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보는 역사학자 "안타깝다"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2018. 7. 11.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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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구한말 의병운동사 권위자 오영섭 교수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 설정.."고증이 면밀했다면"
태동과 고난의 길.."실패 알면서, 의병은 그런 것"
항일독립군으로 이어진 의병.."현재적 가치 여전"
(사진=tvN 제공)
'저물어 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義兵)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400억원을 훌쩍 넘긴 제작비로 한국 드라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미스터 션샤인'의 포스터 문구다. 철저한 기획 아래 유명 작가·감독·배우들을 한데 모은 이 드라마가 다루려는 주제는 구한말 의병. 당대 의병운동은 일제강점기 항일독립군으로 변화 발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구한말 의병운동을 깊이 연구해 온 역사학자인 연세대 오영섭 연구교수도 '미스터 션샤인'을 보고 있다. 그는 10일 CBS노컷뉴스에 "영상미는 물론 세트장, 엑스트라 동원 등에도 엄청난 돈이 들었겠더라. 배우 이병헌씨의 극중 집무실 하나만 봐도 대단하다"며 말을 이었다.

"그 집무실 하나에 놓인 고풍스런 물품들을 조달하는 데만도 꽤 많은 돈과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좋았다. 눈에 안 보이는 수집 활동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다만 스토리 면에서 역사학자들의 고증을 보다 면밀하게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참 안타깝다."

오 교수가 '미스터 션샤인' 1, 2회에서 짚어낸 몇 가지 고증 문제는 아래와 같다.

"1회에서 도자기 굽는 곳으로 피신한 이병헌씨 아역이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국인을 따라 미국으로 넘어가잖나. 그게 신미양요(1871년) 때인데, 이 시점에는 미국인들이 조선 땅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미국인이 한국 땅에 들어온 것은 1885년이다. 당시 일본 도자기가 서양으로 팔려 나갔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러한 설정을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그는 "2회에서도 배우 김태리씨가 의병으로부터 총 쏘는 법을 배우는데, 손에 쥔 총이 연발총이었다"며 "이 총은 당시 일본군이 지녔던 것으로, 의병에게는 그러한 연발총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태리씨가 미국인 암살에 엮이기도 한다. 이때 시점이 대략 1899년에서 1902년 사이로 보이는데, 당시에는 의병이 미국인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특히나 1900년으로 넘어가면서 반(反)서양 의식은 크게 줄어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교수는 "국민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 구한말이라는 역사적인 상황을 살던 이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벌인 노력들을 눈여겨봐 달라"고 당부했다.

"그 시기 한국은 일본에 저항하지만, 이미 근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보여주는 원초적인 근대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드라마에서 그 점을 유의해 봤으면 한다. 도시에 전차가 다니고, 사람들 복장이 바뀐다. 영어를 사용하는 조선인들이 통역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 등도 새로운 변화다. 현대 사회로 이어지는 커다란 변화의 맥락 안에서 그러한 변화가 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잘 살펴봤으면 좋겠다."

◇ 군사조직 '의병', 그 막대한 유지비는 어디서 왔을까

(사진=tvN 제공)
구한말 의병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오 교수는 "당대 의병운동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부터 시작해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으로 본격화 한다"고 설명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이 급진적인 근대화 정책을 취하자, 유림들은 이에 반발해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나 민중의 호응이 별로 없었다. 그 다음해인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뒤 의병이 일어나려는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렇게 의병운동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의병 지도부가 유림이라 하더라도 병사층은 대부분 평민이기 때문에 평민이 응하지 않으면 의병은 만들어질 수 없다"며 "의병운동을 간단히 표현하면 '항일구국'이다. 다시 말해 일본을 쫓아내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였다"고 전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국내에서 치열한 의병 활동이 이어졌다. 그런데 일본이 의병을 효과적으로 진압한다. 밀정을 앞세우기도 하고, 빈민구제 사업을 벌여 의병에 들어갈 인적 자원을 차단하고, 군사적으로는 강력한 탄압 작전을 전개한다. 그렇게 의병운동이 종식돼 갔고, 더이상 한반도에서 의병활동을 벌일 수 없게 되자 해외로 망명한다. 독립군은 그렇게 태동한 것이다."

오 교수는 "현재 의병운동 연구는 일반 민중에 의한 의병운동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병 지도부를 꾸린 유림층과 병사를 구성한 평민층이 연합했다는 것"이라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에는 고종(1852~1919)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대신들이 있었다. 이 대신들은 다들 지방에 자기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각자 근거지에 수많은 마름, 소작인들이 있었기에 쉽게 전력화·무력화할 기반을 지녔다. 고종이 위에서부터 내려보내는 항일구국 움직임, 일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항일의지가 맞물리면서 의병이 일어났다고 본다."

그는 "그런데 현재 연구는 이러한 고종의 역할은 싹 빼고 의병운동을 이야기한다"며 "교과서 역시 의병운동을 철저하게 일반 민중에 의한 자발적인 항일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병은 군사집단이다. 총, 총알 등 무장을 갖추고 밥을 먹이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 엄청난 돈을 재야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련할 수는 없었다. 고종을 비롯해 그 측근 대신들과 연결된 지방 부호들이 그 돈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박경리 소설 '토지'에 이러한 이야기가 잘 묘사돼 있다. 결국 의병은 중앙에 포진한 고종과 그 측근의 구국의지가 재야에 있는 유림·농민 등 민중의 항일의지와 합쳐지면서 일어났다고 봐야 한다."

◇ "인간 존재 가치 실현에 목숨 바친 사람들…역사는 흐른다"

(사진=tvN 제공)
대한제국의 몰락은 의병운동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오 교수는 고종에 대해 "근대적인 마인드를 지닌 개혁군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국운동에는 열심이었다"며 "고종은 국가와 자기 안위를 일치시킨 군권론자였다. 국가 안위를 보장하는 것이 자기 기득권을 보장하는 것과 맞물려 있으니, 고종으로서는 생명을 내걸고 항일운동을 한 측면이 있다"고 봤다.

그는 "일본이 조직적으로 탄압해 들어오자 고종과 그 측근들은 만주 등지로 넘어가 무관학교를 건립하는 등의 전략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널리 알려진 이회영(1867~1932) 집안이다. 지금 돈으로 600억원 되는 땅을 팔아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런데 이회영 집안은 고종과 밀접했다. 이회영 선생은, 물론 나중에 무정부주의로까지 사상을 발전시키지만, 구한말 때는 고종 황제를 보좌하려는 의식이 강한 근황주의자였다."

결국 "이회영 집안은 근황주의 입장에서 새로운 독립·구국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의병은 그렇게 독립군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다.

"이회영 선생은 국내에 있을 때 의병 조직에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주변에 있는 부호들에게도 '의병에게 자금을 지원하라'고 독려했다. 그렇게 하느라고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 성과가 별로 없어서 고민했다고 측근들이 써둔 기록에도 나온다. 조선의 부호·지주층이 해외로 망명하는 과정에서 들고 간 재산이 독립군을 키우는 1차적인 재원이 된 셈이다."

오 교수는 "당대 의병운동은 실패할 소지를 100% 안고 시작했던 것"이라며 "의병장 최익현(1833~1906)의 경우 '내가 패배할 것을 안다. 그렇지만 나는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니 목숨을 걸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의병은 그런 것이다. 현실적으로 패배할 것을 뻔히 알고,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안다.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 가치 있는 인간 존재로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궁극적인 가치 실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활동인 것이다."

그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적인 도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언제나 극소수"라며 "그러한 사람들의 생각과 활동은 다음 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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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jinu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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