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정치' 왕국 일본, 각료 절반이 물려받은 정치인

서승욱 입력 2018. 7. 23. 01:00 수정 2018. 7. 23.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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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특혜 없애겠다" 자민당 개혁안 또 실패
닛케이 "지역서 유착 심해,세습이 절대 유리"
"일본인들,원래 경쟁 보다 세습 선호"분석도

일본의 정기국회가 마무리된 지난 20일 기자회견에서 "9월 총재 경선에선 평화헌법 개헌이 초점이 될 것"이라며 출마 의지를 드러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아베 총리의 자민당 총재 3연임을 저지하기 위해 경선 출마를 저울질중인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간사장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조회장. ‘일본 정치의 아이돌’로 불리는 고이즈미 신지로(小泉 進次郎) 의원과 일본 정치 사상 첫 여성 총리 후보중 한 명인 오부치 유코(小渕優子) 의원. 돌출 발언이 끊이지 않지만 총리 후보로까지 거론되는 ‘괴짜 외상’ 고노 다로(河野太郎). 한국에는 구악 정치의 상징처럼 각인돼 있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겸 재무상….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자민당 의원과 그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쿄 교도=연합뉴스]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들을 한 데 묶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유력 정치인이었던 할아버지나 아버지 등을 둔 세습 정치인이다.
고노 다로 일본 외상. 고노 담화를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의 아들이다. [중앙포토]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 [중앙포토]

전직 총리(아소)와 현직 총리(아베), 아베 이후를 바라보는 유력한 차기 후보들(이시바,기시다), 또 그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차차기 후보들(고노,고이즈미, 오부치)까지 모두를 묶는 화두는 바로 ‘세습’이다.
그래서 일본 정치, 그중에서도 특히 할아버지-아들-손자가 대를 잇는 자민당식의 정치인 충원 방식을 놓고 ‘세습왕국 일본’(22일자 니혼게이자이 신문 칼럼)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이 나온다.
일본의 대표적인 세습 정치인 두 사람. 아베 신조 총리(오른쪽)는 외조부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이고, 아버지는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이다. 아소 다로 부총리겸 재무상은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가 외조부다. [로이터=연합뉴스]

2017년 10월 치러진 중의원 선거, 이중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자민당 의원 218명 가운데 세습의원은 72명으로 전체의 33%를 차지했다. 최근 자민당이 배출한 총리들도 대부분 세습 정치인들이다. 현 총리인 아베 신조 외에 아소 다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등이다. 또 현재 아베 내각 대신(장관)들의 절반이 세습 의원이다. 세습 정치인 없이는 도무지 굴러가지 않는 나라인 셈이다.
1998년 일본을 국빈 방문한 김대중 (金大中) 전 대통령이 당시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기자회견을 했다.[중앙포토]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딸 오부치 게이조 의원 [중앙포토]
전체 의원중 세습 의원 비중이 5% 정도에 불과하고, 이들 대부분이 친족의 지역구가 아닌 다른 지역구에서 출마하는 영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완전 딴판이다.

일본이 '세습 정치 왕국'으로 불린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다시 화제가 되는 이유는 세습정치를 제한하려는 자민당의 개혁 시도가 또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치 세습을 놓곤 “아들을 비서로 채용해 지역구를 넘겨주는 정치 수법은 정해진 가문에서만 계속 다이묘가 배출되는 에도시대의 번(藩)과 다를 게 없다”,“세습 정치 때문에 인재들이 정치권에 들어오는 기회가 좁아졌다"는 비판이 이어져 왔다.

아베 총리의 자민당 총재 3연임 저지를 위해 총재 경선에 나설 것이 유력한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 그의 부친은 돗토리현 지사와 자치 대신을 지낸 정치인이다. [중앙포토]
그래서 각 정당이 세습 제한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고, 제한 조치를 만드는 시늉도 했지만 “ ‘지방(地盤ㆍ후원회 조직)’ ‘간방(看板ㆍ지명도)’ ‘가방(선거자금)’ 등 ‘3방’을 그대로 이어받는 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일본 정치판에서 세습정치의 기득권 앞에 모두 흐지부지됐다.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의 부친은 중의원 선거에 5회 당선된 정치인이다.[중앙포토]

이번에 추진된 자민당 개혁안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6월말 자민당 정치제도개혁실행본부는 ‘폐쇄적이고 불공정한 정당이 아닌 열린 정당 자민당’을 표방하며 정치세습 개선 방안을 만들었다. “친족에게 지역구를 넘겨주는 현직 의원은 임기 만료 2년 전까지는 은퇴 의사를 의무적으로 표명해야 한다”는 규정이 대표적이다. 아버지가 임기 만료 직전에 갑자기 정계 은퇴 의사를 표명하고 "다른 사람이 후원회와 조직을 이어받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아들이 자리를 넘겨받는 수법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달 중순 완성된 최종 제안서엔 이 표현이 빠졌다. “2년 전에 은퇴를 표명해야 한다”는 의무화 조항 대신 “공모를 앞두고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표현으로 대체됐다. 또 당초 원안에 있던 “세습으로 출마하는 후보는 첫 선거에서 지역구와 비례 대표 선거에 중복해 출마할 수 없다”는 조항도 완성된 제안서에는 빠졌다. 두꺼운 세습 기득권의 벽을 이번에도 넘지 못한 셈이다.

사실 세습제도에 메스를 대려 했던 자민당 정치제도개혁실행본부의 시오자키 야스히사(塩崎恭久)본부장(전 관방장관)부터가 아버지에게서 지역구를 물려받은 세습의원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개혁 작업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렇다면 왜 선진국들 가운데 유독 일본에서 세습정치가 유별난 걸까.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은 22일 “후원 조직 등을 통해 지역구 의원이 오랜 시간에 걸쳐 해당 지역의 토착 정ㆍ재계 인사들과 뿌리 깊은 관계를 맺고, 이들과 사활적인 이해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세습 정치인이 아닌 신참 정치인이 이런 벽을 뚫고 정계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은 환경이라는 것이다.

일본이 세습정치에 관대한 이유를 일본인들의 성향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원래부터 일본인들은 세습을 좋아했다”고 밝힌 혼고 가즈토(本郷和人) 도쿄대 교수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일본엔 과거제도 등이 없어 계층간 신분 이동의 기회가 주변국보다 적었고, 치열한 경쟁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는 지위에 의한 세습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토양이 마련돼 있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닛케이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했던 건 우수한 인재를 폭넓게 등용할 필요를 느껴 하급 무사들이 개혁의 선봉에 설 기회를 부여한 탁월한 리더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새로운 시대의 도전에 맞서려면 자민당이 세습 정치의 틀을 깰 각오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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