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와 사고의 경계에 선 '백의의 천사'들] "저는 치료를 하는 걸까요, 살인을 하고 있는 걸까요?"
현재 일하는 C병원에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선배 간호사들의 태움은 덜하지만 병원 시스템이 엉망이다. 환자 수에 비해 의료진 수가 너무 적다. A씨가 일하는 병동은 50명 가까운 환자를 간호사 2명이 맡는다. 그의 일과는 환자에게 주사를 맞히며 시작된다. 지금은 그나마 업무 파악이 돼 당뇨환자에게 당 성분이 들어있는 수액이 처방되면 의사에게 보고해 바꾼다. 처음에는 처방대로만 투여했다. 당뇨환자에게 당 성분 수액을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환자가 많다 보니 1시간에 주사를 놓아야 할 환자가 30명가량이 된다. 환자 1명당 2분꼴로 작업해야 한다. 스타트(주사 바늘이 꽂혀 있는 상태)가 돼 있지 않은 환자의 경우 혈관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약물과 환자 정보를 최대한 확인하지만 주사를 잘못 놓기도 한다. 원칙대로라면 환자를 새로 만질 때마다 알코올제 등으로 손을 씻어야 하는데 그저 매뉴얼상에만 있을 뿐이다.
A씨는 “정부 지침에 따라 지정된 감염관리인은 미리 공고를 하고 형식적으로 의료진을 따라다닌다”며 “인력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내놓는 대책은 전부 무용지물”이라고 성토했다. 또 그는 “모두 자신만큼은 환자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처럼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숙련 인력 떠나며 환자 위험은 증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신규 간호사부터 베테랑 간호사, 간호대학 교수까지 “병원이 안전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실에서 벌어진 일은 어느 병원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017년 건강통계’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보건의료기관에서 활동 중인 간호사는 한국이 5.9명으로 OECD 평균(9.0명)보다 훨씬 적다. 가장 높은 스위스(18.0명)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만큼 적은 인력이 많은 환자를 담당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3월 발표한 ‘국민보건의료실태통계’만 봐도 간호 면허자의 절반이 ‘임상’(상급종합, 종합병원, 병원, 요양병원, 의원)을 떠나 있다. 이렇다 보니 ‘빅5’ 병원만 해도 매년 수백명씩 간호사를 새로 뽑는다.
숙련된 간호사가 현장을 계속 떠나고 적은 인력이 과중한 업무를 떠안으면서 의료사고도 늘고 있다. 내부자만 아는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강경화 한림대 간호학과 교수는 “중환자가 아닌데도 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 인건비 투자에 인색한 병원과 그간 ‘눈 가리고 아웅’하는 개선책만 내놓은 정부 탓이 크다.
지난해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국내 병원 재무현황에 따르면 국내 대형병원의 인건비는 전체 지출의 30∼40%로 나타났다. 서울아산병원(33.86%), 서울대병원(37.10%), 삼성서울병원(37.82%) 등이다. 의료의 공공성이 강한 영국은 인건비가 지출의 60%를 넘는다.
국내 병원들은 “정부 수가(의료가격)가 너무 낮아 그렇잖아도 적자”라며 아우성이다. 강 교수는 “최첨단 장비와 건물을 갖춰놓은 한국 의료의 이면에는 시설만 선진 시스템으로 바꿔놓고 인력에 투자하지 않는 착취 구조가 있다”며 “시설과 인력 수준이 함께 올라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형병원 근무경력 10년차인 간호사 D씨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보통 2∼3명의 환자를 돌보는데, 삽시간에 죽음이 닥칠 수 있는 환자들인 만큼 신경을 곤두세우고 일한다. 그러나 한 환자에게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다른 환자는 돌볼 새가 없다. 예컨대 여성 환자의 경우 대변 기저귀를 제때 갈아주지 않으면 요로 감염이 될 수 있음에도 기저귀를 갈아주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치기도 한다.
D씨는 “지금 당장 큰 일이 나느냐, 나중에 나느냐의 문제라는 걸 알지만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환자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를 하느라 옆 환자의 약물을 챙겨주지 못할 때도 있다. 그가 ‘치료라는 이름의 살인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는 이유다. 이처럼 구조적인 문제들이 쌓여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장면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한다.
그의 병동에는 폐와 심장 기능을 대신하는 에크모(ECMO) 장치에 의지했던 중환자가 있었다. 이 장치를 달면 직경 2㎝에 달하는 관을 통해 혈액이 빠르게 공급된다. 생명과 직결된 관이라 장치에 살을 꿰매버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관 주변에 새살이 돋으며 꿰맨 살이 분리된다. 어느 날 담당 간호사가 “실이 달랑달랑거린다”며 의사에게 재봉합을 요구했지만 처치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기계의 도관 삽입부위를 소독하던 도중 느슨해진 관이 빠져 환자가 즉사했다.
D씨는 “의료진이 덜 바쁘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가 현장에서는 비일비재하다”며 “숙련된 간호사조차 100개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200개의 업무를 주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것들이 쌓여 환자 사망사고까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문제가 발생하면 당사자가 책임을 지고 떠나는데 이 모든 사고를 정말 개인 부주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정부는 ‘눈 가리고 아웅’ 대책만
그간 정부 대책은 간호인력 부족 문제를 더 키웠다. 정부는 간호대학 신설과 증원 방식으로 면허자를 대거 양산했다. 이로 인해 간호사의 처우는 점점 열악해졌다. 대학 졸업생이 쏟아지면서 병원 내 간호사 처우 개선 목소리보다는 저연차 간호사를 소모품으로 취급하며 인력을 바꿔쓰는 문화가 횡행했다. D씨는 “이는 간호사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는다”며 “환자 역시 언제든 사고가 일어날 환경에 목숨을 맡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병원 규모별, 진료과목별 ‘간호사 1인당 적정 환자 수’조차 제시한 적 없다. 최소인력 기준이 아닌 ‘적정 인력’을 법으로 강제하는 나라가 많지는 않아도 대부분 의료기관에 권고 정도는 하고 있다.
조성현 서울대 간호학과 교수의 ‘2016년 의료법에 의거한 의료기관 종별 간호사 정원기준 충족률 추이 분석’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방관하는 사이 한국 상급종합·종합병원의 간호사 1인당 평균 환자 수는 16.3명으로 미국(5.3명)의 3배에 달했다.
정부가 그간 내놓은 대책의 주요 핵심은 ‘수가 올리기’였다. 2006년부터 간호사를 추가 고용하는 의료기관에 수가를 더 주는 ‘간호등급가산제’를 시행했는데, 현장에서는 간호사를 추가로 고용하면서 간호조무사와 환자이송요원 등 다른 직군의 인력을 줄여 간호사에게 업무를 떠넘기는 행태가 벌어졌다. 간호사는 주 52시간 단축제도에서 예외 업종으로 분류돼 장시간 근로문화를 줄이려는 사회적 변화 물결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조성현 교수는 “복지부가 지난 3월 내놓은 간호사 근무환경 및 처우개선 대책은 구체성이 떨어져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병원의 적정 인력 채용을 당국에서 관리감독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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