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가문의 ‘황태자’들과는 달랐던···총수로 선택된 구광모의 과제

송진식 기자
5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발인식에서 구광모 LG전자 당시 상무가 고인의 마지막길을 배웅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5월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고(故) 구본무 LG 회장의 발인식에서 구광모 LG전자 당시 상무가 고인의 마지막길을 배웅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얼핏보면 여느 재벌 3세(혹은 4세)들과 같은 ‘온실 속 화초’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재벌가 자녀 중에서는 ‘야인’에 가깝다. 그 만큼 드라마틱하게 거대 기업의 총수 자리에 오른 이도 찾아보기 어렵다. 6월 29일 LG그룹의 지주회사인 ㈜LG의 임시이사회에서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출된 구광모 대표(40) 얘기다.

구 대표의 회장 선임은 재계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고 구본무 전 회장 사망 직후 구 대표의 사내이사 선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지만 나이와 당시 직함(상무) 등을 감안할 때 최대 부회장 정도의 직위를 예상한 시각이 많았다. 재계에서 구 대표의 총수 직행을 놓고 “LG가문의 철저한 장자승계 원칙이 작용한 결정”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시민단체 등은 이를 두고 “전근대적인 발상”이라고 지적한다. 구 대표는 그룹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가장 보수적인 결정을 통해 총수가 된 구 대표가 조직에 변화와 혁신을 가져와야 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다. 이 와중에 본인의 승계과정에 대한 비판에 직면해 있고, 향후 친인척간 지분 정리나 계열분리 문제와도 맞닥뜨려야 한다. 구 대표는 이 세 가지 숙제를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총수로 ‘선택된’ 남자
구 대표를 두고 야인이라고 표현한다면 동의하지 않는 시각이 더 많을 것이다. 어쨌든 재벌가문의 ‘금수저’로 태어나 해외에서 유학을 하고 일찍이 26살의 나이에 그룹의 후계자로 내정돼 착실하게 경영수업을 받아온 그다. 하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 날 때부터 ‘황태자’로 시작한 다른 재벌가의 후계자와 비교해보면 분명 다른 점들이 눈에 띈다.

구 대표의 삶을 이해하려면 불가피하게 과거 두 사람의 안타까운 ‘죽음’과 마주해야 한다. 첫 번째는 1994년 구 전 회장의 외아들인 구원모씨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일이다. 구 대표에겐 사촌형인 원모씨가 사망하면서 LG가문에 비상이 걸렸다. 3대에 걸쳐 철저하게 지켜온 장자승계 원칙이 무너질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구 전 회장이 아들을 갖지 못하면서 구 대표는 2004년 큰아버지인 구 전 회장의 양자로 입적됐다. 한순간에 자산 123조원에 연매출 160조원, 재계 4위인 거대 그룹 LG의 황태자가 된 것이다. 양자 입적 역시 철저하게 장자승계 원칙으로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구 대표의 친부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구씨 일가의 둘째이며, 구 대표는 4세 구씨 일가 남자 중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구 대표의 양자 입적 사실이 알려진 건 2004년 12월이다. 구 대표가 미국 유학 중에 학교를 잠시 쉬고 국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있을 때다. 하지만 그룹의 지주회사인 ㈜LG의 과거 지분 변동 현황을 보면 구 대표의 양자 입적이 확정된 건 적어도 2004년 초로 추정된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을 보면 구 대표는 2004년 2월 27일 ㈜LG의 주식 70만주를 장내 매집해 지분율을 종전 0.27%에서 0.55%로 두 배 늘린다. 이때를 기점으로 구 대표는 꾸준히 ㈜LG의 지분을 매입하거나 친인척으로부터 증여받는다.

양자로 입적되기 전까지 구 대표는 다른 재벌 후계자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다른 재벌가 후계자들은 통상 국내 유명 대학을 졸업한 뒤 해외 유수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따는 코스를 판박이처럼 밟았다. 하지만 1978년 1월생인 구 대표는 재수를 거쳐 1997년 수능에서 한양대에 합격했지만, 입학하는 대신 미국 뉴욕주에 있는 로체스터 공과대학으로 곧장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생 시절 구 대표의 ‘신분’을 굳이 꼽자면 아버지 구본능 회장이 운영하는 희성그룹의 후계자 신분이었다. 희성그룹의 주력이 희성전자임을 감안하면 구 대표가 공대를 택한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국에서 중위권 사립대학인 로체스터 공대는 뉴욕시에서 차로 5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교외에 있는 학교다. 재계에는 구 대표가 유학시절 ‘금수저’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 친구들로부터 “LG 대리점 사장 아들 아니냐”는 농담을 듣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열애 끝에 2009년 결혼한 아내 정효정씨도 로체스터 유학시절에 만났다.

1996년 친모인 강영혜씨가 사망한 일도 구 대표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모친이 사망하던 해는 구 대표가 첫 수능을 치르던 해였다. 충격으로 수능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구 대표는 재수를 택했고, 이는 훗날 유학길에 오르게 된 단초가 됐다.

20대 중반까지 구 대표의 삶은 온갖 세간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고, 일거수일투족을 관리받는 다른 재벌가 황태자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질은 몇몇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아내 효정씨와의 결혼문제만 해도 열애 당시 이미 그룹의 후계자 신분이 된 그의 결혼을 놓고 양가에서 모두 설왕설래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LG가문의 경우 재계에선 “가장 사돈으로 선호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인으로 맺어진 정·재계 인맥이 튼튼한 집안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처가쪽도 LG가문과의 결합을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지만 구 대표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다른 가문의 ‘황태자’들과는 달랐던···총수로 선택된 구광모의 과제

보수적인 가문에 혁신 가져올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미국 스탠퍼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박차고 나온 일화도 흥미롭다. 후계자로 낙점된 후 구 대표는 2006년 LG전자 재경부문에 대리로 입사해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시작한다. 이듬해 재경부문 과장직을 거친 그는 스탠퍼드로 MBA를 따기 위해 떠났다. 여타의 다른 재벌 후계자들이 걷는 정통 코스다. 하지만 구 대표는 MBA 과정을 1년 만에 접고 돌연 실리콘밸리로 향한다. 이곳에서 구 대표는 1년간 두 곳의 작은 스타트업에서 일하며 실무를 쌓았다. LG전자가 지난달 미국의 로봇 스타트업에 300만 달러를 투자하는 등 최근 스타트업에 투자를 늘리고 있는 이유도 구 대표의 이 같은 이력과 무관치 않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구 대표는 2014년엔 LG전자 가전생산라인에 있는 창원공장에 근무하면서 직원들과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6월 이사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된 이후에는 직원들에게 “회장보다는 대표라는 직함으로 불러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 집무실의 경우 선친인 구 전 회장 집무실이 있는 트윈타워 30층과 같은 층에 마련했지만 규모는 구 전 회장 집무실의 절반 크기다. 구 대표는 기존 구 전 회장 집무실에 대해서는 “추모공간으로 당분간 보존해달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구 대표가 양자로 입적되고 그룹의 새 총수가 되기까지 과정에는 분명 ‘가문의 결정’이 크게 작용했다. 이에 비해 황태자로 태어나지 않은 구 대표의 기질과 이력은 보수적인 가풍과는 묘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재계에서는 구 대표가 이끄는 LG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과감한 투자나 모험적인 사업 확장에 나설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LG그룹은 6명의 부회장이 각 사업부문을 총괄하며 안정된 성과를 유지하고 있다”며 “구 대표는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신사업 발굴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구 대표는 회장으로 선임된 직후 “안정 속에 LG의 경영가치를 잇는 동시에 변화가 필요한 곳은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선친인 구 전 회장이 남기고 간 ㈜LG의 지분은 11.06%다. 현재 ㈜LG의 지분 6.12%를 보유 중인 구 대표가 선친의 지분을 모두 증여받는다고 가정할 경우 17.18%의 지분을 갖게 된다. 구 대표를 포함한 범LG가문이 보유 중인 ㈜LG의 지분율이 46%가 넘는 점을 감안할 때 친족간의 경영권 다툼이 일지 않는 한 구 대표의 경영권을 위협할 존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승계과정 비판·계열분리 과제로 남아
구 대표는 선친의 지분을 승계받으며 많게는 1조원 가까운 세금을 납부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당하게 증여세를 내고 지분을 받는 만큼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란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 대표의 총수 승계과정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채이배 바른미래당 의원은 구 대표가 사내이사로 내정되자마자 “구 대표의 ㈜LG 지분 확보과정에 문제가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채 의원은 “구 대표의 경우 친부의 회사인 희성전자 지분을 매각한 뒤 여기서 확보된 자금으로 ㈜LG 지분을 사들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 과정에서 LG그룹은 희성전자에 일감을 몰아줘 회사 가치를 키워줬다”고 지적했다. 재벌들의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가장 비판받는 것 중 하나가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 승계자금을 마련하는 문제다. 구 대표의 사례도 이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실제 구 대표의 ㈜LG 지분율을 보면 2003년 말 0.27%였던 것이 양자로 입적된 2004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한다. 2004년 말에는 2.75%로 지분율이 높아졌고, 2007년 말에는 4.45%까지 확대된다. 이 기간 중 구 대표는 희성전자의 지분 23%가량을 전량 매각했는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희성전자의 매출이 급격히 확대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희성전자의 공시자료를 보면 2003년 한 해 4631억원이었던 연매출(연결기준)은 2004년 7725억원으로 급증했고, 2007년 말에는 1조8820억원까지 늘어난다. 구 대표가 희성전자 지분을 매각하던 시기 동안 매출이 4배가량 증가한 셈이다. 희성전자의 경우 비상장기업이라 장외주가를 정확하게 추정하긴 어렵다. 다만 주가 산정에 영향을 주는 주당순이익(EPS)을 보면 2003년 4만9537원에서 2005년엔 24만원까지 급등했다. 2015년 LG상사가 판토스를 인수할 때 구 대표가 7.72%의 지분을 사들인 점도 뒷말이 나오고 있다. 판토스의 내부거래 비중이 70%에 달하는 점을 고려할 때 일감 몰아주기 문제에서 구 대표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구 대표의 판토스 지분은 향후 증여세 납부나 ㈜LG 지분 확보 등을 위한 잠재적인 재원으로 꼽힌다.

구본준 부회장의 퇴진에 따른 계열분리 이슈도 구 대표가 당면한 과제다. 구 부회장은 3월 기준 ㈜LG의 지분 7.72%를 보유한 2대 주주다. 구 부회장이 지분을 정리하는 대신 이에 상응하는 그룹 내 사업부문을 가지고 독립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이 때문에 구 부회장의 지분이 가진 가치(1조원 상당)와 유사한 규모를 가진 그룹 내 여러 계열사들이 분리 대상 사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다. 구 부회장의 지분과 구본능 희성그룹의 ‘빅딜설’, 구 대표의 판토스 지분과의 맞교환설 등 증권가에서는 온갖 예측이 난무한다. 구 대표가 계열분리 과정을 원활하게 지휘하지 못할 경우 리더십이나 그룹의 실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향후 LG그룹 계열분리 과정에서 ㈜LG를 인위적으로 분할하거나, 계열회사 지분을 매각·정리하는 과정에서 주주와 시장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최근 현대차그룹 등의 인위적인 지배구조 개편작업이 주주와 시장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된 사례를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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