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해체 폐기물 관리, 아직 시스템도 없다
[경향신문] ㆍ탈핵과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
정부가 노후 원전인 월성 1호기를 조기 폐쇄하기로 확정하면서 탈핵 논쟁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최근 10년간 매년 평균 1000억원이 넘는 적자가 난 만큼 가능한 한 빨리 문을 닫는 게 합리적이라는 찬성론과 수명을 2022년까지 연장하기로 하면서 들어간 6000억원이 매몰비용이 된다는 반대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월성 1호기 조기폐쇄 논란 크지만 정작 원전 폐기물 관련 논의 없어
원전의 가동 중단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지만 정작 원전이 해체되고 난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는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특히 방사능 농도가 낮은 ‘자체 처분 폐기물’은 법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이전 정부부터 꾸준히 이뤄져온 고준위폐기물 이외에 ‘폐로’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폐기물이 얼마나 되고, 처리비용이 얼마나 들지, 또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하루 빨리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전 1기당 드럼 8만개 분량 발생 경주 방폐장 아직 여유 있는 상황
국무조정실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이 최근 발간한 ‘원자력발전소 해체 폐기물의 안전·안심관리 정책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소 1기당 해체폐기물 발생량은 200ℓ짜리 드럼 8만개 분량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제염(방사성물질 제거 작업) 또는 감용(폐기물 부피를 줄이는 기술) 과정을 통해 방사성물질을 제거한 뒤 자체 처분되는 폐기물은 6만5500드럼이고, 이를 제외한 중저준위폐기물은 1만4500드럼가량이다.
중저준위폐기물들은 모두 경북 경주의 방사성폐기물처분장으로 가게 된다.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를 합하면 약 2만9000드럼의 중저준위폐기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주 방폐장이 담을 수 있는 폐기물은 어느 정도일까. 환경정책평가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제염 또는 감용 조치를 적용하면 총 22만5000드럼까지 가능하므로 원전 22개를 해체해도 폐기물을 수용할 수 있다. 제염·감용 조치를 적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원전 3개 분량까지 가능하다. 아직은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연구진은 “사고로 인한 운영 정지, 탈핵 정책의 가속화 등의 변수가 생길 경우 등 중저준위폐기물이 갑자기 쏟아져나올 때는 대처방안이 아예 없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법적 처분 절차와 장소가 정해져 있는 중저준위폐기물은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지만, 그보다 낮은 방사선을 뿜어내는 ‘자체 처분 폐기물’은 일부 재활용되는 등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 폐기물들의 예상피폭 방사선량이 연간 10μSv(마이크로시버트) 미만으로 방사능 농도가 매우 낮거나 없다고는 하지만, 최근의 ‘라돈 침대’ 사태에서 보듯 방사성물질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이 큰 상황이어서 더 엄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국내의 원자력안전법과 시행령, 시행규칙에는 ‘자체 처분 폐기물’이 방사성폐기물인지 여부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는 이 같은 폐기물을 매립, 소각, 재활용하는 등 일반 폐기물과 비슷한 방법으로 처분하고 있는 상태다.
이 ‘자체 처분 폐기물’은 주로 무엇일까. 일단 기존에 국내에서 원전 운용 과정에서 발생하거나 원자력연구시설 등에서 나온 콘크리트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콘크리트는 토양, 폐수지 등과 마찬가지로 매립 처리된다.
철재류는 대부분 재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된다. 폐유와 종이 등은 허가를 받은 폐기물 처리시설에서 소각되고 있다. 이들 자체 처분 폐기물은 현재 일반 사업장 폐기물과 함께 처리되고 있지만 정부는 관련 통계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 폐기물의 재활용 방법 및 활용처에 대한 제한 등 관리체계도 아직 마련돼 있지 않다. 현행법 체계상으로는 자체 처분 폐기물이 일상생활로 반입될 수도 있는데도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보고서는 원전 해체 폐기물의 자체 처분 계획서 통과 여부를 결정할 때 원안위가 관여하긴 하지만 자체 처분 이력을 공개하는 별도 시스템을 운영하지 않는 등 관리가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자체 처분에 관한 기록도 해체 관련 사업자가 보관하는 것이 전부다. 보고서는 앞으로 원전 해체를 통해 자체 처분 폐기물이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전에 관리체계를 강화할 것을 주문했다.
자체 처분 폐기물에 대한 방사능 농도 측정이 1회만 이뤄지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현재는 자체 처분 계획을 수립할 때 방사능 농도를 측정하는 것 이외에는 추가적인 측정을 실시하지 않아도 된다. 보고서는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관리체계를 구축하려면 최종 처분장 반입 때도 농도가 기준 이하인지 입증하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2003년 부안 방폐장을 둘러싼 갈등에서 보듯 국내의 경우 원전 해체 폐기물에 대한 주민들의 수용성은 매우 낮은 반면, 국민 불안은 매우 높은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법적 절차 정해진 중저준위 아닌 ‘자체 처분 폐기물’은 사각지대에 콘크리트는 매립·철재류 재활용 정부, 처리 상황 통계 공개 안 해 본격 발생 전 관리 체계 강화해야
정부 및 원자력 관련 기관들이 자체 처분 폐기물들의 농도가 기준 이하이며 인체에 유해할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하더라도 시민들은 이를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앞으로 고리, 월성 등 해체될 원전들에서 자체 처분 폐기물이 나올 경우 이를 매립, 재활용, 소각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거부감도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연구진은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원전 해체 과정 전체에 대한 정보공개와 더불어 해체 폐기물의 처분 경로 등을 공개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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