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그레이>에서 오트웨이 역을 맡은 리암 니슨

영화 <더 그레이>에서 오트웨이 역을 맡은 리암 니슨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사회에서 생존 대 자연에서 생존. 어디가 더 힘들까. 가정을 덧붙여보자. 사회의 경우, 고등학생인 A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물려받을 재산은커녕 학원은 꿈도 못 꾼다. 고군분투하여 간신히 중위권 성적을 유지하여 대학에 가는 데에는 성공한 A. 그러나 학자금 대출과 함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교 끝나면 곧장 아르바이트 행이다. 그 결과, 학기가 지날수록 학점은 낮아져만 간다. 드디어 졸업이다. 돈을 벌어 빚도 갚고, 미래를 위해 돈도 모아야 한다. 그런데 스펙도 없고, 학점도 낮아서 취직도 안 된다. 그러다 어찌하여 연봉 2000만 원정도 주는 회사에 취직했다. 취업만 하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제 시작이었다.

자연에서는 어떨까. 이를 실감나게 그린 영화가 있다. 영화 <더 그레이>의 오트웨이(리암 니슨)는 한 회사의 작업자들을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경호원이다. 어느 날, 그는 작업자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가려 한다. 그러나 전복 사고로 어느 설원에 떨어졌다. 그와 몇몇 일행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그런 그들을 늑대가 맞이한다.

그는 직업에 걸맞게 생존 지식과 경험을 풀어 놓으며 일행들을 이끌지만, 한 명씩 죽어간다. 늑대가 잡아먹고, 자연이 집어삼킨다. 하지만 늑대와 자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을 공격한다.

생과 사의 기로에 놓인 인간이란

 영화 <더 그레이>속 한 장면

영화 <더 그레이>속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자연과 사회, 어느 곳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을까? 대다수는 사회를 선택하리라 싶다. 나도 그렇다. 문제는 천신만고 끝에 자연에서 생환해도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연은 살아남긴 힘들지만, 구조되거나 도망치기만 하면 생존이다. 사회는 아니다. 일상은 계속되고, 고난은 끝이 없다. 살기 위해 삶의 쳇바퀴에 올라탄 채로 죽을 때까지 죽어라 달려야 한다. 그렇게 해도 생존하리란 보장도 없다. 역경을 마주한 인간의 특징들이 있다. 그 중 두 가지가 영화에 나온다. 강한 척과 종교다.

영화 <더 그레이>의 일행 중 한명은 동료가 죽어나가고, 주변에선 늑대가 노려보고 있는데도 두렵지 않다고, 덤벼보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진심은 아니다. 숨길 뿐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늑대의 모습에 한껏 위축되어 고해성사를 한다. 사실 무섭다고. 사회에서도 그런 류의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성표현이 아닌 오로지 타인에게 겁을 주기 위해 온몸에 그려진 문신을 드러낸 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서 몇 안 되는 자신의 장점을 과시하는 사람 등등. 모두 두려움을 위장하기 위해 하는 행동일 경우가 많다. 애써 휘둘러봐도 잘 베이지 않는 무딘 칼날이다.

종교는 어떨까. 신앙심은 믿는 사람에게 큰 힘을 준다. 의지할 곳 없는 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돼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끼리 협력하게 하는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모름지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 아닌가. 이 같은 측면에서 종교는 좋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위기에 처했을 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에서처럼 신이 된 브루스가 귀찮아서 모든 기도에 Yes를 누르지 않는 한 말이다. 영화 <더 그레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트웨이는 일행이 죽자 하늘에 대고 거친 욕설과 함께 외친다. 구경만 말고, 어떻게 좀 해달라고. 하지만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으세,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으세

 영화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영화 <더 그레이> 속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위기를 대하는 오트웨이의 태도는 이렇다. 역경의 끝에서 신을 불러보지만, 아무 대답이 없어 절망한다. 그는 혼자 힘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야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나마 그를 돕는 존재는 마음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사별한 아내와 아버지의 시 뿐이다. 두려움을 인정하는 단계였던 그는 아내와 아버지의 잔상을 버팀목 삼아 두려움에 맞선다.

영화 <더 그레이는> 단순한 생존 영화가 아니다. 주인공과 인물들이 스타일리시하게 적에게 맞서는 이야기도 아니다.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자연 앞에선 인간의 황량한 상황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그리하여 늑대가 득실대는 설원 한가운데 서있는 그들을 보며 우리가 살고있는 험난한 사회를 연상시킨다. 생존이 걸린 두려움 앞에 선 인간에 대한 고찰이 담긴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오트웨이 아버지의 시를 소개하겠다.

"한번 더 싸워 보세. 마지막으로 폼나게 싸워보세.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으세,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으세."


자연 사회 종교 영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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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를 꿈꾸는 일반인 / go99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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