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커버스토리-두 항공재벌 '영욕의 반세기']대한항공, '월남전 재벌'이 쓴 항공신화..오너일가 잇따른 갑질에 곤두박질

송윤경 기자 2018. 7.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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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4년 3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가운데)이 서울 공항동 대한항공 격납고에서 열린 창사 45주년 기념식에서 아들 조원태 부사장(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조현아 부사장(다섯번째), 조현민 전무(여섯번째) 등과 함께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항공·아시아나, 두 항공재벌 ‘영욕의 반세기’ 창업주 경영철학 온데간데없이 자본권력 향유하고 형제간 싸움 황제경영 폐해, 한국현대사 민낯 한진그룹의 대한항공과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아시아나항공. 두 항공재벌의 역사는 해방 이후 한국사와 맞물린다. 트럭 몇 대로 운송 사업을 시작한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은 미군의 믿음을 얻어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따냈다. 군부독재 정권에 협력해 대가를 얻어내거나 베트남 파견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조중훈의 사업수완만큼은 뛰어났다. 해방 후 광주에서 자동차 두 대로 택시 사업을 시작한 금호아시아나 창업주 박인천은 ‘시간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버스’인 광주여객을 세웠다. 그는 정권에 줄을 대기보다는 직원들과 동고동락했다. 지금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은 창업주의 철학과는 먼 곳에 가 있다. 총수 일가의 갑질, 밀수, 조세포탈, 배임, 경영상 판단착오, 성추행…. 두 기업의 직원들은 광화문광장과 청와대 앞에서 총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조직력 강한 노동조합이 아닌 일반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결성해 거리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여객운송 사업의 특징상 독점지위를 누리게 돼 황제경영을 강화시켰다”(이한구 수원대 교수)는 지적도 나오고, “항공업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직원들의 서비스 품질을 향상시킨다는 미명 아래 잘못된 관행이 만들어졌을 가능성”(김진방 인하대 교수)을 짚는 목소리도 있다. 아버지 세대가 ‘자본권력’을 일군 과정과, 이 권력을 향유하고 서로 더 갖겠다고 싸우면서 노동자들은 뒷전에 두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다. 김 교수는 “이번 사건들이 재벌 총수의 지배력 남용을 짚고 넘어가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진 창업주 조중훈 “미군 신뢰 얻자”…탁월한 수완으로 월남전 군수물자 수송 따내 박정희 정권 때 KAL 인수 놓고 “부실 이미지 뒤의 정치성 짙은 민영화” 신문 기사도 유언 조작설 돌아 형제간 치열한 법정싸움…‘한진중, 출장 때 대한항공 이용 금지’ 소문 땅콩 회항·물컵 벼락·상습 욕설…끝 모를 구설에 각종 비리까지 봇물, 앞날 예측불가

‘한진’은 ‘한민족의 전진’을 뜻한다. 광복 이후 조중훈이 창업한 작은 운송회사 한진은 오늘날 국적 항공사를 거느린 굴지의 대기업이 됐다.

지난 3개월간 나온 한진 관련 뉴스는 기업의 이름값을 하지 못한다. 창업주 일가는 이성을 잃은 채 물컵을 내던졌고, 글로 옮기기 힘든 욕설을 내뱉었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겁박했다. 밀수·탈세 의혹도 이어졌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저항을 상징하는 ‘벤데타’ 가면을 쓴 채 광화문에 모여 “이게 회사냐”라고 외쳤다. 단체 카카오톡방에 2000여명이 참여해 오너 일가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국력신장사업” 한진은 어쩌다 이리 됐을까.

■ 혜성처럼 등장한 ‘월남재벌’

한국전쟁 직후 인천항만엔 미국발 화물선에서 전후 복구물자가 끊임없이 내려왔다. 조중훈은 인천 선창가를 거닐며 이 장면을 지켜보다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것을 붙잡았다”라고 자신의 자서전 <사업은 예술이다>에서 회고했다. 그가 구상한 것은 인천항에 들어오는 물자를 서울로 실어나르는 운송업이었다.

‘달러박스 위에 앉았다’. 언론은 1950~1960년대의 한진 조중훈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승만의 집권,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쿠데타까지 해방 후 한국 사회는 격변을 거듭했다. 이 시기에 삼성 이병철, 현대 정주영, 락희(LG) 구인회 등 지금의 거대그룹 창업주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재벌 1세들은 주로 이승만의 ‘결재’로 일제의 적산을 거저 얻다시피 불하받아 사업토대를 마련했다.

조중훈은 조금 달랐다. 그는 주한미군의 신뢰를 얻는 데 주력했다. 조중훈은 1984년 3월10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나의 30대’에서 “1955년 말 한진과 비슷한 수준의 운수업체가 약 50개였는데 누구나 벌이가 잘되는 미군납 용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미군은 한국업자를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고 회고했다. 인천에서 각종 군수물자를 실은 한국인의 트럭이 서울에 닿을 때쯤이면 귀신이라도 다녀간 듯 반쯤 없어지기가 일쑤였다. 조중훈은 인천 부둣가에서 밤새 미군 물자를 지켜주거나, 한때 공업사를 차렸던 실력을 발휘해 미군 트럭을 고쳐주며 미군들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손해는 반드시 배상하겠다’고 몇 번이고 미군들을 설득했다. 결국 1956년 주한 미8군으로부터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따냈다. 미군의 겨울 전투복 1200벌을 싣고 가던 트럭운전사가 남대문시장에 들러 팔아버리자, 한진 직원들이 엿새간 정신없이 다 찾아내 미군에게 돌려주고 손해액까지 지불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 뒤 그는 주한미군 수뇌부로부터 ‘미스터 CHO’로 불렸다고 한다. 미군 장교 부인들의 생일까지 챙겨 자신의 고급주택 ‘부암장’에서 생일파티도 열어주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2001년 국내 출간한 <한국현대사>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이승만 정부와 미8군의 젖줄을 차지하는 경쟁에서 역대의 승리자는 나중에 대한항공까지 거느리게 된 한진 사장인 조중훈이었다.”

한진 초창기 조중훈은 때로 막무가내였다. 1961년 5월10일자 동아일보엔 ‘엉뚱한 사람 합석’이란 기사가 실렸다. 한국의 교통부 장관과 일본 외무성의 아세아 국장은 이날 민간항로 개설에 대해 협상을 했다. 그 자리에 웬 사업가가 합석했다는 내용이다. 조중훈이었다. 당시 교통부 장관은 “항공과 직원인 줄 알았다”, 장관 비서관은 “외무부 수행원으로 착각했다”고 했다.

7년 뒤엔 한진상사가 미군부대 시설을 파괴한 사건도 있었다. 1968년 4월29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중훈은 미군 제1군단 산하 미군부대에 식수를 공급해 월 9000달러씩 벌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부대가 자체 급수시설을 만들어 물을 사 마실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자 한진상사는 미군부대 안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 이모씨를 시켜 미군의 급수시설을 망치로 부수고, 나무토막을 박고, 쇠톱으로 자르게 했다. 한진은 이씨를 ‘월남(베트남) 파견’ 조건으로 유혹했다.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간 사람은 당시 언론의 표현대로 ‘하수인’이었던 이씨뿐이었다.

‘월남 파견’ 조건에 선뜻 미군시설을 부쉈던 한 노동자의 사례에서 보듯, 당시 조중훈 하면 ‘월남전쟁’이었다. 그는 미군에게 신뢰를 쌓은 점을 십분 활용해 펜타곤을 설득해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따냈다. 이전에도 조중훈은 갑부로 이름을 날렸으나 베트남 전쟁 이후 한진은 명실상부한 ‘재벌’로 발돋움하게 된다.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윤충로 지음)에 따르면 당시 한진의 군수물자 수송작업에 파견된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의 ‘한국식’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소총과 실탄을 곁에 두고 트럭을 운전하는 등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1971년 노동자 200여명은 미지급된 임금을 요구하며 서소문의 한진(KAL)빌딩을 점거하고 불을 질렀다. 그중 13명이 징역을 살았다. 조중훈은 당시 기자회견을 열어 “브로커의 선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며 노임을 많이 줬다”고 항변했다.

1968년 조중훈 한진상사 대표가 베트남 군수물자 수송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조중훈 자서전 <사업은 예술이다>

■ 권부와 밀착…“국토부가 무슨 정부냐”

“내가 PP(박정희 대통령)의 부탁으로 일본 다나카 수상을 만나 김대중 사건을 해결했다.”

한국의 종합일간지와 문화방송의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했던 재미 언론인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는 일본에서 1973년 조중훈이 ‘떠벌린 무용담’을 전해들은 대목이 있다. 문명자는 4년간의 추적 끝에 조중훈이 다나카 총리에게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자금 3억엔을 건넨 사실을 확인했다.

조중훈은 ‘박정희의 뜻’에 따라 한 일들을 자주 언급했다. 적자였던 대한항공(KAL)을 인수한 것도 그중 하나다. 그의 동생 조중건의 자서전 <창공에 꿈을 싣고>에 따르면, 조중건은 형인 조중훈을 말렸으나, 조중훈은 대통령의 뜻을 어떻게 꺾느냐며 인수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항공 인수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대한항공에 빚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경영이 정상화되고 있었다. 오히려 ‘부실’ 이미지 때문에 한진은 대한항공을 싸게 샀다. 1968년 11월21일자 동아일보엔 ‘정치성 짙은 KAL 민영화’라는 기사가 실렸다. 1969년 2월11일자 매일경제는 “한진이 인수자금을 7~10년에 나누어 내기로 했기 때문에 1억5000만원(10년 분할)으로 총자산 30억원의 항공사를 손에 넣는 행운을 얻게 됐다”고 평가했다.

조중훈은 박정희가 대통령 간접선출을 위해 만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대통령 선거인 후보에 출마해 “방미 때 모셔보니 10여일간의 강행군에도 전 대통령은 피로를 모르는 사나이였다”면서 전두환 지지를 호소했다.

조중훈은 권력자의 친구·친족이 되기로 했다. 장남 조양호는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딸 이명희와 결혼했다. 셋째 아들 조수호는 롯데 신격호 회장의 조카 최은영과 혼인했다. 장녀 조현숙은 법무법인 ‘광장’의 설립자였던 판사 출신 이태희와 결혼했다. 막내아들 조정호는 LG 구인회 회장의 손녀이자 구자학의 딸이며 이병철의 외손녀이기도 한 구명진과 결혼했다.

한진은 관료는 물론 장관 출신들까지 영입했다. 1959년 교통부 장관을 지냈던 김일환을 한진 산하의 한진관광, 정석기업 사장으로 맞았다. 1992년부터 약 1년간 교통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지냈던 노건일은 5년여 뒤 한진그룹 산하의 인하대학교 총장이 된다. 이후 대한항공·한진의 위세는 국토부 내에서 막강해졌다. 대한항공을 거쳐 국토부에 들어간 관료들도 많았다. 국토부 관계자에 따르면, 2005년 건설교통부와 대한항공 사이에 이스탄불 노선권 갈등이 불거졌을 당시 장관 앞에서 조양호가 서류를 찢어버릴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2015년 땅콩회항 사태 때 대한항공의 상무가 박창진 사무장에게 거짓진술을 강요하며 “국토부가 무슨 정부기관이냐, 다 우리 사람”이라고 말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 피보다 진한 ‘돈’

2002년 가을은 지지율 2%에서 시작한 ‘꼴찌 노무현의 반란’에 한국 사회가 들썩이던 때였다. 바야흐로 3김 시대는 저물고 있었다.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은 그해 11월 인하대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롯데그룹 신격호를 제외하면, 마지막 남은 재계 1세대였다.

한진그룹 회장직은 조양호가 승계했다. 그룹 측이 조중훈 회장이 유명을 달리한 당일 “고인의 유지에 따른 것”이라면서 그렇게 밝혔다. 다만 유산상속 문제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조중훈에겐 딸 하나, 아들 넷이 있었다. 조현숙·양호·남호·수호·정호다. 장례 후 가족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양호가 아버지의 유언을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그룹 계열사는 조양호→ 대한항공, 조남호→ 한진중공업, 조수호→ 한진해운, 조정호→ 메리츠금융으로 짜여져 있었는데 그대로 최종 배분됐다. 재산은 대부분 한진그룹의 학교법인과 대한항공에 돌아갔다. 죽기 전 상당기간 혼수상태였던 조중훈은 어떻게 유언을 남겼을까. 조양호 측은 아버지가 잠시 의식을 찾아 직원들에게 유언을 적게 했다고 설명했다. 일부는 의구심을 품었으나 일단 덮었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유언 조작설이 돌았다. 한진의 형제다툼은 2005년 둘째 아들 조남호가 조양호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넷째 조정호가 둘째 조남호와, 셋째 조수호가 장남 조양호와 한배를 탔다. 당시만 해도 한진해운은 그룹의 주력기업이었다. 장남만큼은 아니지만 셋째 아들도 알짜를 상속받았다는 얘기다. 훗날 법원은 유언장 감정에까지 나서게 되는데 결론은 공개되지 않았다. 소송전은 2008년 즈음 유야무야 막을 내렸다.

첫째·셋째, 둘째·넷째로 나누어진 아들들은 아버지 제사를 한 번도 같이 지낸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을 전후해 대한항공은 한진중공업에 맡겼던 로스앤젤레스 기내식공장 계약을 파기했고, 한진해운은 메리츠와의 보험계약을 해지했다. 한진중공업이 직원들에게 출장 때 대한항공을 이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형제다툼이 끝나고 10년이 흘렀다. 이들은 서로 다퉜던 ‘유산’ 때문에 최근 차례로 검찰조사를 받았다. 조양호의 딸 조현민, 부인 이명희씨의 갑질이 세상에 드러난 후 조양호 일가의 갖은 불법 행태 신고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검찰은 특히 조중훈의 해외부동산·예금을 조양호 등 아들들이 상속받는 과정에서 상속세를 탈루한 혐의를 파고들고 있다.

지난 5월4일 오전 운전기사와 경비원 등에게 상습적으로 폭언·폭행을 했다는 의혹을 받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씨가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노동자에게 갑질은 똑같았다

남남이 된 조양호 형제들이지만 직원을 대하는 태도는 똑같이 잔인했다. 지금은 조양호 일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지만, 조남호도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다. 2011년 한진중공업은 구조조정으로 정규직·비정규직 3000여명을 해고했다. 해고자 중에선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다. 10년간 4277억원의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잔업·휴일근무를 마다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대량해고 후 주주들에겐 174억원의 배당금을 풀었다. 한진중공업은 경영위기 근거로 ‘수주실적 0’을 제시했으나 그 책임은 수주담당 상무인 조남호의 아들 조원국에게 있었다. 하지만 조원국은 당시에도 억대의 연봉을 챙겼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진숙의 300일을 넘긴 크레인 고공농성, 희망버스를 탄 시민들의 응원 끝에 조남호는 국회에 나오게 됐다. 반성의 기미는 없었다. 희망버스를 향해서는 “불법 시위와 집회로 압력을 가하는 외부세력”이라고 했다.

‘셋째 아들네’도 물의를 빚었다. 형제 싸움에서 조양호와 함께했던 한진해운의 조수호는 2006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부인 최은영이 한진해운 회장에 올랐다. 그러나 경영능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운업계 세계 8위에 빛나던 회사에 빚이 쌓여갔다. 그런 7년여 동안 최은영은 수십억원대의 임금을 챙겼다. 경영을 다시 조양호에게 넘긴 그는 2016년 한진해운이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를 신청하기 직전 자신과 두 딸의 보유주식을 모두 팔아버렸다. 나중에 국회 청문회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사재도 출연했다. 그러나 1·2심에서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최은영은 지금 ‘아주버니’ 조양호의 뉴스를 감옥에서 접하고 있을 것이다.

2018년 4월, 조양호의 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 광고대행 업체와 회의를 하다가 물컵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현민은 <지니의 콩닥콩닥 세계여행> 시리즈 등 여행관련 동화책을 여러권 냈고, “늘 새로운 광고와 마케팅 캠페인을 선보이며 감각과 기획력을 인정받았다”고 소개돼 왔다. 그러나 물컵 투척으로 커튼 뒤의 그가 어떤 모습인지가 드러났다.

한진은 ‘갑질 일가’라는 오명을 얻었다. 조현아의 땅콩회항, 조원태의 70대 노인 폭행·폭언 사건, 이명희의 상습적인 욕설 등이 도마에 올랐다. 사건 후 3개월이 지난 지금 사건은 개인 인성의 문제를 넘어섰다. 해외언론에서도 ‘nut rage’ 등의 단어를 쓰며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밀수 등 각종 불법 행태에 대한 대한항공 직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검찰은 조양호의 배임, 조세포탈 등의 혐의에 대해 전방위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인천 부둣가에서 트럭 몇 대로 시작해 운송업의 신화를 써 내려간 한진의 앞날은 지금 ‘예측불가’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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