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자 염한웅 과기자문회의 부의장 ‘네이처’ 특별기고
“현 정부 ‘4차 산업혁명’ 대응, 시민들에겐 모호한 개념” 지적
“‘퍼스트 무버’ 도약 위해선 기초과학 장기적으로 육성해야”

“현 정부는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스마트 시티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대응에 주력하고 있지만, 시민들에게 이는 모호한 개념이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산업계가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는 목표지만, AI로 인해 일자리가 오히려 줄어들 수도 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인 염한웅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자제어 저차원 전자계 연구단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은 28일자 과학저널 ‘네이처’에 낸 특별기고에서 “한국은 정부가 R&D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지만, 그에 비해 학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연구 성과는 부진한 실정”이라며 “R&D 사업에 대한 정부의 리더십 부재가 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의 R&D 예산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4.24%(2016년 기준)로,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다.
염 부의장은 “정부가 주도하는 연구 과제 중에는 목표가 불분명하고 국제적인 산업 표준에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2001년 출범한 차세대 초전도체 응용기술 개발사업단도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는 “당시 시장 수요에 대한 명확한 아이디어조차 없는 상태에서 사업이 시작됐고, 결국 21세기 프론티어 연구개발사업이 종료된 시점인 2013년 제대로 된 시제품 하나 없이 연구가 끝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염 부의장은 한국의 R&D가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했다. 일례로 2016년 한국이 새롭게 등록한 특허 수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았지만, 실제 상업화로 이어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반면 네덜란드의 경우 R&D 예산은 한국의 4분의 1 수준이지만, 벌어 들이는 특허 기술료는 한국의 5배 이상이다. 세계경제포럼의 ‘글로벌 경쟁력 보고서 2017-2018’에 따르면, 한국의 글로벌 경쟁력은 뉴질랜드(13위)나 태국(15위), 말레이시아(23위)보다 낮은 26위를 기록했다.
염 부의장은 “최근 들어서는 학술적 연구를 위한 연구소와 연구 시설들이 새롭게 들어서고 있어 기대감이 높다”며 2011년 설립된 IBS와 지난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포항 4세대 X선 방사광가속기, 2021년 대전에 완공될 예정인 중이온가속기 등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염 부의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여전히 정부의 R&D 시스템에 불만을 갖고 있다”며 “정작 국가 R&D 사업 예산은 대부분 정부가 연구 주제와 범위 등을 주문하는 ‘탑다운’ 방식의 응용 연구 과제에 투입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국가 R&D 사업 예산 19조3927억 원 중 연구자가 주도하는 기초 연구 과제에 투입된 연구비는 전체의 6%(약 1조2700억 원)에 불과했다.

염 부의장은 “지난해 중견 연구자가 제안한 연구 과제 중 통과된 것은 단 11%”라며 “이는 미국이나 유럽연합(EU), 일본의 약 30%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중국의 경우에도 우수한 대학들에서는 응집물리학 같은 기초 연구 분야에 200억 원씩 투입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서 기대할 수 있는 연구비의 10배 이상”이라며 “때문에 안타깝게도 재능 있는 젊은 물리학자들이 지금은 중국에서 연구를 한다”고 했다.
염 부의장은 지금이 한국 R&D의 ‘터닝 포인트’라고 했다. 그는 “‘패스트 팔로워’에서 ‘퍼스트 무버’가 되려면, 종전처럼 첨단 기술과 산업계를 지원하는 것보다 장기적 안목으로 기초과학을 육성하는 편이 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한다”며 “인프라 구축과 인재 양성,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염 부의장은 “미세먼지, 치매 같은 사회문제에 대해 정부는 국가 차원의 R&D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2011년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지열발전소 자극으로 유발됐을 가능성이 제기된 2017년 포항지진 등을 겪으며 국민들로부터 정부와 과학자들은 책임과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국가 과학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염 부의장은 “물론 고무적인 정책적 변화도 있다”며 “한국 정부는 2021년까지 기초 연구비를 2배로 늘리고,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도 확대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앞으로는 연구비가 실질적인 연구 성과를 내고 사회에 기여하는 데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과학자들이 한국의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 정부와 과학계가 공개석상에서 근거에 기반한 토론을 일상적이고 정기적으로 갖는 문화가 형성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한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오는 29일 오전 10시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국제협력관 컨벤션홀에서 국가 R&D 혁신방안과 대학연구인력 권익 강화 및 연구 여건 개선방안에 대한 열린 토론회를 개최한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번 토론회는 과기자문회의 페이스북 라이브를 통해서도 생중계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