도 있었죠. 그럴 때는 밤에 라면을 끓여 냄비에 두고 잤어요. 왜냐구요. 그렇게 밤새 퉁퉁 분 라면을 아침에 집사람이랑 둘이 나눠 먹으며 버텨야 했거든요.”

한순간 숙연해졌던 분위기는 이내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을 몰라” 식의 ‘성토’로 이어졌다든가.


처음 맛본 라면의 경이와 황홀
어린시절 우리 식구에겐 별식이자 특식이었던 라면. [중앙포토]

국민학교 5학년쯤 맛본 라면의 경이롭고 황홀 그 자체였다. 진한 닭국물에 오돌오돌 씹히는 국수라니! 동네 국수 가게에서 만든 가는 기계 국수를 멸칫국물에 끓여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니 라면은 넉넉지 않은 우리 식구에겐 별식이자 특식이었다. 이웃 장군 댁에 김장 품앗이를 갔다가 처음 맛본 어머니는 어렵사리-라면을 사려면 버스정류장 두 곳을 지나야 하는 시장까지 가야 했다-구한 라면을 한동안 아버지께만 끓여 드렸다. 그 당시 남은 라면 가닥 한두 개를 집어먹을 때의 감동 혹은 행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지나지 않아 전 국민의 대용식으로 자리 잡았다. 라면을 처음 들여온 분이 희망했듯이 간편하고, 비교적 저렴해서 일부에서 제기된 영양가 문제에도 불구하고 없어서는 안 될 식품이 됐다.

국민학생에서 중고생까지, 먹성 좋은 삼 형제가 있던 우리 집은 더했다. 어머니에게는 매달 50개들이 라면 한 박스를 들여놓는 것이 월례행사였다. 마땅한 간식거리도 없을 때이니 출출하면 형제들이 저마다 앞 다퉈 라면을 끓여 먹는 통에 그것도 매달 보름이 되기 전에 동이 나기 일쑤였다.

쓰라린 기억도 떠오른다. 내가 다닌 중고교는 버스를 타려면 2㎞ 가까이 걸어 내려와야 했는데 그러자면 분식집을 여럿 지나야 했다. 거기선 집에서 한두 개 끓이는 라면과는 다른, 푹 퍼졌지만 남학생들의 활기가 담긴 색다른 맛의 라면이 학생들을 유혹했다. 함께 공 차고 놀던 친구들이 하굣길이면 꼭이라 할 정도로 라면 추렴을 하러 들르곤 했는데 나는 매번 빠졌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반면 친구들에게라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라면 관련 이야기를 하자면 반나절도 모자랄 게다. 끓이는 게 아니라 쪄내고, 그나마 가져오느라 국숫발이 우동만큼 불어터졌던 군대 훈련소 라면, 석유풍로와 씨름하던 일, 머리가 굵어져서는 나만의 라면 레시피(?)를 만든다고 이것저것 넣어 끓이던 실험 정신 등등.


이제는 아내가 집을 비울 때 비상식량
이제는 비상식량이 되어버린 라면. 아내가 집을 비우면 영락없이 주식이 된다. [중앙포토]

이제는 라면이 비상식량이다. 아내가 종종 집을 비울 때면 영락없이 주식이 되기 때문이다. 나가서 사 먹으려니 혼자인 게 걸리고, 상을 차리자니 귀찮다 보니 라면이 가장 만만하다.

가스 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라면을 찾는다. 돌연 푸근해진다. 비빔면, 볶음면, 생면에 설렁탕면, 새우탕면 등등 다양한 라면이 나를 반기는 덕분이다.
문득 ‘옛날 왕보다 요즘 중산층이 더 혜택 받는다더니만…’ 하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면서 ‘이런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면 행복할 수 있다’란 행복론까지 이어진다.

한데 순간 치미는 짜증! 누구야, 손에 잘 묻는 액상 수프를 라면에 넣을 생각을 한 이가.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jaejae99@hanmail.net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