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소득주도성장 폐기하고 포용적 성장으로 옮겨가야

이철호 입력 2018. 7. 4. 01:04 수정 2018. 7. 4.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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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청 핵심들 미묘한 발언
용감하게 공식 폐기를 선언해야
시장을 믿되 시장 실패 보완하는
포용적 성장으로 옮겨갈 때다
이철호 논설주간
지난 1년간 소득주도 성장의 성적표는 참담하다. 저소득층의 소득은 감소했고, 신규 일자리는 전년 대비 3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매우 아픈 지점”이라면서도 “실패 진단은 아직 성급하며 시간이 필요하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보름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한국 도·소매업의 고용률 둔화는 최저임금 인상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다”고 공식 진단했다. 사실상 소득주도 성장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최근 몇 가지 의미심장한 발언이 눈길을 끈다. 우선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달 26일 경제수석에 임명된 윤종원 OECD 대사에 대해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공정경제가 OECD의 포용적 성장과 같은 개념이라는 소신을 가진 분”이라고 설명했다. 슬그머니 ‘소득주도 성장=포용적 성장’으로 포장을 바꿔치기한 것이다. 하지만 한마디로 잘못된 이야기다. 정확히 말하면 소득주도 성장과 포용적 성장은 결이 다른 개념이다. DNA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포용적 성장은 정통 경제학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시장을 믿으며 가격을 직접 건드리지 않는 게 원칙이다. 시장경제에 따른 부작용, 즉 불평등이나 양극화는 정부가 소득재분배와 복지·사회안전망 확충으로 적극 완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시장 가격을 건드리지 않되 그 부작용은 시장 바깥에서 최대한 보완하는 게 핵심이다. 정부 주도의 경기 부양책도 단기적 처방에 그쳐야 한다고 본다.

반면 소득주도 성장은 이단(異端)의 경제학이다. 시장을 불신하며 정부가 임금 등 시장 가격에 직접 손을 대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정부 주도의 소득 증가가 장기적 경제 성장을 이끈다고 ‘믿는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 믿음에 따라 최저임금을 올렸고 가계 소득을 위해 통신비는 깎았다. 하지만 시장의 역습으로 자영업이 붕괴했다. 그러자 정부는 “과도한 임대료”→“높은 카드 수수료”→“값비싼 프랜차이즈 가맹비”가 주범이라며 돌아가며 마녀사냥을 벌였지만 헛수고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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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 소득주도 성장의 생체실험은 무모했다. 원래 최저임금은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 때, 성장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일자리를 뺏지 않는 수준으로, 지역과 업종에 따라 차별적으로 올리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4가지 조건을 깡그리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16.4%나 끌어올렸다. 이러니 저소득층 일자리와 소득이 감소할 수밖에 없다.

최근 소득주도 성장은 급속히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워낙 국민적 이미지가 나빠진 데다 부작용도 방치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그나마 최근 당·정·청 핵심인사들이 조용히 포용적 성장으로 옮겨 타는 분위기는 다행스럽다. 임종석 실장의 발언이 나온 다음날(27일),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도 중견기업 간담회에서 “포용적 성장으로 가야 한다”고 밝혔다. 하루 뒤인 28일에는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포용적 성장은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을 합친 말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사전에 입을 맞추지 않는 한 사흘 연속 당·정·청 핵심들이 똑같은 발언을 할 수 있을까. 정치적 구호인 소득주도 성장은 건드리지 않되 내용물은 포용적 성장으로 확 바꾸려는 계산이 묻어난다.

물론 반발도 거세다. 지난 주말 민주노총은 대규모 집회에서 ‘노동정책 후퇴’를 비난하며 “최저임금 개악 반대” “주 52시간 강행”을 외쳤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소득주도 성장 대신 소득포기 성장을 하겠다는 소리냐”고 비판했다. 진보진영은 “소득주도 성장을 강화하고 더 공격적인 재정정책을 펴라”며 핏대를 세운다.

하지만 안팎의 경제환경이 어렵게 돌아가고 있다. 어제 코스피는 문 대통령 취임 이전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1년간의 과실을 모두 까먹은 것이다. 여기에다 미국 금리 인상과 통상마찰, 문재인 케어에 따른 건보료 인상, 탈원전 후유증인 전기료 인상, 대북 경제지원 등 온갖 청구서가 줄줄이 날아들고 있다. 문 대통령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하반기에 기업 현장을 자주 방문하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슬그머니 포용적 성장으로 옮겨가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미 시장은 최저임금 1만원을 기준으로 미리 몸집 줄이기에 들어갔고, 가계는 지갑을 닫고, 대기업의 설비투자는 감소 추세다.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다. 이런 위축된 심리에선 백약이 무효다. 꽁꽁 얼어붙은 경제주체들의 마음부터 녹여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용기 있게 소득주도 성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식 폐기를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돌아보면 진보 인사들의 이상은 높았지만 정책은 참 무능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런 되뇜을 다시 듣는 것은 비극이다.

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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