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국까'와 '국뽕' 없이 즐길 수 없을까

2018. 6. 3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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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전직 축구기자의 월드컵 관전기

[한겨레]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 대 스웨덴의 경기가 열린 지난 18일 저녁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월드컵이 시작되면 ‘할 수 있다’ ‘희망이 있다’는 기사를 써야 한다. 월드컵은 국민들이 원하는 기사를 쓰는 이벤트니까.”

4년 전 2014 브라질 월드컵에 나선 한국 축구대표팀을 따라다니며 취재했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당시 대표팀 사정은 암담했다. 그러던 중 러시아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1 대 1로 비겼다. 이근호의 선제골이 터졌는데 러시아 골키퍼가 넣어준 것과 다름없는 골이었다. 승점 1점을 땄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예견된 결과였다. 본선에 앞서 열린 두번의 평가전 완패(튀지니전 0-1 패, 가나전 0-4 패), ‘형님 리더십’으로 포장된 전략과 전술 부재, 무엇보다 보름 넘게, 대표팀을 매일같이 지켜봤지만 ‘좋아지고 있다’고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러시아전이 끝나고 쏟아져나온 기사들은 너무 앞서가고 있었다. “평가전 때보다 선수들의 몸상태가 나아졌다” “2차전 알제리전 승산이 커졌다”…. 왜 앞 뒤 따지지 않고 장밋빛 기사를 쏟아내는지 답답했다. 그때 월드컵 취재 경험이 많은 동료기자가 말했다. “월드컵에 나선 축구대표팀 기사는 보고 들은 대로 쓰는 게 아니”라고.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지도자, 언론 순으로…” 수준 낮아

그로부터 4년 뒤 러시아월드컵에 나선 한국 축구대표팀은 2패 뒤 독일을 상대로 2 대 0 승리를 거뒀다. 1, 2차전을 치르는 동안엔 언론의 융단 폭격을 맞았다. 지상파 3사 중계진들이 특정 선수를 지적하면 이들의 이름이 포털 검색순위에 올랐다. 미디어는 앞다퉈 해설자들의 흥분한 목소리를 담아 기사들을 양산했다. 포털은 다시 이들 기사를 전면에 내세우며 ‘마녀사냥’을 부추겼다.

수비수 장현수가 ‘목표물’이 됐다. 장현수가 실수가 잦은 선수라는 건 감독은 물론 대부분의 축구팬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장현수를 대표팀에 뽑을 수밖에 없는 게 한국 축구의 현실이다. 책임은 장현수를 발탁한 감독에게도 있을텐데, 비판과 비난은 장현수에게만 몰렸다. <한국방송>(KBS) 이영표 해설위원은 2차전에서 실수를 거듭한 장현수에게 “기본기가 없다”고 꼬집었고, <문화방송>(MBC) 안정환 해설위원은 “무책임하다”고 지적했다. 국가대표 선수에게 기본기가 없고 무책임하다고 한 방송사 중계진들은 한국 선수가 골을 넣자 흥분하고 소리만 지르거나, 일본전을 중계하면서 일본이 아쉽게 골을 넣지 못하자 “다행”이라고 하는 등 방송의 기본기를 망각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 축구대표팀 기사엔 ‘국까’(국가와 남을 비난하다는 뜻의 ‘까’를 합친 속어)와 ‘국뽕’(국가와 히로뽕을 합친 말로, 과도한 애국주의를 조롱하는 속어)만이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수비수 장현수를, 때로는 공격수 김신욱을 열심히 ‘까’는 중에도 ‘국뽕’은 계속됐다. 문화방송은 한국과 스웨덴 경기가 끝난 뒤 “축구는 심판놀음”이라며 패배 원인을 심판에게 돌렸다. 멕시코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장현수가 페널티킥을 허용한 핸들링과 주심이 파울 선언을 하지 않은 멕시코 수비수의 핸들링은 공의 진행 방향이나 몸과 팔의 밀착 정도 등 종류가 달랐지만 “같은 핸드볼인데 우리에게만 (파울을) 불었다”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우리나라의 축구, 특히 축구대표팀은 태극기같은 존재다. 국가적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장치이자 도구라서, 축구는 무조건 이겨야 하고 무조건 잘해야 한다. 축구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이긴다고, 축구를 잘한다고 생활체육으로서 축구가 발전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한 나라의 축구 수준은 선수, 지도자, 국내리그, (협회의) 행정력, 언론, 팬 등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인데, 한국 축구에선 가장 수준이 낮은 게 지도자, 그 다음이 언론이다.”(축구전문매체 <포포투 한국판> 홍재민 편집장) ‘장현수 논란’은 신태용 감독과 언론의 합작품이다.

축구를 즐긴다는 것

한국인들은 월드컵 때면 전 국민이 (축구대표팀) 감독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감독된 처지에서 한 경기 한 경기가 얼마나 피가 마르고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울까. 그래서 1%의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고 기적을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멕시코전이 끝난 6월24일 ”독일전에서는 우리 선수들에게 근성과 투지의 축구를 강요하지 말자. 마음껏 즐기라고 해주자”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썼다. 좋은 취지의 말이지만, 실행하기엔 참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그 근성과 투지 덕분에 한국 대표팀은 피파(FIFA) 랭킹 1위이자 전 대회 우승팀 독일을 잡았다. 5천만 국민은 감독에서 순수한 팬으로 돌아와 세계 최강 독일을 꺾은 축구대표팀에게 찬사를 보낼 수 있었다.

독일전 승리 덕분이겠지만, 러시아월드컵은 한국 대표팀이 월드컵 16강 진출에 실패해도 조금은(?) 즐거울 수 있다는, 한국 축구팬들이 처음 경험하는 묘한 감정을 남겼다. 4년 뒤 지도자와 언론은 여전히 수준이 낮고, 선수들은 근성과 투지만으로 경기에 나서더라도, 그런 한국 축구라도 즐기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고 월드컵을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축구 좀 못하면 어떤가.

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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