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우리는 일 부부" 단속 피하려 염전노예와 거짓 혼인

허경구 기자 2018. 7. 1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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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60대 염전주에 징역 1년6개월
양정민씨가 13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공원에서 국민일보와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신원보호를 위해 뒷모습만 촬영했다. 지적장애 3급인 양씨는 염전에서 일할 당시와 거짓 혼인신고를 당한 일을 자세히 기억하진 못했지만 “돈을 되돌려 받고 싶다”고 말했다. 최현규 기자

지적장애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단속을 피하기 위해 거짓 혼인신고까지 했던 60대 여성 염전주인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2014년 ‘염전노예’ 사건으로 문제가 됐던 전남 신안군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적장애 3급인 양정민(가명·62)씨는 2009년쯤부터 신안에서 염전 일을 했다. 부산 직업소개소를 통해 전남 진도의 양식장에서 일하다 해남 염전으로 옮겼고, 같이 일하던 염전 노동자의 소개로 신안에 왔다. 1년이 지나지 않아 일하던 염전 주인이 사망했다. 인근에서 염전을 운영하던 A씨(62·여)가 양씨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우리 집에 와서 염전 일을 도와주면 급여를 줄게요.” 생계가 막막했던 양씨는 A씨 염전에서 일하기로 했다. 양씨는 이를 2010년 6월쯤으로 기억했다.

양씨는 A씨 염전에서 중노동을 했다. 염전에 바닷물을 들이는 일부터 염전에서 소금을 거두고 포장하고 옮기는 일까지 전부 양씨가 떠맡았다. 13일 서울에서 만난 양씨는 “해가 긴 여름철엔 오전 5시부터 일을 시작해 저녁 8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2013년 A씨 남편이 사망한 이후에는 일의 강도가 세졌다. 그러나 A씨는 약속했던 급여를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루 한 끼 끼니만 챙겨줬다.

2014년 신안군에서 염전노예 사건이 터졌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경찰 등이 대대적으로 피해자 구조에 나섰다. 당시 300명이 넘는 염전노예가 추가로 발견됐지만, 양씨는 구조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경찰은 2015년 A씨가 양씨에게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경찰 조사를 받게 된 A씨는 “밀린 임금을 주겠다”며 양씨를 설득했다. 갈 곳이 없었던 양씨는 경찰에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그는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결국 A씨는 횡령 혐의만 적용 받아 벌금 300만원형을 받았고, 양씨는 계속 A씨 염전에서 일했다.

A씨는 2015년 10월 16일 양씨와 혼인신고를 했다. 법원 판결문과 경찰 조사에 따르면, A씨는 남편 병원비 등 빚이 많아 급여를 지급할 능력이 되지 않았고, 염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양씨의 노동력이 필요했다. A씨는 ‘일 부부’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양씨에게 혼인 신고를 하자고 설득했다. A씨는 “우린 일적으로 부부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혼인신고를 해야 한다. 이곳에 있으려면 ‘일 부부’가 돼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일 부부’가 무슨 말인지 몰랐던 양씨는 A씨가 하자는 대로 동의했다. A씨는 혼인신고서를 면사무소에 제출했고 둘은 서류상 부부가 됐다. 이후 경찰이나 관계기관이 염전노예 단속을 몇 차례 더 진행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염전주와 노동자가 아닌 부부 사이였기 때문에 단속을 피할 수 있었다.

경찰이 이상한 낌새를 발견한 것은 지난해 9월이었다. 전남경찰청 광역수사대와 여성청소년수사과는 신안군 등 도서 지역 일대에 대한 합동점검을 벌이다 ‘염전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염전주인과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부부 관계인 두 사람을 무작정 수사할 수 없었던 경찰은 A씨와 양씨의 주거 환경을 살폈다.

양씨는 A씨 집과 조금 떨어진 5㎡(약 1.5평) 남짓한 방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 보일러 등 온열기구도 없었고 창문 창호지도 다 찢어진 상태였다. 경찰은 양씨를 별도로 면담했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양씨는 제대로 먹지 못해 비쩍 말라 있었고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며 “면담을 해보니 한 번도 A씨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은 적이 없었고 잠자리도 따로 하는 등 정상적인 부부로 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양씨를 긴급 구조조치한 뒤 수사를 진행했고, A씨는 거짓 혼인신고를 해 수천만원에 달하는 임금을 미지급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실제 부부 사이라고 주장했으나, 이후 혐의를 인정했다고 한다.

광주지법 목포지원은 지난 5월 준사기, 근로기준법 위반 등의 혐의로 A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죄질이 가볍지 않고 피고인이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점, 피해자에 대한 횡령죄로 벌금형을 받은 전과가 있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A씨가 2015년 6월 임금 116만원을 포함해 2017년 9월 27일까지 양씨에게 3532만원에 달하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양씨는 형사 재판에서 승소한 뒤 7년간 못 받았던 돈을 되찾기 위한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지적장애 탓에 당시 일을 자세히 기억하진 못했지만 “돈을 되돌려 받고 싶다”고 말했다.

염전노예 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났지만 올해에만 경북 농가와 서울 잠실야구장, 충남 농가와 축사 등에서 현대판 노예 피해자가 계속 발견되고 있다(국민일보 2월 5일, 3월 12일, 4월 2일자 1면 참조).

전남장애인권익옹호기관 박수인 팀장은 15일 “가해자가 염전 노예를 ‘가족’으로 둔갑시켜 법망을 피해가려던 사건”이라며 “우리 주변에 감춰져 있는 피해자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좀 더 예민한 인권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 김강원 팀장은 “정부가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 뒤 현대판 노예 사건이 마무리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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