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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효종의 사위 박필성, 백살 앞두고 이틀에 한번 사랑 즐긴 정력가

배한철 기자
입력 : 
2018-06-29 1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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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관별과도. 지방에서 특별히 치른 과거를 묘사했지만 과거장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과거장에서는 부정행위가 횡행했지만 한글 문학의 선구자인 서포 김만중 역시 부정행위로 장원급제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46] 구운몽 저자이자 한글 문학의 선구자인 서포 김만중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해서 장원으로 뽑혔다. 김만중은 1665년 정시 과거에 응시한다. 과장에 제목이 내걸리자 모두가 술렁거렸다. 주제가 너무 어려워 모두들 자포자기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제를 제출한 대제학 이경석은 "'바야흐로 나라가 크게 위태로우니 송백만이 홀로 푸르고 푸르도다'라는 구절로 글머리를 삼은 답안지는 잘 짓고 못 짓고 일찍 내고 늦게 내고를 떠나서 장원으로 뽑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만중의 형 김만기 역시 시험관으로 참여했는데 이 말을 듣고 이를 글로 써서 아우에게 슬쩍 건넸다. "아우 김만중이 마침 대각 아래에 있어 적당한 틈을 타서 주었다. 수천 장의 시험지를 채점한 후에야 비로소 만중의 답안지가 1등으로 뽑혔다."(좌계부담)

좌계부담은 18세기 후반 저술된 작자 미상의 전기이다. 좌계는 지은이의 호로 짐작되며 부담은 끌어모은 이야기란 뜻이다. 광해군대부터 영조대까지 250여 년 동안 관료 및 문인, 학자들의 일화, 시화를 기록하고 있다. 총 211명이 수록돼 있다.

효종의 사위 박필성은 당시로는 기록적인 나이인 96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는 효종과 안빈 이씨의 딸 숙녕 옹주(1649~1668)와 혼례를 올려 금평위에 봉해졌다. 숙녕 옹주는 불행히도 20세에 천연두를 앓다가 목숨을 잃는다. 부마들은 한번 왕의 딸과 결혼하면 평생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 부마에게는 재혼과 축첩이 법적으로 금지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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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박영효 일가. 박영효는 철종의 딸 영혜 옹주와 결혼해 금릉위에 봉해졌지만 3개월 만에 사별했다. 고종이 궁녀를 후실로 삼게 해 가족을 이뤘다. 사진 중앙에 남자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박영효.
그 역시 옹주가 죽은 뒤 80년간 홀로 살았다. 1741년 영조는 궤장을 줬다. 그러나 그의 실제 인생은 결코 모범적이지 않았다. 그는 정력의 소유자였다. "백살이 가까우면서도 이틀에 한 번꼴로, 일 년에 6~7개월은 사랑을 나누었으니 그의 너무나 뛰어난 정력은 어찌 일반 사람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반면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이병상(1676~1748)은 아내(재상 서종태의 딸)와 일찍 사별했지만 평생 다시 장가들지 않았고 첩도 두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여겼다. 공은 청렴하고 고고한 절개가 있어서 일생 동안 허물이 없었으니 당색을 막론하고 모두 빙벽의 지조(얼음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다는 말)를 지닌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6대손인 이봉상(1676~1728)의 최후도 서술한다. 이봉상은 충무공의 장남 이회의 고손자이다. 이봉상은 훈련대장과 어영대장을 지내고 충청병마절도사로 나갔다. 때마침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서울을 공격하기에 앞서 충청감영에서 무기를 확보할 계획을 세웠다. 이봉상을 모시는 기생 월례를 사주해 침소에 둔 칼을 훔쳐 내게 했다. 깊은 잠에 빠졌던 이봉상은 반란군이 쳐들어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깨 침소에 둔 칼을 찾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공은 달아나 몰래 감영의 후원에 숨었으나 적들이 공을 끌어내어 죽였다. 비장 홍림(1685~1728)이 몸으로 대장을 감싸고 덮었으나 구하지 못하고 난도질당하여 죽었으니 아 그 충의가 빛나도다."

효령대군의 후손 중 이기빈(?~1625)이라는 인물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타국의 세자를 살해했다. 그가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유구국 세자가 대정에 표류했다. 처음에는 후대했으나 유구국에 보물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돌변해 세자 일행을 잡아다가 보물을 달라며 갖은 방법으로 협박했다. 세자는 시를 지어 "떠도는 혼이 고국에 돌아가도 위로해줄 친척 없어라. 교린의 옛 정의는 어디 있단 말인가"라며 이기빈을 꾸짖었다. 이기빈은 발각될까 두려워 세자를 죽였다. "이기빈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부유하게 사는 것은 아마도 유구국의 보물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건은 1611년 발생했으며 이듬해 발각된다. 국가 간 큰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이기빈은 뇌물을 써서 극형을 모면했다.

조선 중기 이전만 해도 천민도 능력에 따라 벼락출세가 가능했다. 정3품 수군절도사를 지낸 유극량(?~1592)은 천민이었다. 그의 어머니 옥대가 영의정 홍섬(1504~1585)의 노비였다. 옥대는 옥술잔을 깨자 처벌을 두려워해 달아났다. 조령에 이르러 탈진해 쓰러진 것을 유좌수란 사람이 구해 살렸다. 유좌수는 옥대에 반해 후처로 삼고 유극량을 낳았다. 유극량은 무예를 배워 무과에 급제했다. 주위에서 앞다퉈 장수의 재주를 지닌 인물이라고 천거해 벼슬이 계속 높아졌다. 유극량의 어머니는 아들이 출세를 할수록 걱정도 커졌다. 신분이 탄로 나 아들이 큰 곤경에 처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유극량은 홍섬을 찾아가 과거 합격을 취소하고 다시 노비가 되기를 원한다고 고했다. 그러자 홍섬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너는 나의 노비가 아니다"며 양인으로 방면했다. 유극량은 벼슬이 전라좌수사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적국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재상에 이른 인물도 있다. 우의정 이숙(1626~1688)은 11세 때인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아 포로로 심양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노비가 돼 온갖 고생을 했다. 청나라 주인이 그의 이름을 묻자 도령님, 서방님, 진사나리, 영감, 대감이라고 속여 말했다. 그와 함께 잡혀온 사람이 거짓말이라고 일러바치자 청나라 주인은 모질게 매질했다. "이와 같이 몇 년을 지내다가 우리나라로 송환돼 돌아왔는데 이전에 중국에서 변발했던 머리가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았다. 포로로 잡혀 있던 당시 이야기를 들은 원로들은 이숙의 그릇이 크다고 했다." 이숙은 귀국 후 과거시험을 준비해 서른 살 되던 1655년 급제했으며 경상도관찰사, 대사간, 이조판서를 거쳐 1687년 우의정에 제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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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송파 삼전도비 사진. 비석의 글은 이경석이 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척화신인 김상헌의 제자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삼전도비를 지어 지탄받은 이경석(1595∼1671)은 아이러니하게도 척화신인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제자였다. 제자는 스승보다 항상 먼저 승진했다. 이경석은 1645년 김성헌에 앞서 우의정이 됐다. 왕과 주요 중신들이 함께 대면하는 경연이 열릴 때마다 매번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임금에게 "저의 스승은 당대의 큰 어른인데도 아직 예전 자리에 머물러 있고 못난 제가 선생보다 앞에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1646년 김상헌이 좌의정으로 승진하자 이번에는 이경석이 영의정에 올랐다. 불편한 이경석은 자주 사퇴를 청했다. "세상 사람들은 간혹 삼전도 비석의 글 때문에 그를 비방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불행한 일이니 어찌 그에 대해서 잘잘못을 따질 일인가."

천민 등 낮은 계층에서 주로 승려로 출가하지만 놀랍게도 양반으로서 승려가 된 사람도 있었다. '9차 직교라틴방진'을 발견한 조선 최고 수학자 최석정(1646~1715)이 청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지어줬다. 그들 중에 '처묵'이라는 승려도 포함됐다. 그의 성은 최씨이며 양반으로 중이 됐다.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대부분 뛰어난 작품이었다. "(전략) 요하의 만리 바람은 거센데. 천년의 화표주(고대 중국 궁궐 입구에 세우던 기둥)에 달빛은 다시 비추네. 슬프다, 그대 이 길을 떠나니." 저자는 이 시가 처묵의 여러 작품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여성들 삶도 전한다. 정사신파(淨祀神婆)라는 무당은 정안대군(태종) 옆집에 살았다. 그녀의 예언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원경왕후(태종비)가 여러 번 점을 쳤지만 한 번도 복채를 받지 않았다. 정사신파는 "이 집 부인께서는 귀한 마님이 되실 것인데 어찌 감히 복채를 바라리오까"라고 했다. 원경왕후는 무당의 점괘에 따라 남편을 위기 때마다 구해낸다. "태종이 일찍이 자제들에게 '너희 어머니의 공은 왕건 부인인 유씨에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아, 원경왕후가 조정의 안정을 도운 공은 참으로 신파의 조언이 크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도 등장한다. 그녀의 남편 이원수는 공부가 충실하지 못하고 행실도 부족한 면이 많았다. 남편이 을사사화의 원흉 중 한 명으로 비난받은 영의정 이기의 문하에 출입하자 이를 극구 만류했다. 이원수는 선조 즉위 후 윤원형과 이기가 처벌받을 때 재앙을 피했다. 신사임당은 수명이 길지 못했다. 그녀는 죽으면서 "내가 이미 네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다시 장가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원수는 장가를 가겠다는 뜻을 밝히자 종신토록 혼인하지 않은 증자와 주자의 예를 들며 막았다. "이와 같이 말을 하니 결국 이원수는 말문이 막혔다. 신씨가 일찍 죽었는데 이원수는 신씨 말을 따라서 다시 장가들지 않고 다만 첩만 두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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