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에게 말해라.."지금 저를 따라오신 건가요?"

이재덕 기자 2018. 7. 1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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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성범죄 수사 베테랑’ 여성경찰이 말하는 대처법

이회림 경사가 지난 9일 경향신문 스튜디오에서 본지 기자를 상대로 위급상황에 대처하는 ‘낭심차기’ 시범을 보이고 있다.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 수사관으로서의 업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실명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8년 전 서울의 한 클럽에서 강간 사건이 발생했다. 30대 남성 두 명이 화장실에 가려던 20대 여성을 뒤따라가 손목을 낚아채 끌고 갔다. 한 남성이 망을 보는 사이, 다른 남성이 여성을 성폭행했다.

피해여성이 비명을 질렀지만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경찰 조사결과 피해자는 이 여성뿐만이 아니었다. 가해자들은 종종 클럽을 찾아 성폭행할 대상을 물색했다. 여의치 않으면 여성들의 휴대전화나 지갑을 훔치는 등 범행을 저질렀다.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이회림 경사(39·필명)는 가해자가 범행 대상을 점찍은 뒤 상황에 따라 범행을 포기하는 심리에 주목했다. 이 경사는 “범행 대상이 된 여성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가해자의 행동 패턴들이 다 달랐다”며 “피해자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가해자를 쳐다보거나, ‘지금 나를 따라오는 거냐’고 묻기만 해도 가해자가 범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반면 음침한 골목길에서 여성이 앞만 보고 걷거나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면 주변 상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범행 대상이 되기 쉽다고 했다.

경향신문이 최근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이란 책을 쓴 13년차 여성 경찰인 이 경사를 지난 9일 만났다. 그는 지구대 순찰요원, 형사과 성범죄 수사전담요원, 원스톱인권센터 피해자 지킴이, 광역수사대 지능범죄수사팀 형사 등을 거치며 여성 대상 범죄 사건들을 수없이 맡았다.

이 경사는 자신을 여섯살 무렵 초등학교 운동장 화장실에서 한 성인 남성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이자, 당시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는 생존자라고 소개했다. 경찰이 된 것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신과 같은 피해 여성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호신술을 하지 못해도 가해자의 심리를 이용해서, 혹은 물어뜯거나 낭심을 차는 단순한 행동만으로도 어느 정도 범죄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다. 이 경사는 상당수 여성들이 그런 용기를 내기 쉽지 않다고 했다.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쓴 13년차 여성 경찰 이회림 경사(필명)가 지난 9일 경향신문에서 자신의 책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정지윤 기자

골목길, 앞만 보고 걷거나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면 오히려 범행 대상 되기 쉬워 만약 잡혔다면 ‘용기’ 내서 힘껏 물어뜯기라도 해야 터질 수밖에 없던 혜화 시위 구호가 감정적이고 거칠지만 시위 자체를 부정해선 안돼 남성 중심의 조직인 ‘경찰’ 피해자 이해하려고 노력 중

그가 일했던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사건이 많았다. 인근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있음에도 피해를 입은 이들이 다수였다. 피해자들은 “나무토막이 된 것처럼 어떤 반항도 할 수 없었다” “얼어붙었다”고 입을 모았다. 되레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거나 횡설수설하는 피해자도 많았다.

남성 중심 조직인 경찰에서 처음에는 이 같은 피해자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이 경사는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에서겠지만 ‘왜 아무런 대응을 못했냐’고 말하는 남자 경찰들도 소수지만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여성들이 공포심에 얼어붙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며 “나 역시 그랬고, 지금도 시계를 거꾸로 돌려 때리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도 든다. 피해를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용서하는 데도 오랜 기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는 “물론 경찰도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런 경찰의 논리가 핑계로 여겨질 수 있다”며 “동료들도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 부분이 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도 성범죄 전담수사팀, 피해자 보호팀 등이 신설되는 등 경찰도 젠더감수성을 높여나가고 있다”면서 “분명 점차 나아지고 있으니 조금만 더 믿고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이 경사는 최근 ‘불법촬영 범죄를 제대로 수사하라’며 여성 수만명이 모인 혜화역 시위에 대해 “여성들의 분노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여성들이 숨어서만 피해 사실에 대해 얘기하다가 이제서야 ‘힘들다’ ‘아프다’ ‘불안하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라며 “반드시 공론화해야 했고 터질 수밖에 없는 시위”라고 말했다.

이 경사는 “최근 혜화역 시위에서 나온 구호가 감정적이고 거칠다는 비판이 있지만, 시위의 취지를 퇴색시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이제까지 (경비업무 차원에서) 많은 시위 현장에 나가봤는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모든 시위에서 빠짐없이 도를 넘는 구호들이 나오곤 했다”면서 “혜화역 시위에서 등장한 ‘문재인 재기해’란 구호는 나도 고 성재기 대표의 유족 등에게 너무 고통스러운 표현이고 당사자가 원할 경우 법적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혜화역 시위 자체를 부정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번은 있어야 하는 진통이고 우리 사회의 성장통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여성이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되, 시스템이 완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지킬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 경사는 “여성은 원래 강하다. 1 대 1 상황에서도 여성 안에 숨어 있는 투지를 끌어내면 범죄자들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며 “범죄로부터 지키기 위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강한 여전사를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들이 어릴 때는 힘도 세고 모험심도 강했지만 점점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는 주입식 교육을 받는다. 그런 사회적 강요들이 여성이 가진 투지와 강인함을 숨기도록 하고 용기를 내지 못하도록 작용한 것은 아닌가 우리 사회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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