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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과학

외계인이 깔끔하게 지구를 접수하는 방법

박상준 기자
입력 : 
2018-07-23 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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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디스내처'의 최근 각색판인 '인베이젼' /사진=워너브라더스
[박상준의 사이언스&퓨처-15] 늘 보던 이웃 사람이 어느 날부터 이상하다. 표정이며 말투, 몸짓 등이 평소 익숙하던 모습과 아주 다르다. 성격이 변한 정도가 아니라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다. 분명히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가족이 변했다. 집집마다 아내가, 남편이, 또는 아이들이 또 그렇게 완전히 딴사람이 되었다. 변한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동아리를 이루고는 아직 변하지 않은 이들을 압박한다. '어서 잠들어라.' 잭 피니의 장편소설 '바디스내처'(1955)는 위와 같이 사람들이 변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잠자는 사이에 딴사람이 된다. 처음엔 단지 몇 명에게만 일어난 일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결국엔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변하고 만다. 공포에 휩싸여 도망 다니던 주인공은 마침내 외계에서 온 미지의 존재가 인간들을 차근차근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잠을 안 자고 버티기는 어차피 한계가 뻔하다.

이 소설은 1956년, 1978년, 1993년, 그리고 2007년 등 이제까지 네 번이나 영화화되었을 만큼 SF문학사에서 명작으로 꼽힌다. 게다가 영화화된 작품들도 모두 평균 이상이다. 특히 1956년판은 세계 SF영화사에서 10대 걸작 중 하나로 심심찮게 선정될 만큼 뛰어나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하고 '인베이젼'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던 2007년판이 범작이란 평을 들을 정도이다. 소설 역시 지난 40여 년간 한국어판이 최소한 4종 이상 출간된 바 있다.

피 한 방울 튀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정말 무섭다. 주변 사람들이 차례차례 변해버리고 마침내 혼자 남았을 때 느끼는 실존적 차원의 공포는 인간 심리의 한 극한을 경험하게 한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겉모습만 그대로이고 실상은 인간이 아닌 그 무엇이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과연 나 혼자 그런 세상에서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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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과 지구인이 대등하게 전쟁을 한다는 '인디펜던스 데이'는 개연성이 낮은 설정이다 /사진=20세기폭스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는 이야기라면 흔히 '인디펜던스 데이'(1996)나 '우주전쟁'(2005), '월드 인베이젼'(2011) 같은 영화를 떠올리기 쉽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외계인을 상대로 지구 군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설정은 개연성이 별로 높지 않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인류보다 뛰어난 문명을 지닌 외계인이 지구를 차지하려 한다면 과연 물리적 전쟁이라는 지저분한 방법을 택할까? 지구의 환경과 자원은 그대로 보전한 채 인류만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선호하지 않을까?

'바디스내처'는 그렇듯 깨끗한 방법으로 외계인이 지구를 접수하는 이야기들 중에 고전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나라의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재조명되고 주목받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 '체체파리의 비법'이다. 원래 1977년에 처음 발표된 이 이야기는 최근 새 한국어판이 나오면서 여성 혐오와 젠더 평등이라는 쟁점과 맞물려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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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라는 이슈를 SF적으로 형상화한 '체체파리의 비법' /사진=아작
어느 날부터 남성들이 여성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을 넘어 잔혹하게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남성들에게만 번지는 일종의 정신적 바이러스 때문인데, 친지나 가족 사이에도 예외 없이 끔찍하게 진행되지만 언론과 통신 등 사회관계망을 장악하고 있는 남성들에 의해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남성들은 자신의 행위를 종교적, 이념적 확신에 따른 사명으로 인식해서 전혀 죄책감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결국 살아남은 소수의 여성들은 남자로 위장하고 숨어사는 등의 방법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데, 그중의 하나였던 주인공은 사태의 충격적인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그 모든 비극은 사실 외계인이 지구 인류를 말살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체체파리라는 해충을 박멸하기 위해 암컷들만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쓰듯, 외계인도 지구를 접수하기 전에 방해가 되는 인류를 제거하기 위해 인간 남성들의 정신에 간단한 조작을 가한 것이다. 여성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면 인류라는 생물학적 종은 불임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장르의 고전 반열에 오른 '바디스내처'나 권위 있는 SF문학상(미국SF작가협회에서 수여하는 네뷸러상)을 받은 '체체파리의 비법'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설정 아이디어 못지않게 문학적 은유로서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기 때문이다. '바디스내처'는 이념이나 종교를 포함한 어떤 가치관이나 철학이 인간들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해체되거나 재구성되는 상황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SF 레토릭이다. '체체파리의 비법' 역시 자연과 과학의 원리가 인간 문화에 어떤 식으로 수용되고 표현될 수 있는지를 극단적인 설정의 스토리텔링으로 잘 형상화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과학적 상상력과 문학적 상상력은 사실 그 뿌리나 성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외계 존재에 대한 상상은 과학적 가능성 못지않게 인류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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