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여성에 또 열린 이란 축구장.."이번이 마지막일까"

입력 2018. 6. 26. 08:40 수정 2018. 6. 26.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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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전 이어 25일 밤 월드컵 포르투갈전 단체 관람
25일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 입장한 이란 여성들[연합뉴스]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나이가 올해로 쉰이라는 멜리카 씨는 딸과 함께 25일(현지시간) 밤 테헤란 남서부 아자디 스타디움을 찾았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이란과 포르투갈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자디 스타디움에서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월드컵 경기를 단체 관람하는 행사가 열렸다.

멜리카 씨는 "평생 아자디 스타디움 안에 처음 와봤다"고 했다.

아자디 스타디움은 관중 8만여명이 입장할 수 있는 테헤란의 랜드마크이자 아시아의 대표적인 축구경기장이다.

테헤란에 오십 평생을 살면서 이곳을 모를 리 없지만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단지 멜리카 씨가 축구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1979년 이슬람혁명이 일어나 종교 국가가 된 이란은 바로 이듬해 발발한 이라크와 전쟁을 8년간 거치면서 사회가 급격히 경직됐다.

1981년부터 여성이 축구경기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관습도 이런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받았다.

그러던 이란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 월드컵에 출전한 이란 축구 대표팀이 15일 첫 경기에서 승리하자 다른 나라처럼 대규모 단체 관람 행사를 마련해 달라는 축구팬의 요구가 빗발친 것이다.

이에 이란 정부는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20일 스페인과의 경기를 대형 스크린으로 생중계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그러면서 여성의 입장도 37년 만에 전격 허용했다. 비록 실제 축구경기를 관람하는 건 아니었지만 여성이 아자디 스타디움에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전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공식적으로는 여성은 남성 가족과 함께 와야 한다고 했으나 여성끼리만 와도 실제 현장에선 묵인됐다.

여성들은 해방감을 느끼며 월드컵의 밤을 만끽했다.

25일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 입장한 이란 여성[연합뉴스]

당연히 이란에 가장 중요한 경기인 25일 포르투갈전도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단체 관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날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스페인전을 단체 관람하는 여성들을 본 보수 인사들이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란 검찰총장은 전날 "아자디 스타디움에서 20일 밤 벌어진 일을 보았는가. 여성들이 히잡을 벗고 소리를 지르고 춤을 췄다. 이런 행동은 이란의 규범과 문화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월드컵 단체 관람 행사를 취재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으려고 25일 오전부터 담당 부처와 아자디 스타디움 운영본부에 전화했지만 대답은 "개최 여부를 아직 모른다. 일단 공문을 팩스로 보내 보라"였다.

경기가 열리기 7시간 전인 오후 3시께가 돼서야 비로소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입장권을 판매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기는 밤 10시30분에 시작했지만 오후 7시부터 축구팬이 모여들기 시작해 경기 직전에는 8만여 석 규모의 관중석이 절반 가까이 메워졌다.

이 가운데 여성은 어림잡아 40% 안팎으로 보였다.

축구경기장 입장이 많아야 두 번이었을 이란 여성들은 얼굴과 손등에 이란 국기를 그리고 히잡 대신 이란 국기를 머리에 두르는 '월드컵 패션'을 과시했다.

이들은 마치 러시아 경기장 현장에 있는 것처럼 축구경기에 집중하면서 월드컵을 즐겼다.

다른 중동 지역 여성과 달리 외신 취재진의 촬영과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응했다.

이란에선 자신의 감정을 외부로 나타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데 이날만은 남녀를 불문하고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탄성을 지르고 손뼉을 쳤다.

이슬람 율법은 가족이 아닌 남녀를 물리적으로도 엄격히 구분하지만, 이날만은 아자디 스타디움의 관중석은 남녀가 섞여 빼곡하게 들어찼다.

25일 테헤란 아자디 스타디움에 모인 이란 축구팬들[연합뉴스]

이란에서 여성의 축구경기장 입장을 금지하는 데는 설명이 분분하다.

그 가운데 축구경기장에서 거친 남성 관중의 욕설과 성희롱에 노출될 수 있다는 설명이 가장 일반적이다.

실제 경기는 아니었지만 이날 경기장에선 시종 끊임없는 부부젤라 소리와 응원 구호만 들렸을 뿐 남성들의 험한 욕설은 들을 수 없었다.

남자 대학생 모하마디 씨는 "남자끼리만 있으면 오히려 공격적이고 욕설을 많이 하는데 여성이 함께 관람하면 오히려 이런 행동이 제한된다"면서 "여성도 축구를 직접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이란은 강호 포르투갈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1대1 무승부에 그쳐 16강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이란의 월드컵은 세 경기로 끝났다. 앞으로 단체 관람이 없다는 뜻이다.

남자 친구와 함께 온 쉬마 씨는 "축구경기장에 올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면서 "계속 입장이 허용됐으면 좋겠는데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사실 이날은 이란 서민들에게 더욱 힘겨운 하루였을 테다.

미국의 제재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24일과 25일 이란 리알화의 가치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자고 나면 환율과 물가가 오르면서 테헤란 남부 대시장(바자)에선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정부에 외환 대책을 요구하면서 이례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경제가 불확실해지자 사회 전반에 불안감도 서서히 커지고 있다.

젊은 층은 답답한 현실에 불만이 많다.

하지만 이날 밤만은 아자디 스타디움에 모여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고 스페인, 포르투갈과 같은 강팀을 상대로 세계 무대에서 대등한 경기력을 펼친 이란팀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은 경기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박자에 맞춰 "이란, 이란"을 90분 내내 외쳤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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