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의 麗水漫漫] '美力創考'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나름 화가 2018. 7. 25.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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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른 일'은 쉽게 정당화할 수 있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평생 남아
주변 만류에도 여수 남쪽 섬에 작업실 공사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나름 화가


그때 나는 매일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다. 독어 원서를 꼼짝 않고 100페이지도 넘게 읽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그날 읽은 내용을 떠올려보니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30년 전 독일 유학 시절 이야기다. 세미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내용을 토론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용감하게 발표도 했다. 그러나 내 발표 후 토론 수업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누구도 내 독어 발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감해진 담당 교수는 3시간 해야 할 세미나를 30분 만에 끝냈다.

어린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도서관 옆 호숫가에서 꾸역꾸역 혼자 까먹었다. 친구가 거의 없었던 고교 시절, 소풍 가서 혼자 까먹던 어머니의 도시락보다 더 서글펐다. 그러다 엉엉 울었다. 도대체 이 유학이 가능한 건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한참을 꺽꺽거린 후, 눈물을 닦으며 그래도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10년이 지난 후, 난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서글프다. 혼자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난 유학 초기 도시락을 까먹으며 내린 그 결정만큼이나 고독한 결정을 했다. 몇 달 전 충동적으로 구입한 여수 남쪽 섬의 미역 창고를 내 작업실로 개조하기로 한 것이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려야 하는 작업실 이름을 폼 나게 지었다. '美力創考(미역창고)'!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 죽인다! 미역을 담가두었던 수조는 내 서재로 하고, 그 나머지 공간은 화실로 하는 설계도까지 폼 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공사를 실제 시작하려니 사방에서 난리다.

죄다 반대다. 여수도 남쪽 끝인데, 여수에서 배 타고 또 한 시간 내려가야 하는 남쪽 바다 끝의 그 섬에 작업실을 마련하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거다. 공사비가 육지에 비해 몇 배나 들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하루 세 번 배가 들어오는 그 섬에서의 외로움은 도대체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는 협박이 가장 찔끔했다.

‘미역창고’. /그림=김정운


믿었던 떠돌이 사진작가 윤광준도 카톡으로 심히 우려한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불편한 교통은 물론이고, 바닷가에 바로 붙어 있어 습도가 높아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거였다. 그 많은 책이 다 썩을 거라는 협박도 했다. 친구 정주도 섬에 한번 와보더니 그대로 반대다. 경치는 아주 좋지만,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 함부로 돈을 투자하는 거 절대 아니라며 한참을 훈계했다. 이제까지 아무 소리 없던 아내까지 이제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보였다. 아버지만 조금 다르게 반응하셨다. '쿠바에 가면 헤밍웨이의 서재가 바닷가에 있다'고만 하셨다. 그냥 헤밍웨이 이야기만 반복하셨다. 섬에 작업실만 마련하면 아들이 헤밍웨이급 작가가 될 거라고 믿으며 당신의 불안을 정당화하시는 듯했다.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섬의 내 작업실 공사는 보름 전 시작되었다. 내 고독한 결정의 기준은 분명했다. '교환가치(Tauschwert)'가 아니라 '사용가치(Gebrauchswert)'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망했지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구분한 경제학자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여전히 유효하고 탁월하다. 각 개인의 구체적 필요에 의해 생산된 물건이 '화폐'라는 '교환가치'에 의해 평가되면서 자본주의의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마르크스는 진단한다. 이른바 '사용가치'라는 '질적 가치'와 '교환가치'라는 '양적 가치' 사이의 모순이다. '교환가치'는 내 구체적 필요와는 상관없는, 지극히 추상적 기준일 뿐이다. 한국 사회의 온갖 모순은 무엇보다도 주택이 '사는 곳(사용가치)'이 아니라 '사는 것(교환가치)'이 되면서부터라고 나는 생각한다. 50대 후반의 나이가 되도록 난 한 번도 내 구체적 '사용가치'로 결정한 공간을 갖지 못했다. 이 나이에도 내 '사용가치'가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하고, 추상적 '교환가치'에 여전히 마음이 흔들린다면 인생을 아주 잘못 산 거다.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섬 작업실 공사의 경제학적 근거는 이렇게 간단히 정리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는 걱정에 대해서는 심리학적으로 더욱 간단히 정리했다. 후회는 '한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action)'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regret of inaction)'로 구분해야 한다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심리학과의 닐 로스(Neal J Roese) 교수는 주장한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 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이 섬의 미역 창고에 작업실을 짓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할 것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섬에 작업실이 완공되어 습기와 파도, 바람 때문에 아무리 괴롭고 문제가 많이 생겨도 난 내가 한 행동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섬에서 왜 행복한가의 이유를 끊임없이 찾아낼 것이다.

아, 외로움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나름 해법이 있다. 하루에 세 번, 배가 들어올 때마다 내 엄청 예쁜 강아지, 셰틀랜드시프도그를 앞세워 항구를 배회하면 된다. 누군가는 반드시 '어머 강아지다! 너무 예뻐요. 무슨 개예요?' 하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개가 예쁘다고 '개 주인 남자'에게 선뜻 말 걸어오는 '남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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