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김민아의 후 스토리]⑪제주지사 선거에서 '녹색 돌풍' 일으킨 고은영

김민아 논설위원 2018. 6. 25.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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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어리다, 여자다…정치할 자격 묻는 사람과 싸우는 게 힘들었죠”

고은영 녹색당 제주지사 후보가 지난 10일 해양쓰레기와 건축폐기물을 업사이클링한 1t 트럭 위에 서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제주녹색당 제공

압도적이었다. 1t 트럭 위에 버티고 서서 ‘포효’하는 고은영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사진).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서 사막을 질주하던 여전사 퓨리오사가 떠올랐다. 33세 여성 이주민 후보는 6·13 지방선거에서 ‘난개발 막는 여성청년 도지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제주 제2공항 계획을 백지화하고, 개발사업과 면세점으로 이윤을 챙기는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를 해체하겠다고 외쳤다. 1만2188표, 3.53%, 3위. 국회의원 한 명 배출한 적 없는 녹색당 후보가 원내 2·3당인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을 제쳤다.

‘낙선자이되 패배자는 아닌’ 그를 지난 22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났다. 초고가 명품브랜드를 홍보하던 자본주의의 첨병이 제주도로 떠난 사연을 물었다. ‘요망진 육지 것’이 괸당(친족·혈족) 문화가 뿌리 깊은 지역 선거판에서 깨지고 부딪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 이야기를 들었다.

■ 왕십리의 딸, 제주로 가다

서울 왕십리, 정확히는 행당역 근처에서 태어나 30년 동안 살았습니다. 달동네에 하나 있는 구멍가게 막내딸이었죠.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IMF키드’이자, 뉴타운사업을 목격한 ‘철거민의 딸’입니다. 모나지 않게 살았어요. 대학교 마치고 인턴을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했고, 이후 홍보대행사에서 일했습니다. 마지막에 담당했던 브랜드가 ‘에르메스’였지요. 4년간 일하니까 심신이 피폐해졌어요. 키가 168㎝인데 몸무게가 30㎏대까지 떨어졌으니까요. 월급 타서 병원비와 약값에 쏟아붓는 지경이었습니다. 도저히 안되겠어서 비영리단체로 옮겼는데, 2014년 세월호가 가라앉았습니다. 자본의 ‘예쁜 주구’ 노릇을 했다는 자괴감에 견딜 수 없더군요.

직장생활 접고 여기 와보니 떠나고 싶었던 서울처럼 제주 역시 난개발로 몸살 철거민 출신으로 ‘동병상련’

인간답게 살고 싶어 제주도로 갔습니다. 직장을 구하곤 30년간의 삶을 보름 만에 정리했어요. 제주에 익숙해지면서 당혹감이 찾아들었습니다. 떠나고 싶었던 서울과 너무 닮아 있었거든요. 개발속도는 서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제주 오피스텔에서 살았어요. ‘연세’(제주에서는 1년치 월세를 미리 한번에 낸다)가 가파르게 치솟자 서귀포로 이사하고, 점점 외곽으로 옮겨가야 했어요. 지금은 ‘리’에 삽니다. 철거민 출신이다보니 사람이 장소와 관계를 잃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요. 제주 사람들이 다 쫓겨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이주민이지만 제주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2016년 직장을 그만두고 녹색당과 시민사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습니다.

■ ‘육지 것’ 도지사에 도전하다

지난해 제주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오라관광단지 사업계획 심의안이 도의회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 회의장 밖에서 부결을 촉구하는 ‘시민 필리버스터’를 했어요. 자본검증 과정을 거치기로 결정됐으니 성과를 거둔 것이죠. 의지가 있으면 평범한 시민들도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겠구나…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제2공항은 그게 안되더라고요. 국토교통부 차원의 너무 큰 사업이니까요. 지난해 11월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참여하는 서울 코엑스 행사에 원정 가서 기습 시위를 벌였습니다. 김 장관과 20분간 면담하는데 “제2공항에 대한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돌아오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장관이 듣고 있다는 목소리는 어떤 목소리일까, 왜 적지 않은 반대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걸까…. 그날의 경험이 제주녹색당 시민참여경선에 뛰어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 ‘정치할 자격’을 묻는 이들과 싸우다

제주녹색당은 창당준비위원회 단계여서 부족한 게 적지 않아요. 경선을 실시하려면 비용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당원들이 무농약 귤을 따서 돈을 만들었습니다. 전남녹색당에서 지원 와서 같이 따주셨어요. 도지사 후보와 광역의원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한 뒤에는 차 재료로 쓰이는 제주조릿대를 따서 그 일당으로 초기 선거비용을 충당했어요. 기탁금은 전국당 차원에서 ‘1만원 캠페인’을 벌여 모금한 돈으로 냈고요. 선거운동원도 모두 자원봉사자였습니다. 서귀포의 토박이 당원 한 분은 지난 4월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제 수행을 맡아주고, 선거기간에는 서귀포 유세를 책임지셨어요. 토지를 강제수용당한 분인데, 다른 누구의 선거가 아닌 ‘그분의 선거’를 치른 거지요.

“너무 젊다, 아이고 어리네” 유세 때 그런 말 들으면 “원희룡도 30대에 국회의원 제가 정치하기 좋은 나이” 그렇게 대답하곤 했죠

이번 선거에서 세 가지 싸움을 했습니다. 첫 번째는 제2공항 문제 등 정책적 싸움이고, 두 번째는 소수정당·정치신인에 불리한 선거제도와의 싸움이었어요. 정책적 싸움은 우리 당이 선명하니까 돌파할 수 있었고, 선거제도 문제는 익히 예상했던 것이지요. 세 번째가 ‘고은영이 정치할 자격’을 묻는 사람들과의 싸움이었는데, 이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도민들이 절 보면 “너무 젊다, 아이고 어리네” 하세요. 그러면 한 분 한 분 붙잡고 “원희룡 지사가 국회의원 처음 된 때가 30대 중반(36세)이었어요. 제가 정치하기 딱 좋은 나이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면전에 대고 “여자라서 못 뽑는다”고 하는 분도 있었어요. “여자라서 잘합니다”라고 했지요.

6·13 제주지사 선거에 녹색당 후보로 출마했던 고은영씨가 지난 22일 서울 상암동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대중정당’을 자임하는 거대 정당들의 여성 배제와 청년 착취를 비판하며 “50대 남성만 대중이냐. 여성·청년 정치인을 키우는 시스템을 만들라”고 촉구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 “내가 뭘 던졌더니 깨지는구나”

선거운동을 시작한 후 가장 먼저 호응해준 분들이 50~60대 여성들입니다. 절 보면 안타까워하고, 힘내라 하시고…. 악수하는 정도를 넘어 쓰다듬고 반가워해주셨어요. 캠프에서 “저분들은 (자신이 못한 일을 혼자서 대신하는) 딸을 보는 마음일 것”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여성·청년·이주민 후보가 투표용지에 이름 올리는 일 자체가 균열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역에서 이해하고 경청해주시는 걸 보면서 ‘아, 실질적으로 균열이 일어나고 있구나, 내가 뭘 던졌더니 깨지긴 깨졌구나’ 체감하게 됐습니다. 제주도 여성들이 생활력 강하고 헌신적인데도, 마을단위 제사인 ‘포제’에도 참석 못할 만큼 억압받아왔거든요. 선거가 진행되면서 청년들의 호응도도 높아졌어요. 사실 억압받아온 여성이 있고, 일자리와 주거로 고통받는 청년이 있고, 이주민이 10만명을 넘었는데 대표자가 없었다는 게 이상한 일이죠.

■ ‘그들만의 리그’ TV토론의 벽을 넘다

제가 이만큼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데는 TV토론의 역할이 컸습니다. 방송사 주최 토론이 4회 열렸는데, 처음 열린 JIBS(SBS 제휴사)에선 선선히 기회를 줬어요. 다음으로 KCTV제주방송(지역케이블) 토론에 나갔고요. 문제는 KBS제주였지요. 지역사회에서 1인 시위와 성명 등을 통해 지원해주셔서 우여곡절 끝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KBS 토론을 계기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3위를 굳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선거방송토론위원회 주최 토론회에는 공직선거법 규정(국회의원 5인 이상 정당 또는 직전 선거 전국 득표율 3% 이상 정당이 추천하거나, 최근 4년 이내 해당 지역구 선거에 출마해 10% 이상 득표했거나, 여론조사 평균지지율 5% 이상 후보만 참여 가능) 탓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저보다 뒤진 4·5위 후보들도 (거대 정당 소속이라는 이유로) 참여했는데 말입니다.

TV토론 효과를 체감하고 나니 화가 났습니다. 도민들에게 검증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특권화돼 있구나, 이 좋은 기회를 (거대 정당 후보) 그들끼리만 누려왔구나, 나는 1분1초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데 저들은 이 소중한 시간을 ‘네거티브’로 지새우는구나, 누군가를 대변하고 정책을 이야기할 시간을 저렇게 허비하는구나, 저 특권을 빼앗아와서 나눠야 한다…는 분노였습니다. 사실 많은 정치신인들이 스스로를 의심하곤 합니다. 저도 저를 의심했는데, TV토론 같은 검증 기회를 겪고 한 단계씩 성장하면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선거법을 바꿔서 작은 정당, 정치신인들에게도 공정한 검증 기회를 줘야 합니다.

■ 여성·청년 경시하는 ‘대중정당’ 없다

선거기간 여자 어린이들을 만날 때마다 ‘커서 도지사 되세요’라고 했어요. 거대 정당에서는 ‘경쟁력 있는 여성 후보가 없다’고들 하는데,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직무유기고 책임방기예요. 될 사람 데려와서 당선시키는 게 세금으로 보조금 받는 공당의 사명인가요? 남성 이외 성별을 가진 사람도 정당 내에서 중요 인물로 성장하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게 공당의 역할입니다. 당헌·당규 등 내부규정을 통해 여성·청년 정치인을 키워내야 합니다. 다들 대중정당이라고 하는데 대중에는 여성과 청년도 포함되잖아요. 50대 남성만 대중은 아니잖아요.

녹색당에서 20대 여성인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가 정의당을 제치고 4위를 했습니다. 저도 의미있는 득표를 했고요. 표로 입증된 변화는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정당의 타이틀을 언제 버리게 될지 모릅니다. 지역에서 활동하다보니 일부 정당 지역당들의 여성 배제와 청년 착취가 얼마나 심한지 알게 됐습니다. 청년들이 정치를 자신의 미래 선택지로 고려하지 않아요. 당에서 선거운동 같은 때만 동원할 뿐, 그들이 책임있는 자리에 갈 수 있는 제도나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시급히 개선해야 합니다.

고은영이 제주에서, 신지예가 서울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녹색당을 낯설어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비현실적 이상주의자 집단’이라는 인식도 남아 있다. ‘녹색당원은 자가용 몰면 안되고, 채식만 해야 하느냐’고 부러 물었다.

빨강·파랑 한국 정치지도 알록달록 만드는 게 목표 보라색 신지예 후보도 있듯 녹색당 내부도 알록달록해

“물론 아니죠(웃음). 녹색당이 한국에서 억압돼왔던 목소리를 대변하기 때문에 낯설게 여기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기본소득이나 미세먼지 모두 우리가 주도적으로 제기해온 이슈들입니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지도가 빨간색(한국당)에서 파란색(더불어민주당)으로 바뀌었는데,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그 지도를 녹색(녹색당)으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지도를 알록달록하게 만드는 일, 즉 정치적 의제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저는 난개발에 맞서는 방식으로 그런 노력을 한 것이고, 신지예 후보는 보라색(페미니즘) 역할을 한 것이죠. 녹색당 내부도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합니다.”

고은영은 IMF키드였고, 재개발사업의 당사자였으며, 직장에서 쥐어짜이다 피폐해졌던 자기 삶을 ‘전형적’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만든 정치적 토양이 아직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힘으로 살아있음도 안다. 그는 “징그럽게 열심히 사는데도 끝없이 힘들고 끝없이 가난한 사람들, 그 많은 전형적인 ‘고은영’들이 목소리 낼 수 있는 사회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다”고 했다.

<김민아 논설위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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