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강남 아파트 3채 값으로 한국 첫 편의점 열었죠"

이혜운 기자 2018. 7. 7.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호 편의점' 30년 고근재 가맹점주
지난 30년간 이 편의점으로 출근하는 동안 30대 청년은 환갑을 넘겼다. 국내 1호 편의점 가맹점주 고근재씨는 “이곳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했다”며 “주민의 추억이 깃든 곳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조인원 기자

오전 6시에 일어나 샤워를 한다. 뉴스를 보고 오전 8시까지 출근을 한다.

서울 도봉구 덕성여대 앞에 있는 '세븐일레븐 쌍문점'. 30평 규모의 편의점이 그의 직장이다. 시작할 땐 30대 청년이었는데 벌써 환갑이 지났다.

야간 근무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전날 상황을 듣고 빗자루로 가게를 청소한다. 행주로 가판대를 닦고, 상품이 떨어진 곳은 채워넣는다. 서류 정리를 하고 나면 점심 시간. 집에서 챙겨온 도시락을 꺼낸다. 편의점 음식은 이제 지겹다. 물건 주문하고 나면 오후 8시 퇴근 시간. 제품 받는 건 오후 9시 아르바이트생들이 한다.

국내 1호 편의점 가맹점주 고근재(61)씨의 하루다. 그는 편의점 역사의 산증인으로 불린다. 고씨는 "이걸로 자식들 장가도 다 보냈다"며 "주변에서는 삼각김밥 먹이며 키웠다고 농담한다"고 했다.

편의점 인생 30년

세븐일레븐은 1927년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사우스랜드 제빙 회사가 창립했다. 국내에서는 문병혁 동화산업 회장 차남인 문용준 사장이 1988년 5월 코리아세븐을 설립했다. 직영 1호점은 올림픽점, 가맹 1호점은 고씨 가게이다.

―어떻게 편의점을 알았나요.

"미국 살던 지인(知人)이 알려줬어요. 한국에서 하면 잘될 것 같다고. 1988 서울올림픽 때문에 수요가 높았거든요. 문용준 사장을 찾아가 동업하자고 했어요. 당시엔 가맹점이라는 개념이 없었거든요. 설립 비용이 2억1000만원이었는데 반반 부담했죠."

―1억500만원이면 큰돈인데요.

"강남 아파트 30평짜리 세 채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주변에서 빌려서 시작했죠. 제가 황교안 전 국무총리와 성균관대 법대 동기예요. 고시 공부를 좀 오래 했는데, 비전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해서 투자했죠."

―시작해보니 어땠나요?

"문 열고 나니 구경온 사람 줄만 20m였어요. 도봉구에 편의점이 저희 하나였는데 세무서에 가서 부가세 150만원 신고하니 놀라더라고요. 비슷한 규모 상점이 10만~20만원 낼 때였어요. 저희 매출은 전산 처리로 100% 노출된 것도 있지만, 한 달 매출이 5000만원이었으니."

―그때가 가장 화려했나요?

"2001~2003년, 한·일월드컵 전후로 가장 좋았어요. 하루에 250만~260만원씩 벌었어요. 1990년대 초·중반 명절 연휴도 다른 곳은 다 쉬는데, 여긴 영업하니깐. 하루 500만원씩 벌었죠."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요.

"지금요. 경쟁점이 너무 많아서 매출이 절반으로 떨어졌어요. 최저임금 문제도 있고. (물가는 올랐는데) 매출이 30년 전과 비슷해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 때도 힘들었어요. 사람들이 과자·음료도 안 사더라고요. 그때 편의점은 집사람에게 맡기고 전 친구 회사 일을 도와줬어요. 가게 접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죠.

―휴가는요?

"해외는 지난해 처음 갔어요. 둘 다 환갑 된 기념으로. 평소엔 하루 이틀 쉬면서 지방 다녀오는 정도죠."

여군 장교가 된 아르바이트생

고씨 가게를 거쳐 간 아르바이트생은 총 1000여명. 현재는 4~5명, 장사가 잘될 땐 12명으로 운영했다. 아르바이트 시급은 800원에서 7530원으로 올랐다. 고씨는 "당시엔 학생들이 아르바이트할 곳이 별로 없어 벼룩시장(무가지)에 공고를 내면 지원자들이 몰렸다"고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아르바이트생은요?

"덕성여대생이었는데 지금은 여군 장교가 된 친구. 지금도 6개월에 한 번씩 휴가 나올 때마다 와요. 결혼해서 애 엄마가 돼 아이 손잡고 놀러 오는 친구도 있고. 가장 오래 일한 친구는 1992년 전문대 졸업하고 취직이 안 돼 여기서 3년간 야간 근무했던 남자예요."

―아르바이트생을 뽑는 기준은요?

"열의와 성의, 성실함을 많이 봐요. 빗자루질 한번 시켜보면 바로 알아요. 이 일이 왜 필요한지도 물어보고. 물론 채용에 늘 성공하는 건 아니에요. 실패해서 하루 만에 그만두는 친구들도 있고."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적은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안 나올 때요. 제가 30시간 연속 근무한 적도 있어요."

동네 사랑방이 된 편의점

1980~90년대 편의점은 연예인들이 놀러 오는 '핫플레이스'였다. 얼음 컵에 탄산음료를 담은 '걸프', 얼음과 주스를 간 '슬러피', 미국식 핫도그 '빅바이트'가 인기 상품. 고씨는 "당시 셀프 서비스라는 개념이 없을 때라 음료 기계에 붙은 '셀프'라는 글자를 보고 '셀프 주세요'라고 주문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말했다.

―학생 손님이 거의 없네요.

"교내에 대형 편의점이 두 개나 생겼거든요. 전체 손님 중 학생은 20% 정도. 거의 40대 이상 단골손님들이에요. 20년 된 단골이 많아요. 반경 500m 안에 편의점이 7개 있어요. 신문 보니 편의점이 일본은 2200명당 1개인데 한국은 1300명당 1개라더라고요."

―대표적인 단골은요?

"매일 아침 와서 커피 드시는 60대 남자분, 오후 1시 반이면 신문 사러 오는 할아버지. 담배 손님들은 요즘 전자 담배를 많이 찾아요. 단골들 편하라고 편의점 냄새 나게 하려 해요. 요즘 신문·잡지는 많이 치우는 분위기인데 전 매대를 유지해요."

―가장 잘 팔리는 식품은요?

"삼각김밥요. 참치마요네즈와 전주비빔밥 맛은 스테디셀러예요. 삼각김밥은 초창기 때부터 판매했어요. 그땐 롯데백화점에서 납품받아서 연어·명란젓·햄·우엉맛 네 종류였어요. 당시 가격으로 900원이었으니 나중에 출시된 삼각김밥보다 200원 더 비싼 고급 식품이었지요."

―가장 힘든 손님은요.

"주폭(酒暴)요. 자기들끼리 싸우다 사망한 적도 있어요."

고씨가 서 있는 계산대에는 의자가 없었다. 매뉴얼이라고 했다. 보통 10~12시간 서서 근무한다. 고씨는 편의점을 "주민들의 추억이 깃든 곳, 언제나 가까이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함께 마무리하는 추억의 장소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