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원령공주…그리고 백년 거북을 지키는 사람들

입력 2018.07.29 (09:02) 수정 2018.07.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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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 해안 바다거북 보전 협의회 홈페이지에서

원령공주의 숨결이 숨 쉬고 있는 일본 규슈 남단의 섬 야쿠시마는 원시 자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천 년 고목의 섬이다.

이 숲을 지켜냈던 이들의 이야기를 지난주 전했는데, 이번에는 숲이 아닌 바다에서 원령공주가 됐던 이들을 만나 보려고 한다.

[연관기사]
[특파원리포트] ‘원령공주 숲’을 지키는 사람들
[글로벌 리포트] 1,000년 고목을 지키는 사람들


'천 년 고목'을 지켜낸 이들만큼 멋진 '백 년 거북'을 지켜낸 사람들이다.

누구도 불을 켤 수 없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가로등이라고는 거의 없는 지방도를 얼마나 달렸을까. 램프 몇 개를 들고 차를 유도하는 사람들이 불쑥 나타났다.

목소리 높이는 일 없이 조용조용 차를 세우고 길거리 휴게소 같은 한 건물로 들어섰다. 2~30명의 사람이 앉아 바다거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나카타 해안으로 산란을 위해 올라오는 바다거북을 보려는 사람들이다.

얼마쯤 됐을까. 거북이 2마리가 산란을 시작했다는 말에 조심조심 발걸음을 해안가로 옮기기 시작한다.

"거북이들이 산란 철에는 빛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휴대전화 빛도 안되니 절대 주의해 주세요. 촬영도 안 됩니다."

어제는 휴대전화 빛을 본 바다거북이 해안으로 올라왔다가 다시 돌아가 버렸단다. 오직 안내인들만이 바다거북이 인식하지 못하는 붉은 빛의 전등을 켜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눈이 막히면 귀가 뚫린다고 했던가. 별빛과 약하게 산란하는 포말만이 보이는 깊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파도와 솔바람 소리가 몸의 감각을 채워줬다.

"조그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한 마리가 구멍을 파다가 실패해 자리를 옮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또 30여 분. 시간이 멈췄는가 싶더니 "이제 가시죠 들"이라는 조그만 소곤거림이 현실의 팽이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30년이 걸린 붉은 바다거북의 첫 산란

칠흑 같은 바닷가 한쪽.

등 딱지 길이만 83cm 크기의 바다거북 뒤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쉬익 푸...푸..." 어미 거북의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3~40m 정도 깊이의 구덩이. 어미 거북은 이미 2~30개의 알을 낳은 상태였다. 그리고 한번 힘을 쓸 때마다 탁구공만 한 알이 대여섯 개 씩 투두둑 떨어졌다.

"길이로 봤을 때 수령이 30살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린 어미입니다. 달고 있는 식별표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이번에 처음 산란을 하러 올라온 거북으로 보입니다."

바다거북 보호를 위해 매일 밤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는 환경성 직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 해변에서 태어난 바다거북은 해류를 타고 미 서부 해안까지 이동해 자란 뒤 산란을 할 때가 되면 야쿠시마로 돌아온단다. 그렇게 걸리는 시간이 대략 30년 정도.

눈앞도 거북도 수십 년의 시간을 켜켜이 안고 태평양을 헤엄쳐 태어난 이곳 야쿠시마 해안으로 돌아왔다니, 나와는 다른 시간 단위에 사는 거북의 뒷모습이 새삼 다시 놀라워 보인다.

어미 거북은 한 시즌에 3차례 정도 상륙해 매번 100개 전후의 알을 낳는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먹는 활동도 거의 중단할 정도로 산란에만 신경을 쏟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북을 지키러 나선 사람들

나카타 해안 바다거북 보전 협의회 홈페이지에서나카타 해안 바다거북 보전 협의회 홈페이지에서

해안의 내륙 쪽에는 거북 산란장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가 처져 있다. 거북은 태풍 등으로 모래사장에 낳은 알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될 수 있으면 모래사장 끝까지 올라와 알을 낳는다고 한다.

하지만 거북에게 가장 큰 위협은 태풍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야쿠시마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고 점점 섬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모래사장이 드넓은 나카타 해안은 해수욕장으로도 인기를 끌게 됐다.

문제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거북 알. 해안을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알이 있는 산란처 위 모래가 단단해지면서 부화를 한 새끼 거북들이 잘 빠져나오지 못해 폐사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이 해안에 상륙한 거북이 150마리 정도 됩니다. 이 거북들이 몇 번에 걸쳐 나은 알이 대략 1만 개쯤 된다고 할 수 있죠."(환경성 직원)

그런데 새끼 거북이 태어나 성체까지 죽지 않고 생존할 확률이 1/5000이란다. 결국, 자연 그대로 둬도 1년에 이 해안에서 태어난 거북 중 불과 2~3마리만이 온전히 자라 이 해안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산란장이 사람들의 발로 어지럽혀져서야 생존율은 더 떨어질 수 밖에...

몇 년 동안 해변에서 새끼 거북의 사체를 발견한 뒤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나선 것은 환경 보호단체도, 지자체도, 환경 관계 공무원도 아닌 그 동네 어르신들이었다.

22년 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보호운동. 산란장을 분리하고 관광객과 거북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 새끼 거북을 살려 나가기 시작했다.

5월에서 7월까지 산란 철이면 주민 30여 명이 당번을 정해 매일 밤 돌아가며 어미 거북의 상륙을 확인하고 산란을 모니터하고 있다. 정부에서 힘을 보탠 것은 주민들이 나선 지 한참 뒤의 일이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바다거북 산란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에게 받는 소정의 협력금에서 나오는 수입뿐이다.

지난해 이 해안을 찾은 탐방객은 650명 정도. 1인당 1,500엔을 내는 만큼 3달 동안 수입이 97만 5천 만엔, 우리 돈 1,000만 원 정도가 된다. 결국, 매일 밤 고생하는 주민들에 오는 수입은 한 달 300만 원이 좀 넘는 정도지만 바다와 거북과 사람이 함께 살기에는 충분한 돈이 됐다. 그렇게 과거 해수욕객들을 맞던 평범한 바닷가 마을은 어미 거북의 감동을 전하는 에코 관광지로 변신해 갔다.


활동 초기 수입이 줄어든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등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은 거북을 살리고 환경을 보호하는 길이 모두가 함께 사는 길임에 공감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나카타 해안 바다거북 보호 협의회'를 중심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바다거북의 열성 팬이 됐다.

숲을 지키는 원령 공주, 그리고 바다를 지킨 거북 왕자도 멋진 야쿠시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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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9 09:02:35
    • 수정2018-07-29 09:30:59
    특파원 리포트
▲나카타 해안 바다거북 보전 협의회 홈페이지에서

원령공주의 숨결이 숨 쉬고 있는 일본 규슈 남단의 섬 야쿠시마는 원시 자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천 년 고목의 섬이다.

이 숲을 지켜냈던 이들의 이야기를 지난주 전했는데, 이번에는 숲이 아닌 바다에서 원령공주가 됐던 이들을 만나 보려고 한다.

[연관기사]
[특파원리포트] ‘원령공주 숲’을 지키는 사람들
[글로벌 리포트] 1,000년 고목을 지키는 사람들


'천 년 고목'을 지켜낸 이들만큼 멋진 '백 년 거북'을 지켜낸 사람들이다.

누구도 불을 켤 수 없다.


밤 9시가 넘은 시간. 가로등이라고는 거의 없는 지방도를 얼마나 달렸을까. 램프 몇 개를 들고 차를 유도하는 사람들이 불쑥 나타났다.

목소리 높이는 일 없이 조용조용 차를 세우고 길거리 휴게소 같은 한 건물로 들어섰다. 2~30명의 사람이 앉아 바다거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나카타 해안으로 산란을 위해 올라오는 바다거북을 보려는 사람들이다.

얼마쯤 됐을까. 거북이 2마리가 산란을 시작했다는 말에 조심조심 발걸음을 해안가로 옮기기 시작한다.

"거북이들이 산란 철에는 빛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휴대전화 빛도 안되니 절대 주의해 주세요. 촬영도 안 됩니다."

어제는 휴대전화 빛을 본 바다거북이 해안으로 올라왔다가 다시 돌아가 버렸단다. 오직 안내인들만이 바다거북이 인식하지 못하는 붉은 빛의 전등을 켜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눈이 막히면 귀가 뚫린다고 했던가. 별빛과 약하게 산란하는 포말만이 보이는 깊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파도와 솔바람 소리가 몸의 감각을 채워줬다.

"조그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한 마리가 구멍을 파다가 실패해 자리를 옮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또 30여 분. 시간이 멈췄는가 싶더니 "이제 가시죠 들"이라는 조그만 소곤거림이 현실의 팽이를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30년이 걸린 붉은 바다거북의 첫 산란

칠흑 같은 바닷가 한쪽.

등 딱지 길이만 83cm 크기의 바다거북 뒤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쉬익 푸...푸..." 어미 거북의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3~40m 정도 깊이의 구덩이. 어미 거북은 이미 2~30개의 알을 낳은 상태였다. 그리고 한번 힘을 쓸 때마다 탁구공만 한 알이 대여섯 개 씩 투두둑 떨어졌다.

"길이로 봤을 때 수령이 30살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린 어미입니다. 달고 있는 식별표가 없는 것으로 봐서 이번에 처음 산란을 하러 올라온 거북으로 보입니다."

바다거북 보호를 위해 매일 밤 현장 조사를 벌이고 있는 환경성 직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 해변에서 태어난 바다거북은 해류를 타고 미 서부 해안까지 이동해 자란 뒤 산란을 할 때가 되면 야쿠시마로 돌아온단다. 그렇게 걸리는 시간이 대략 30년 정도.

눈앞도 거북도 수십 년의 시간을 켜켜이 안고 태평양을 헤엄쳐 태어난 이곳 야쿠시마 해안으로 돌아왔다니, 나와는 다른 시간 단위에 사는 거북의 뒷모습이 새삼 다시 놀라워 보인다.

어미 거북은 한 시즌에 3차례 정도 상륙해 매번 100개 전후의 알을 낳는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먹는 활동도 거의 중단할 정도로 산란에만 신경을 쏟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북을 지키러 나선 사람들

나카타 해안 바다거북 보전 협의회 홈페이지에서
해안의 내륙 쪽에는 거북 산란장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가 처져 있다. 거북은 태풍 등으로 모래사장에 낳은 알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될 수 있으면 모래사장 끝까지 올라와 알을 낳는다고 한다.

하지만 거북에게 가장 큰 위협은 태풍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야쿠시마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고 점점 섬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모래사장이 드넓은 나카타 해안은 해수욕장으로도 인기를 끌게 됐다.

문제는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거북 알. 해안을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알이 있는 산란처 위 모래가 단단해지면서 부화를 한 새끼 거북들이 잘 빠져나오지 못해 폐사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이 해안에 상륙한 거북이 150마리 정도 됩니다. 이 거북들이 몇 번에 걸쳐 나은 알이 대략 1만 개쯤 된다고 할 수 있죠."(환경성 직원)

그런데 새끼 거북이 태어나 성체까지 죽지 않고 생존할 확률이 1/5000이란다. 결국, 자연 그대로 둬도 1년에 이 해안에서 태어난 거북 중 불과 2~3마리만이 온전히 자라 이 해안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산란장이 사람들의 발로 어지럽혀져서야 생존율은 더 떨어질 수 밖에...

몇 년 동안 해변에서 새끼 거북의 사체를 발견한 뒤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나선 것은 환경 보호단체도, 지자체도, 환경 관계 공무원도 아닌 그 동네 어르신들이었다.

22년 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보호운동. 산란장을 분리하고 관광객과 거북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 새끼 거북을 살려 나가기 시작했다.

5월에서 7월까지 산란 철이면 주민 30여 명이 당번을 정해 매일 밤 돌아가며 어미 거북의 상륙을 확인하고 산란을 모니터하고 있다. 정부에서 힘을 보탠 것은 주민들이 나선 지 한참 뒤의 일이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바다거북 산란을 보기 위해 오는 사람들에게 받는 소정의 협력금에서 나오는 수입뿐이다.

지난해 이 해안을 찾은 탐방객은 650명 정도. 1인당 1,500엔을 내는 만큼 3달 동안 수입이 97만 5천 만엔, 우리 돈 1,000만 원 정도가 된다. 결국, 매일 밤 고생하는 주민들에 오는 수입은 한 달 300만 원이 좀 넘는 정도지만 바다와 거북과 사람이 함께 살기에는 충분한 돈이 됐다. 그렇게 과거 해수욕객들을 맞던 평범한 바닷가 마을은 어미 거북의 감동을 전하는 에코 관광지로 변신해 갔다.


활동 초기 수입이 줄어든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등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결국은 거북을 살리고 환경을 보호하는 길이 모두가 함께 사는 길임에 공감하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나카타 해안 바다거북 보호 협의회'를 중심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바다거북의 열성 팬이 됐다.

숲을 지키는 원령 공주, 그리고 바다를 지킨 거북 왕자도 멋진 야쿠시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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