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위험 전가의 사회학

2018. 7. 18.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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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브랜드 침대에서 라돈 방사능이 검출되자, 사람들은 침대 매트리스를 우체국을 통해 수거한 다음 충남 당진항의 고철야적장으로 옮겨놓았다.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 있는 경주로 보낼 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 당진일까?

당진은 라돈 방사능 침대가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위험이 누적된 지역이다.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알려진 석탄화력발전소는 1999년에 당진에 세워진 이래 현재까지 10개가 운행 중이다. 인근 주민들은 발전소가 생긴 이후부터 암환자가 급증했다고 주장한다. 송전탑도 위험요인이다. 당진시에는 전국 최대 규모인 526개의 송전탑이 설치되어 있고, 여기에 추가로 100여개의 고압송전탑을 설치하려고 하고 있다. 신당진변전소 주변지역에는 모두 42명의 암환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국전력은 인과관계를 밝히라고 하지만 주민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런데 왜 한전이 아닌 피해자가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하나? 또한 새로 설치하는 송전탑에는 평택시로 공급하는 송전선로가 포함돼 있는데, 평택은 지중화로 매설하고 당진은 지상으로 설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왜 당진만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당진 사례처럼 위험이 공간적으로 전가되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위험의 사회적 전가도 있다. 유해화학물질 관리, 공장식 축산농가의 가축분뇨 처리, 원전의 방사능물질 관리 등 위험한 업무를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직원, 외국인 노동자들이 담당하도록 하는 ‘위험의 외주화’다. 2016년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 사고 이후 이 개념이 널리 알려졌지만, 위험의 사회적 전가는 그 전에도 있었다. 2013년 보도를 보면 국내 핵발전소 하청 노동자의 피폭량이 한국수력원자력 정규직 노동자보다 최대 18.9배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 초 20대 청년이 외주 도금업체에서 근무한 지 한 달 만에 ‘시안화수소’라는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사망했다. 여수의 화학공장에서는 비정규직노동자가 맨홀 뚜껑을 열던 중 내부에 남아있던 잔압에 의해 가슴에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

무책임하게 혹은 고의로 위험을 은폐함으로써 전국민에게 위험을 전가하기도 한다. 지난 6월 27일 ‘원자력발전소 안전관리실태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고리 4호기 원자로 격납건물의 방사능 유출방지용 철판의 실제 두께가 허용 두께에 미달한 곳이 측정 대상의 45%였다. 문제는 이 지점들이 이미 한국수력원자력의 두께 검사를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기관이 책임을 방기하고 위험을 은폐함으로써 국민에게 위험을 전가했다는 의미다.

위험의 전가는 당장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전략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평등·불공정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누적시켜 결국 시스템 전체의 붕괴라는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위험은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을 나누어 지면서 함께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원들이 위험의 원인을 찾아내 제거하고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나가면서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위험에 대한 민주적이고 성숙한 대응방식이다.

<이상헌 녹색전환연구소장·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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