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매일 오후 2시 출동.. 쪽방촌 불볕더위 꺼드립니다
어르신들 "숨이 턱턱 막힐 시간에 물 뿌려주면 1~2시간은 숨통트여"
19일 낮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골목에 서자 찜질방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이날 최고기온은 34도, 체감온도는 37도까지 올랐다.
돈의동 쪽방촌엔 3.3㎡(1평) 크기의 '쪽방' 737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골목은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만큼 좁았다.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6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아온 김옥순(89)씨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문밖과 시계를 번갈아 쳐다봤다. 오후 2시 골목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김씨가 집을 나섰다. 김씨가 환한 웃음으로 반긴 사람은 종로소방서 종로119안전센터 소방관 5명이었다.
소방관들이 골목에 물을 뿌리기 시작하자 김씨가 요구르트 5개를 건넸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김씨가 생활비를 아껴 사놓은 간식이다. 김씨는 "선풍기를 틀어도 더운 바람만 나오는데 골목에 물을 뿌리면 한두 시간은 숨쉬기 편하다"고 말했다.
소방관들이 끄는 긴 호스가 좁은 골목길을 지나갈 때마다 쪽방촌 주민들이 하나둘 문 앞에 나왔다. 주로 노인들이었다. 소방관들에게 거수경례하는 사람, 뒤에서 호스를 잡아 끌어주는 사람, 다가가 얼굴에 부채를 부쳐주는 사람도 있었다.
소방관들은 이날 30분에 걸쳐 돈의동 쪽방 골목에 물을 뿌렸다. 주민 김용수(73)씨는 "구슬땀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호스 옮길 때라도 힘을 보태주려 한다"고 했다. 물을 뿌린 골목엔 청량한 기운이 올라왔다.
서울소방재난본부는 2016년부터 쪽방촌을 방문해 물을 뿌리고 있다. 공식 지침에 따르면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면 하루 1회, 폭염경보가 내리면 하루 2회 살수(撒水) 작업을 하면 된다. 하지만 종로 소방관들은 규정에 상관없이 이달 초부터 매일 쪽방촌을 찾고 있다. 살수 도중 화재나 구조 신고가 들어와 호스를 놓고 급하게 출동하는 경우도 있다. 출동을 마치면 보통은 소방서에서 대기하며 휴식하지만 이들은 다시 쪽방촌으로 돌아와 물을 뿌린다. 이날 살수 작업을 마친 소방관들은 화재 진압을 한 것처럼 땀을 비 오듯 흘렸다. 김상균 종로119안전센터장은 "우리를 기다리는 쪽방촌 주민들이 있다는 생각에 하루도 방문을 거를 수 없다"고 했다. 장경환 '돈의동 쪽방 상담소' 소장은 "소방관들이 날마다 물을 뿌려준 덕에 악취가 나는 골목이 깨끗해지는 효과도 생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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