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함흥냉면

2018. 7. 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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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훈풍 타고 화끈한 맛 뽐낸다
회비빔냉면과 고기비빔냉면 상차림. 소고기수육, 수육간장, 무김치, 회무침이 반찬으로 놓였다 [사진/조보희 기자]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무더운 여름에 즐기는 대표 음식이 바로 냉면이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회담 만찬에서 남북 정상이 냉면을 함께 들며 화해와 평화를 다짐한 것을 계기로 냉면집을 찾는 이들의 발길은 예년보다 부쩍 늘었다. 함흥냉면은 평양냉면과 함께 북에서 내려온 냉면 음식의 쌍두마차다. 성수기인 여름철을 맞아 그 화끈하고 쫄깃한 맛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식당 앞에서 줄지어 기다리는 손님들

뜨겁게 달아오른 더위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함흥냉면으로 유명한 서울 중구 오장동 거리의 식당 입구는 평일 낮임에도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붐볐다. 입맛을 다시는 대기자들의 표정은 기대감으로 한결같이 밝게 빛났다. 식당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냉면 맛에 푹 빠진 손님들로 만원을 이룬 가운데 온통 시끌벅적하다. 종업원들은 음식을 나르고 식탁을 치우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러면서 즐거운 비명처럼 외치듯 말했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손님이 크게 늘었어요. 함흥냉면도 정상회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지요. 오늘은 날이 좀 흐려 그나마 덜한 편인데 햇볕 쨍쨍 내리쬐는 주말이면 말도 못할 만큼 바쁘답니다! 바깥의 저쪽 길모퉁이까지 줄이 이어져 식당에 들어와 식사하려면 20~30분 정도는 기다려야 하니까요!"

◇ 피란민과 함께 남하한 북녘 음식

냉면은 이름 그대로 차가운 기운을 담고 있다. 그래서 당연히 여름에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냉기로 열기를 식히는 이냉치열(以冷治熱)의 속성을 지녔겠다 싶어서다.

하지만 냉면은 본래 겨울철의 대표 음식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겨울의 시식(時食)으로 냉면을 꼽은 '동국세시기' 등의 사료를 통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차가움으로 차가운 기운을 다스리는 이냉치냉(以冷治冷)의 계절 음식이었던 것이다.

이 또한 여세추이(與世推移)런가. 냉면도 세상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변해왔다. 겨울철 북녘 음식에서 언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사계절 전국 음식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매콤·새콤·달콤한 맛의 다양성으로 남녀노소와 세대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두에게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최대 성수기는 여름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식당마다 냉면을 찾는 사람들로 크게 붐빈다. 겨울철 음식에서 사계절 음식으로 진화하되 여름철에 더욱 사랑받는 음식으로 탈바꿈한 것. 물론 냉면의 참맛을 아는 사람은 요즘도 겨울철에 냉면을 더 즐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함흥냉면은 평양냉면과 어떻게 다를까?

일반적으로 함흥냉면이 비빔냉면이고 평양냉면은 물냉면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국수의 재료에 있다. 함흥냉면이 감자나 고구마의 전분(澱粉), 즉 녹말가루로 만든 국수를 사용한다면, 평양냉면은 메밀가루로 뽑은 면발이 주된 재료다. 따라서 함흥냉면은 면발이 쫄깃한 반면에 평양냉면은 부드럽다.

전통적으로 함흥 지방에서는 감자의 녹말가루로 만든 국수에 홍어의 회를 무침으로 얹어 먹곤 했다. 녹말의 그 지방 사투리가 '농마'여서 음식의 이름 또한 '농마국수'로 불렸다.

이 농마국수가 한국전쟁 때 피란민과 함께 '남하'한다. 함경도 실향민들은 오장동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거처하며 농마국수로 망향의 한을 달랬다. '함흥냉면'은 남한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말로 '함흥식 농마국수'를 뜻했다. 그 사이에 주재료인 국수도 감자보다 고구마의 전분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회비빔냉면(위), 고기비빔냉면

◇ 국수와 회무침이 연출하는 별미

그럼 함흥냉면의 대표주자인 회비빔냉면을 들여다보자.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잘 삶아진 회색 국수 다발이 깔린다. 여기에 붉은 양념의 홍어회가 무채와 함께 얹혀지고, 그 위에는 가늘게 썬 오이와 달걀이 고명으로 놓인다. 어찌 보면 단출해 보이는 모습. 하지만 매콤 새콤한 향기가 은근히 콧속을 파고든다. 상차림 역시 매우 간단하다. 무채김치와 육수가 전부다. 물론 음식재료와 요리방법, 상차림, 가격 등은 식당마다 다소 차이가 난다.

회비빔냉면과 함께 함흥냉면의 쌍벽을 이루는 고기비빔냉면도 그 모습이 비교적 간소하다. 회색의 국수가 붉은 양념장과 함께 올려지고 얇게 썬 소고기 편육, 오이, 삶은 달걀이 고명으로 그 위에 얹혀진다. 반 토막 난 달걀은 하얗고 노란 색감으로 시선을 끈다. 맛난 무채김치와 따끈한 육수도 밥상에 놓여 있다.

"그만큼 친숙해져서 그럴까요? 함흥냉면은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넘어가요. 내 입맛에 딱 맞아! 쫄깃쫄깃한 면발에다 매콤하고 새콤하고 달콤한 맛을 취향대로 다양하게 즐길 수 있거든요. 반찬으로 무채김치 하나만 달랑 놓여 있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맛있는 냉면의 덤이다 싶어서랍니다!"

손님 성용환(83·서울) 할아버지는 "기회 될 때마다 우리 가족이 이곳 오장동에 와서 함흥냉면을 먹는다. 특히 개운한 육수가 마음에 든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동석한 아들 재혁(45) 씨도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함흥냉면으로 같이 외식을 하면서 우리 부부 역시 얼얼한 맛에 깊이 매료됐다"며 만족감을 감추지 않았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매콤한 맛이 일품인 함흥냉면도 마찬가지. 그 방법의 하나가 냉면 비비기다. 양손으로 젓가락을 하나씩 붙잡고 국수를 고루 비벼주면 면과 양념, 고명이 절묘하게 잘 섞인단다.

지난 50년 동안 한 냉면집에서 줄곧 일해왔다는 이병태(65) 주방실장은 "끈기가 있는 고구마 전분의 특성상 오래 두면 면발이 엉겨 붙기 쉽다"며 음식이 밥상에 놓이자마자 곧바로 비벼줄 것을 조언했다. 이와 함께 "국수에 앞서 계란 고명부터 먼저 먹어두면 좋다"면서 "면발도 가위로 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먹었을 때 본래 맛이 더하다"고 덧붙인다.

기호에 맞게 식초, 설탕, 겨자, 참기름, 양념장을 추가로 넣어도 좋다. 식초는 새콤함을, 설탕은 달콤함을, 겨자는 매콤함을 더해주고 참기름은 고소한 맛을 높여준다. 그만큼 식감이 좋아지는 것.

회냉면 특유의 매운맛을 부드럽게 다스려주는 일등공신은 밥상 주전자에 담긴 따끈한 육수다. 소고기와 사골을 넣고 4시간가량 끓여 만든 담백한 맛의 이 육수는 냉면을 먹기 전에 살짝 마셔두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이를테면 입가심 효과. 물론 냉면을 먹는 도중이나 다 먹고 나서 마셔도 차가워진 속이 따뜻하게 풀리고 냉면 맛도 한층 살아난다.

직장동료 3명과 함께 회냉면의 맛에 흠뻑 빠진 김성경(37·서울) 씨는 "회사가 있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이곳까지 조금 멀긴 하지만 이렇게 종종 찾아온다"며 "매콤하고 새콤하고 달콤하기까지 한 냉면에다 수육이나 만두, 회무침까지 곁들이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라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경기도 남양주에서 온 박인서(82) 할아버지는 함흥냉면의 오랜 애호가란다. 냉면 맛을 못 잊어 시간 나는 대로 오장동에 온다는 박 할아버지는 "쫀득한 면발과 화끈한 회무침 맛에 반해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근 50년 동안 이곳을 찾는 '반세기 단골'이 됐다"고 말했다.

50년간 냉면을 만들어온 이병태 오장동함흥냉면 주방실장

◇ 함흥냉면 65년 역사의 오장동 거리

오장동에는 65년 역사를 자랑하는 두 개의 함흥냉면 식당이 있다. '오장동함흥냉면'과 '오장동흥남집'이 바로 그곳.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인 1953년부터 함흥냉면을 만들어오고 있다는 이들 식당은 1대 운영자인 한혜선(타계)·노용언(타계) 할머니가 모두 흥남 출신의 피란민이라는 점 등에서 닮았다.

오장동함흥냉면의 경우 한 할머니에서 아들 문성준(타계)·손자 문요환(38) 씨까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오장동흥남집은 노 할머니에 이어 며느리 권기순(78)·손자 윤재순(58) 씨가 3대째 가업을 물려받고 있다. 1981년 문을 열었던 신창면옥은 아쉽게도 지난해 폐업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녘의 피란민들은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속초, 부산 등 남쪽 땅에 임시로 터를 잡았지만 고향길이 막히자 살 길을 달리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오장동 등지에 함흥냉면을 앞세운 식당을 차려 생계를 꾸려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장동의 냉면식당에서는 실향민 손님들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1·4후퇴 때 부모를 따라 고향인 함흥에서 월남했다는 김병훈(74·춘천)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다시 맛 들인 함흥냉면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됐다"며 지난날의 사연을 뭉클하게 들려줬다.

"어린 시절 고향집에서 감자가루로 만든 농마국수를 자주 먹었어요.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정말정말 좋아하셨거든요. 피는 못 속이나 봐요. 고향 음식인 함흥냉면을 먹으면서 그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곤 하지요.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아내와 함께 왔고요. 옛정은 냉면의 면발처럼 질긴가 봐요."

식당 건너편에는 대표적 건어물 시장인 중부시장이 있다. 중부시장은 억척스러운 함경도의 피란 상인들을 중심으로 60여 년 전에 건어물 상권이 형성됐던 곳이다. 함흥냉면 식당과 중부시장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깨를 나란히 해온 데는 이렇듯 애틋한 지난날의 사연이 숨어 있다. 그래서 냉면을 먹은 뒤 이 시장에도 들러 애환의 삶과 서민의 추억을 반추해보면 더욱 좋겠다.

건어물로 유명한 중부시장 전경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8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id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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