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 페미니즘, 고립하면 고립된다

이하늬 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시위를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지난해 11월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시위를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낙태죄 폐지 운동, 해시태그 성폭력 운동,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1960~70년대 미국 여성주의자들과 매우 닮아 있다.” 2015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페미니즘에 대한 한우리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운영위원의 평가다. ‘급진주의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 1960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일컫는 단어다.

미국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1968년부터다. 1968년 9월 7일, 뉴저지주 애틀랜틱시티에서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가 열렸다. 미스 아메리카로 선발된 주디스 앤포드가 고별인사를 하는 순간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더 이상의 미스 아메리카는 없다”는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손에는 ‘여성해방’(Women’s Liberation)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었다. 대회를 생중계하던 방송사는 카메라를 껐다.

더 큰 주목을 받은 건 대회장 밖이었다. 대회장 밖 시위대는 사람 크기 널빤지로 만든 미스 아메리카 인형에 족쇄를 채운 채 행진했다. 한쪽에는 미스 아메리카 왕관을 쓴 살아있는 양이 보였다. 시위는 ‘자유의 쓰레기통’ 퍼포먼스로 극에 달았다. 이들은 <플레이보이> 같은 잡지는 물론이고 브래지어와 거들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리고 이들은 여성 기자의 인터뷰에만 응했다.

이전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
당시만 해도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이전 세대인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비판하면서도 공존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부장제 자체가 아니라 법·제도적 차원에서 남성과의 평등을 목표로 활동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대부분이 백인 중상류층 기혼여성 중심이라는 점도 문제 삼았다.

1969년 1월,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닉슨 대통령 취임식 반대 집회에서 여성 활동가가 여성 차별을 주제로 연설을 시작하자 일부 남성들이 “때려치워라” “저 년 끌어내” “강간당하고 싶으냐” 등의 욕설과 막말을 쏟아낸 것이다. 이 사건은 여성 활동가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함께 취임식 반대 집회에 참가했으나 여성은 여전히 주변부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궤적과 교훈’을 쓴 전주현 노동자연대 활동가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 기존 운동의 취약성에서 비롯됐다”며 “운동권 남성들에 대한 적대감은 ‘남성은 여성 차별의 원인’이라는 분리주의 정치의 근간이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 이후 급진주의 페미니즘 그룹들은 점차 분리주의 노선을 걷는다. 셀 16은 금욕주의, 여성공동체, 가라데를 강령으로 삼았다. 그룹 페미니스트들은 회원 중 기혼여성이나 남자와 동거하는 여성 비율을 3분의 1로 제한하는 상한성 규정을 만들었다가 1971년에는 기혼여성을 추방하기로 했다.

분리주의 노선의 정점은 ‘급진 레즈비어니즘’의 탄생으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반 일부 레즈비언들은 “레즈비언이야 말로 남성과의 관계를 단절한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논리를 폈다.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이성애’라는 근본적인 구조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성애자 여성들이 운동을 떠났다. 이후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문화 페미니즘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됐다.

‘급진 레즈비어니즘’의 탄생
광장에서의 차별 경험과 이후의 분리주의 노선은 현재 한국 상황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다. 2016년 5월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거리로 나온 페미니스트들은 자연스럽게 2017년 촛불정국에 참가했다. 하지만 당시의 경험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오히려 간극을 보여줬다. 광장에 나온 이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대우하기보다는 어린 여성으로 대상화하는 발언이 나왔고, 원치 않는 신체접촉까지 종종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숙명여대에는 ‘내가 집회에 가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었다. “남자들이 변기에 최순실 사진을 붙이고 거기에 오줌을 싸고, 시위 포스트잇과 남자들 자유발언에 ‘외로우면 결혼을 하세요. 누나’ ‘근혜 언냐’ ‘무슨 년’… 여혐이 만개했다고 한다. (중략) 시위 나온 여자들 몰카를 찍어서 못생긴 시위녀, 예쁜 시위녀로 나누어 품평을 했다고 한다.”

이후 광장에는 ‘페미존’이 만들어졌다. 집회에 참가하기로 한 페미니스트들이 안전공간을 만든 것이다. 김보명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은 “페미존은 민주주의 광장에서조차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경계를 그려야 하는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면서 진보와 저항의 정치학에서 여성들의 자리가 어디인지 질문하게 했다”고 말했다.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이룬 성과는 적지 않다. 특히 낙태권 운동이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임신중절 수술이 불법이던 1969년 뉴욕에서 ‘낙태 공개발언’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는 미국 전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970년 7월 뉴욕주는 낙태금지법을 완화했고 3년 뒤 미국 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Roe v. Wade) 사건에서 낙태 금지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이 역시 최근 한국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겹친다. 2016년은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낙태죄 폐지 요구가 전면적으로 등장한 해로 평가된다. ‘영영페미니스트’(영영페미)들은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절 시술 불법화’를 선언하자 ‘검은시위’로 맞섰다. 검은시위에서는 “나의 자궁은 나의 것” “우리는 인큐베이터가 아니다” “태어난 사람이나 신경써라” 등의 구호가 울려퍼졌다. 낙태죄 폐지운동을 위한 청와대 청원에는 23만명이 참여했다.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대두되고 사라진 지 40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올해 초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여성의 행진’(Women’s March)에서 미국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행사에서는 여성의 권리뿐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증진, 이민자 정책개혁, 인종차별 등의 문제를 제기하며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라는 메시지를 내세웠다. 여기에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없었다.

미국에서 사회심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학생은 “백래시(backlash, 사회·정치적 변화로 영향력이나 권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반격하는 현상) 때문에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사그라졌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죽은 이론 취급을 받는다”면서 “지금 미국 페미니즘 운동은 동일노동·동일임금, 여성권 강화, 성적 주체권 운동이 대세다”라고 상황을 전했다.

미국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무비판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분석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전주현 활동가는 “특정 형태의 차별을 겪는 사람만이 그 차별을 알 수 있다거나 그 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보는 정치는 운동을 분열시킬 수밖에 없다.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맥락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보명 객원연구원은 “여성들의 저항 공동체에서 퀴어, 트랜스, 장애인, 이주민 등의 소수자 집단이 배제되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하고 분석되어야 할지, 그리고 광장으로 나와 목소리를 내지만 여전히 얼굴을 갖지 못하는 여성들은 어떤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재부상한 페미니즘이 정착할 자리는 어디일지 등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

한우리 <페미니즘 선언>, 손희정 <페미니즘 리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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