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MD의 식탁] 숨이 '죽은 밥'과 '산 밥', 어떤 걸 드시겠습니까?

김진영 입력 2018. 7. 4. 10:33 수정 2018. 7. 4.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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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진영 기자]

오전 11시 30분. 엉덩이가 들썩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보면 겨우 1분.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직장 생활 할 때 점심 직전의 내 모습이었다. 인천·여의도·강남 등 점심시간이면 직장인들로 분주한, 사무실이 밀집한 지역에서 주로 근무했다.

낮 12시 언저리가 되면 하던 일을 접고 일어섰다. 밥 먹으러 가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조바심이 났다. 맛있는 식당은 이미 줄이 늘어서 있고, 혹시나 하며 가보면 역시나였다. 저 사람들은 일도 안 하나, 구시렁거리며 다른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오늘 뭐 먹지'는 보고서의 결론보다 어려운 미션이었다.

점심 메뉴의 선택 포인트는 항상 반찬이었다. 찌개·볶음·비빔 혹은 반찬이 맛있는 곳이 우선이었다. 찌개가 맛있으면, 이것 저것 집어먹을 수 있는 반찬이 많으면 그만이었다. 점심을 (아주 재빨리) 잘 먹고 일어서서 계산하고 나오면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간혹 잘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잘 먹었다고 했던 곳 대부분은 밥맛이 좋은 곳이었다.

만족한 한 끼 식사, 밥맛이 좋은 곳이었다

 스뎅 밥그릇 뚜껑을 닫고 밥온장고에 넣어두면, 한두 시간 안에 밥은 숨을 거둔다.
ⓒ 김진영
국내에 재배하고 있는 쌀은 대략 300여 종. 조생종은 운광·해담·진광, 중생종은 고품·하이아미·대보·해품·청품, 중만생종은 삼광·호품·칠보·진수미·영호진미·미품·수광·현품 등 16개 품종을 최고 품질의 쌀로 지정하고 재배를 장려하고 있다. 이 가운데 호품은 다수확 품종으로 가을철 정부 수매에서 빠지면서 최고 품질이라는 쌀의 지위를 잃었다. 한때 호품은 고시히까리보다 밥맛이 좋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생산량을 높이기 위해 질소 비료를 너무 많이 쓴 탓에 밥맛이 명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질소 비료를 많이 넣으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은 늘어나지만 밥맛이 떨어진다. 16개 품종에서는 빠져있지만 새누리와 추청도 많이 심는다. 새누리는 다수확 품종으로 수량 위주인 정부 수매 방식에 적합한 품종이어서 많이 재배한다. 다수확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대신 밥맛이 떨어지는 약점을 가진 품종이다. 새누리 역시 호품처럼 수매 품종에서 빠져서 퇴출 중이다. 국내 육성 품종 외에 고시히까리, 히토메보레, 밀키퀸 등 일본 품종도 재배가 늘고 있다.

맛있는 쌀을 고르는 방법은 간단하다. ① 품종명을 본다. ② 도정한 날이 구매 시점에서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고른다. ③ 소포장으로 산다. 이 세 가지만 유의해서 산다면 맛있는 쌀을 구매할 수 있다. 가격이 저렴한 쌀에는 삼광이나 신동진 등 품종명 대신 '혼합미'라 표시돼 있다. 혼합미는 여러 가지 품종의 쌀을 섞어 포장한 것으로 가격을 낮추기 위해 만든 쌀이다. 

혼합미는 가격이 저렴한 만큼 단일 품종과 비교해 밥맛이 떨어진다. 쌀은 도정한 순간부터 산화가 시작된다. 보통 보름이 넘어가면 급격하게 밥맛이 떨어진다. 그래서 최근에 도정한 쌀을 소포장으로 구입하는 게 좋다. 대용량을 사면 소비하는 날짜가 길어져 시간이 지날수록 밥맛이 떨어진다.

일반 식당에서는 대부분 가격 때문에 혼합미를 많이 사용한다. 혼합미라고 해서 현격히 밥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다만 바로 한 밥일 경우만 그렇다. 밥을 지어서, 스뎅(스테인리스가 표준말이지만) 그릇에 넣어서, 밥온장고에 보관하면 밥의 생명은 빠르게 단축된다. 단일 품종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메뉴에 따라 식당을 정하고 나서 자리에 앉으면 재빨리 찬과 주요리가 깔린다. 공깃밥 뚜껑을 열면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할 정도의 밥이 나온다. 

스뎅 그릇 뚜껑을 닫고 밥온장고에 넣어두면, 한두 시간 안에 밥은 숨을 거둔다. 갓 지은 밥이라고 하더라도 그릇 뚜껑을 닫으면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한다. 뚜껑에 맺힌 습기는 물방울이 되어 다시 밥으로 떨어진다. 열기가 식으면 그 과정은 중단되지만 밥은 뭉치고, 본연의 구수한 향은 사라진다. 밥을 따듯하게 보관한다고 밥온장고에 넣는 순간 밥맛은 끝장이 난다.

우리는 '빨리'만 외치며 너무 맛없게 산다

 서울 서교동 '옥동식 돼지곰탕' 집이 개업할 때, 옥동식 셰프와 죽이 맞았던 게 있었다. 바로 '밥맛'이었다. 곰탕을 아무리 맛있게 끓여도 그에 걸맞는 밥맛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 김진영
몇 년 전, 춘천에서 닭갈비를 먹었다. 숯불 닭갈비를 파는 구도심에 자리한 식당인데, 손님이 많았다. 주문한 닭갈비가 얼추 익었을 때 밥을 주문했다. '잠시만요' 하고는 밥솥에서 밥을 퍼서 줬다. 온기와 향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밥이었다. 아무 생각없이 공깃밥이 나오려니 했다가 바로 푼 밥이 나오니,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밥이 맛있으니 닭갈비도 훨씬 맛있었다. 7~8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밥과 닭갈비가 어우러진 맛의 찰떡궁합이 기억날 정도다. 밥이 맛있는 곳을 찾기는 어렵지만, 그렇지 않은 곳은 쉽게 만날 수 있다. 한번은 서울시내 노포에서 설렁탕을 주문했다. 

나온 국물의 온도와 맛, 그리고 고기의 맛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밥이 죽어 있었다. 조금 든 흑미가 얼마나 건강에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밥맛과는 상관이 없었다. 탕이 아무리 맛있어도 밥이 제 역할은 못하니 만족도가 떨어질 수밖에. 밥온장고에 두어 시간만 있어도 맛이 사라진, 영양분만 남아있는 밥으로 바뀐다. 죽은 밥이 맛있는 국물을 망쳤다.

서울 서교동 '옥동식 돼지곰탕' 집이 개업할 때, 옥동식 셰프와 죽이 맞았던 게 있었다. 바로 '밥맛'이었다. 곰탕을 아무리 맛있게 끓여도 그에 걸맞는 밥맛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잘 만든 국물이라고 해도 이에 걸맞은 밥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맛있는 한 끼가 탄생한다.

점심 시간은 주는 이, 먹는 이 모두가 바쁘다. 여유가 낄 틈이 없는 탓에 맛없는 밥이 용서된다. 밥온장고에서 밥을 꺼내는 시간에 몇 초만 더해 밥 푸는 시간을 기다린다면, 지금보다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빨리'만 외치며 너무 맛없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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