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물과 불의 통과의례를 통해 되찾은, 두 손과 신발 한 짝

조현설

손 없는 소녀의 물과 재투성이 소녀의 불

유럽과 아시아 일대에 내려오는 ‘손 없는 소녀’ 설화에는 생명의 근원인 물과 문명의 원천인 불이라는 상징이 들어 있다. 설화에서 손 없는 소녀가 우물에 팔을 내미는 순간 손이 재생된다. 재투성이 소녀 설화에 나오는 아궁이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통로다. 물과 불은 결국 재생과 관련이 있다. 왼쪽은 인형극으로 만들어진 <손 없는 색시>, 오른쪽은 독일 그림동화에 나오는 <재투성이 소녀>다.

유럽과 아시아 일대에 내려오는 ‘손 없는 소녀’ 설화에는 생명의 근원인 물과 문명의 원천인 불이라는 상징이 들어 있다. 설화에서 손 없는 소녀가 우물에 팔을 내미는 순간 손이 재생된다. 재투성이 소녀 설화에 나오는 아궁이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통로다. 물과 불은 결국 재생과 관련이 있다. 왼쪽은 인형극으로 만들어진 <손 없는 색시>, 오른쪽은 독일 그림동화에 나오는 <재투성이 소녀>다.

계모의 음모로 쫓겨나 팔이 잘리고
왕자를 만나지만 다시 쫓겨난 공주
물을 마시다 혹은 아이를 구하려다
생명의 원천인 물에서 팔이 자란다

몽골 설화 속 ‘팔 없는 소녀’는
유라시아에 흔한 ‘계모 학대’ 민담
그런데 재투성이 소녀는 왜 있을까

죽음의 세계에서 온 선물인 신발과
그 신발을 신고 가는 다른 세계…
이승과 저승을 중개하는 아궁이는
살해된 콩쥐의 부활이 시작된 장소

성경에선 심판의 도구인 물과 불
민담에선 쌍둥이 같은 재생의 상징
두 소녀는 계속 행복할 수 있을까


유다인의 <토라>(모세오경)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와 내 계약을 세울 것이다. 다시는 어떤 살덩이도 홍수의 물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땅을 파괴하는 홍수도 없을 것이다.” 악한 세상을 물로 심판한 야훼가 노아와 맺은 계약이다. 계약의 징표는 ‘구름 사이에 걸린 활’ 곧 무지개였다. 토라 신화의 전통 속에서 하늘의 무지개는 신의 약속이다.

또 다른 심판도 있다. 16세기 미켈란젤로가 프레스코화로 그리기도 한 ‘최후의 심판’이다. <요한의 묵시록>은 이렇게 말한다.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냈고 죽음과 지옥도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행적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이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20:13~15) 두 번째 심판은 불의 심판이다.

로마공의회를 거쳐 구성된 <성서>(Bible)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는 악에 대한 심판의 신화가 등록되어 있다. 하나는 물의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 심판이다. 토라의 전통을 이은 기독교 신화는 물과 불이 인간의 죄악을 정화하는 쌍둥이 원소라고 말한다. 왜 물과 불일까? 근래 나는 옛날이야기를 읽다가 물불 쌍둥이의 신화적 원형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

몽골로 가보자. 체렌소드놈이 펴낸 <몽골의 설화>에는 ‘팔 없는 여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특이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어떤 왕한테 공주가 있었는데 왕비는 계모였다. 계모는 공주를 미워하여 해치려 한다. <콩쥐팥쥐> 이야기나 <장화홍련전>에서 만날 수 있는 전형적 계모이야기다. 왕이 공무로 궁을 비운 사이 계모는 큰 들쥐를 죽여 앞니를 빼 숨겨 두었다가 3년 만에 돌아온 왕 앞에 내놓는다. 공주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노한 왕은 딸을 쫓아냈다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쫓아가 죽이려 한다. 공주의 애원에 화를 식힌 왕은 두 팔을 잘라버린다. 공주는 팔 없는 소녀가 되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몽골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일찍이 안티 아르네와 스티스 톰슨이 세계 민담을 분류하면서 AT706(손 없는 소녀, The Girl Without Hands or The Handless Maiden)이라는 유형 번호를 부여한 바 있듯이 범세계적이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다. 그림 형제의 동화집에도 실려 있고, 우리 이야기판에서도 ‘손 없는 색시’라는 이름으로 널리 구전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도 ‘손 없는 처녀(手無し娘)’라는 제목으로 100편 이상이 채록되어 있다. 손 혹은 팔의 부재가 신데렐라 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구분 짓는 핵심 지표다.

이제 이 끔찍한 폭력의 희생자인 소녀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소녀는 원조자를 만난다. 이웃 나라의 왕자가 물에 버려진 소녀를 구해 자초지종을 듣고는 함께 산다. 공주가 임신을 했을 때 왕자는 공무로 3년 동안 궁을 비우게 되는데 돌아갈 즈음에 왕자는 편지를 쓴다. 그런데 중간에 ‘편지 바꿔치기’ 사건이 발생한다. 왜 편지심부름꾼이 중간에 중국인의 집에 머물렀는지, 어떻게 왕비였던 계모가 중국인의 아내가 되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지만 옛 계모는 편지의 내용을 ‘팔 없는 여자를 내가 돌아가기 전 귀양 보내라’는 메시지로 고친다. 아마도 중국인에 대한 반감이 이런 식의 변형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아들의 편지에 화가 난 왕은 며느리와 아이를 절로 보내지만 팔 없는 여자는 두려워 도망친다. 3년 만에 귀환한 왕자로부터 진실을 알게 된 왕은 중국인과 그 아내를 심문하여 자백을 받아낸다. 계모를 처형하고 중국인은 사막으로 귀양을 보냈지만 며느리의 행방은 묘연했다. 왕자는 아내를 찾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를 베푼다는 포고령을 내린다. 소문을 들은 팔 없는 여인은 아이를 업고 궁으로 향한다. 도중에 목이 말라 아이를 내려놓고 엎드려 물을 마시려다가 물에 빠지고 만다. 한데 물에 빠진 쪽의 팔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닌가! 놀란 여인은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물에 빠졌더니 그쪽 팔도 새로 자라났다. 여인은 아이를 안고 궁에 이르러 왕자와 재회하여 행복하게 산다.

팔 혹은 손이 재생되는 이 극적인 장면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러시아 민담에서는 소녀가 엎드려 물을 마시려고 할 때 아기가 우물에 빠지는데 어떤 노인의 말에 따라 아이를 꺼내려고 팔을 뻗자 손이 다시 생긴다. 우리 구전 민담에서는 도랑물을 먹으려고 엎드리는 순간 아기가 쑥 빠져 잡으려고 팔을 확 뻗었더니 손이 나와 붙는다. 계모가 잘라낸 열 손가락을 물어갔던 까치가 나중에 샘물에 그걸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샘물에 손을 넣자 감쪽같이 복원되는 변이형도 있다. 러시아의 경우 손의 재생이 하느님의 도움이라고 말하고,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관세음보살의 구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종교의 지층을 걷어내고 나면 심층에는 물이 있다. 물의 힘이 손(팔)을 재생시켰다!

왜 물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근원적으로 물의 자식이다. 자궁에는 양수가 있고 양수가 인류를 키웠다. 물은 인류의 원형질이다. 물이 생명을 탄생시키고, 죽은 생명을 소생시킨다는 물의 신화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융은 이 보편적 체험을 원형(archetype)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바리공주는 이승에 없는 ‘약수’를 구하기 위해 저승여행을 마다하지 않았고, 예수는 세례자 요한에게 ‘물’의 세례를 받았다. 신화에서 물은 재생의 상징이다. 이런 이유로 손 없는 소녀의 손은 물에서 재생될 수밖에 없었다.

‘손 없는 소녀’는 ‘옛날에’로 시작하여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나는 전형적 민담 형식의 이야기지만 ‘잘린 손의 재생’이라는 신화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 민담이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져 있는 이유도 이야기가 본래 신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화의 빛에서 보면 물은 생명의 원천이지 파괴의 근원이 아니다. 홍수신화가 그렇지 않은가. 홍수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발발한 것이 아니라 신들끼리의 싸움 때문에 일어난 것이거나 우연히 발생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홍수의 원인이 아니라 홍수로 인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사실이다. 홍수신화의 물은 재생의 상징이지 노아의 홍수 신화처럼 신의 분노와 파멸의 상징이 아니다. ‘야훼와의 계약’이라는 유다교 이야기를 만들면서 물의 상징성이 변질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계모한테 학대받는 이야기는 하나만 해도 충분할 텐데 왜 신데렐라, 곧 재투성이 소녀 이야기 역시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펴져 있을까? ‘재투성이 소녀’ 이야기는 ‘손 없는 소녀’와는 다른 뭔가를 말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런 물음이 아궁이에서 일하느라 재투성이가 된 소녀의 이미지를 불러낸다. ‘손 없는 소녀’가 물에 의한 재생 이야기라면 혹시 ‘재투성이 소녀’는 불에 의한 재생 이야기가 아닐까?

그림 형제가 19세기 초에 수집한 <독일민담집>에는 심술궂은 계모한테 구박당하며 사는 소녀가 등장한다. 계모가 시킨 일을 하루 종일 하다가, 지쳐도 누울 침대조차 없었기 때문에 소녀는 늘 난로 옆에 있는 재 속에서 웅크린 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늘 더러운 차림새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재투성이 아가씨로 불렀다는 것이다. 민담 속에서 재투성이는 소녀의 불행을 드러내는 정도지만 난로 또는 아궁이를 불의 신화라는 맥락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생성된다. 아궁이라는 소녀의 위치는 무엇을 상징할까?

주지하듯이 불은 인류를 자연인에서 문화인으로 도약시킨 가장 긴요한 원소였다. 신의 세계에서 훔쳐온 불이라는 신화적 발상, 불에 대한 숭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아궁이는 집 안에 모셔진 불이 깃든 공간이다.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아궁이는 집 안에서 이승과 저승을 중개하는 장소’라고 해석한다. 아궁이의 불 속에서 요정이나 악마의 모습을 한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튀어나오는 신화나 전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 근거로 삼았다. 그렇다면 아궁이 중개소에 거주하는 재투성이 소녀, 곧 신데렐라는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샤먼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마치 무조신(巫祖神) 바리데기처럼!

그렇다면 재투성이 소녀는, 손 없는 소녀가 잃었던 손을 물속에서 얻었듯이 아궁이의 불 속에서 무엇을 다시 얻었는가? 그렇지 않다. 재투성이 소녀는 저 유명한 ‘신발 한 짝’을 잃었고 그것을 왕자와 같은 고귀한 남자로부터 돌려받았을 뿐이다. 왕자를 바로 아궁이로 보기는 어렵다. 재투성이 소녀의 신발 한 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굽이 굴절된 신화적 변형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소녀를 다른 존재로 만든 신발(꽃신, 금신, 유리구두 등)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져 보자. <뼈와 구슬>(19회)에서 거론한 바 있듯이 좡족 콩쥐팥쥐 이야기인 <따쟈와 따룬>의 경우 따쟈는 계모가 살해한 소의 뼈를 묻은 곳에서 솟아난 파초 꽃봉오리에서 금신을 얻는다. 한데 소는 본래 어머니였다. 독충을 부리는 숲속의 무녀가 따쟈의 어머니를 소로 변신시킨 뒤 계모로 들어앉았던 것. 그러므로 따쟈의 금신은 소의 뼈가 파초를 통해 준 것이고, 소는 어머니이므로 금신의 출처는 뼈로 상징되는 어머니의 죽음이다. 그래서 뼈가 증식을 상징한다고 했던 것인데 뼈의 다른 이름은 죽음이다. 재투성이 소녀가 잃어버린 신발(한 짝)은 본래 죽음의 세계로부터 온 선물이었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는 둘이다. 하나가 물이라면 다른 하나는 불이다. 그래서 바리데기는 황천강을 건너 저승에 갔고, 스틱스(Styx)를 건너 저승(Hades)에 이르려면 뱃사공 카론(Charon)에게 삯을 지불해야 한다. 손 없는 소녀는 물과 접촉해야 잃었던 손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힌두 신화의 불의 신 아그니는 인간과 신의 세계를 이어주는 중개자, 달리 말하면 저승으로 들어가는 아궁이다. 우리의 부뚜막신(조왕신)도 인간과 신의 세계를 이어주는 불의 메신저다. 팥쥐에 의해 살해된 콩쥐가 꽃이 되고, 꽃이 아궁이에서 태워진 뒤 아궁의 재 안에서 구슬이 나오고, 구슬이 다시 콩쥐로 환생하는 과정은 불을 통한 부활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신데렐라가 신발 한 짝을 되찾는 과정도 불을 통한 재생의 과정일 수 있지 않을까? 아궁이 앞의 재투성이 소녀는 자신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간다. 신발이 없었다면 갈 수 없는 세계에 간다. 파티의 현장인 왕궁은 신화적으로는 저승이다. 재투성이인 소녀가 죽어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신데렐라의 화려한 드레스의 다른 이름은 수의(壽衣)다. 왕자는 아궁이 저 너머의 세계에서 신발 한 짝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신랑이다. 바리데기를 기다리던 서천서역국의 무장승이다. 바리데기가 무장승을 만나야 약수를 얻을 수 있듯이 재투성이 소녀는 왕자를 만나야 신발을 되찾을 수 있다.

신화가 말하는 물과 불은 죄악을 정화하는 심판의 상징이 아니라 재생의 상징이다. 재생하려면 물과 불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오랜 신화의 기억을 품은 두 편의 민담이 간직하고 있는 메시지다. 이 재생의 통과의례에 굳이 신의 심판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답은 사제나 예언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남은 문제 하나를 더 물어 봐야 한다. 민담은 손을 되찾은 손 없는 소녀가, 신발을 되찾은 재투성이 소녀가 왕자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끝을 맺는다. 그런데 재생한 두 소녀가 왕자와 만든 가정에는 손목을 자르는 왕, 계모에 눈먼 아버지가 더 이상 없을까?

▶필자 조현설

한국 고전문학·구비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교수(국문학)로 한국 신화를 포함한 동아시아 신화와 서사문학을 탐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건국신화의 역사와 논리>(2004),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2006), <마고할미신화 연구>(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 ‘해골, 삶과 죽음의 매개자’(2013), ‘천재지변, 그 정치적 욕망과 노모스’(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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