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 | 역사학자
[전우용의 우리시대]종전시대

‘그’는 젊은 나이에 중범죄를 저질러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수감 직후에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삶을 견디지 못했으나, 이윽고 생명체 본연의 능력을 발휘하여 상황에 ‘적응’한다. 감옥 안에서 산 세월이 감옥 밖에서 산 세월보다 훨씬 길어졌을 즈음, 그에게 감옥 밖은 비현실적 공간이 되었다. 그곳에서 보낸 삶이 어땠는지는 어렴풋한 이미지로만 남았다. 하지만 죄수의 삶은 익숙하나 고통스러웠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석방 신청을 한다. 그는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잘 ‘개조’됐는지, 감옥 밖으로 나가 ‘정상인’으로 살 준비를 얼마나 잘 갖추었는지 간절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번번이 기각당한다. 거듭되는 좌절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그가 “가석방 따위엔 관심 없으니 공연히 시간 빼앗지 말고 빨리 불허 도장이나 찍으시오”라고 말했을 때에야, 심사위원들은 비로소 가석방을 허가한다. 그가 꿈을 버리자, 마침내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전우용의 우리시대]종전시대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감옥 밖 세상에 발을 디뎠다. 그의 추억 속 공간들, 그 공간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감옥 안에서 몸에 익혔던 규율과 기능은 감옥 밖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의 친구와 그의 세상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었다. 감옥 안의 그는 지혜로운 노인이었으나, 감옥 밖의 그는 철모르는 어린아이였다. 그에게 감옥 밖은 혼란스러운 공간이었다. 감옥 안은 갇혀 있으되 안정적이었으나, 감옥 밖은 열려 있기에 불안했다. 감옥 안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감옥 밖에 적응하지도 못한 그는 자기보다 먼저 가석방됐다가 자기와 같은 불안감 속에서 자살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도 자살을 결심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스토리 일부이다. 이 영화에서 모건 프리먼이 분한 노인 장기수 ‘레드’는 늘 감옥에 갇히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꿈꿨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감옥 밖에서 만난 세상은 따뜻했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냉혹한 현실이었다. 감옥 안에서는 그나마 꿈이 있었으나, 감옥 밖 세상은 그에게서 꿈조차 빼앗았다.

올해 안에 남·북·미 간, 또는 남·북·미·중 간에 ‘종전선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문가가 많다. 이 예상대로 실현되면, 우리는 지난 65년간 살아온 ‘휴전체제’라는 감옥에서 석방될 것이다. 전쟁 중임을 전제로 국가가 사람의 머릿속까지 들여다볼 권리를 가졌던 시대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다수는 휴전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를 겪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종전은 휴전체제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종전선언’은 한국인들을 익숙한 과거가 아니라 낯선 미래로 이끌 것이다.

1953년의 휴전협정은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 사이에 체결되었다. 유엔이 중국과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군 최고 지휘관 사이의 협정이 된 것이다. 이로써 군사문제가 한반도의 모든 문제를 규정하는 체제, 즉 휴전체제가 성립했다. 휴전협정은 전쟁을 재개할 수 있다는 약속이었다. ‘종전선언’으로 그 약속을 폐기하는 것은 세계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한쪽이 패망하지 않더라도, 전쟁에는 언제나 책임과 배상 문제가 따랐다. 그런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전쟁을 끝내는 것은, 우리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낯선 일이다.

휴전체제가 종식되면, 당장 휴전선이라는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북한 정권과 체제에 대한 원칙적 태도를 정해야, 걸맞은 이름을 찾을 수 있다. 평양에 남측 대표부를 설치한다면, 이름은 뭐라고 해야 하는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면, 헌법의 영토 규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북한과 적대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친선관계를 맺을 것인가? 상호 간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면, 국가보안법 등 적대관계를 전제로 제정된 법률과 법조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공산당, 사회당, 노동당 같은 이름의 정당이 등록 신청을 한다면, 받아줘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탈북민은 귀순한 우리 국민인가, 아니면 불법 월경한 난민인가? 이북5도청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인공기를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과 같이 취급할 것인가, 달리 취급할 것인가?

‘종전’ 이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해서는 전쟁 불안 해소에 따른 신인도 상승, 철도와 도로 연결에 따른 경제 효과 등 장밋빛 전망에 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최근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을 둘러싼 논란에서 겪은 바와 같이, ‘종전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유발할 것이다. 기대했던 일보다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더 많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휴전체제로 되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다시’ 통일된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통일 아닌 종전체제를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서 통일에 대비한 연구와 준비는 적지 않으나 통일 아닌 종전체제에 대한 준비는 전무하다. 과거 우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았기에, 엄청난 혼란과 갈등을 겪었고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지금은 해방 직전처럼 준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다. 65년간 ‘휴전체제’에 살다 석방된 사람들에게 종전 이후 어떤 일들이 닥칠 것이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주는 것은 인솔자의 도리다. 종전은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규범뿐 아니라 세계관과 인간관 모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역사적 사변이다. 정부는 종전체제가 초래할 혼란과 동요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즉시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에 사는 사람 모두는, 예상치 못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다시 ‘휴전체제’로 되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져야 한다. 그것이, 후손과 역사에 대한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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