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선 제주법 따라야죠".. 무슬림 금기 깨며 일하는 '제메니'

입력 2018. 6. 25. 03:01 수정 2018. 6. 25.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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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신청 예멘인들 만나보니

[동아일보]

21일 제주 제주시의 한 식당 주방에서 예멘에서 온 무함마드(가명)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그는 예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제주=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21일 제주 제주시의 한 흑돼지 전문식당. 구릿빛 피부의 한 남성이 주방 싱크대 앞에서 달걀 껍데기를 까고 있었다. 껍데기가 벗겨진 삶은 달걀을 긴 철사에 밀어 넣자 반으로 잘라졌다. 냉면 고명으로 쓰일 계란이었다. 예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던 무함마드(가명·30)에게는 아무래도 익숙지 않았다. 그의 손안에서 연신 달걀이 빠져나갔다. 이슬람신자(무슬림)인 그는 기도 시간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무슬림은 반드시 하루 다섯 차례 기도한다. 그가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사장님한테 잘 보이고 싶기도 하다.”

○ 예고 없이 다가온 ‘제메니’ 사회

대학생이었던 아흐메드(가명·사진 왼쪽)는 22일 서귀포시의 한 양어장에서 양식 광어에게 줄 냉동사료를 손질하고 있다. 옆에 있는 두 명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근로자다. 이들은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얻었다. 서귀포=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올 들어 예멘인 500여 명이 자국 내 내전 등을 피해 제주로 오면서 한국에서도 난민 논란이 달아오르고 있다. 이들은 무사증(무비자) 제도를 통해 들어와 난민 신청을 했다. 2013년 제정된 난민법에 따라 이들은 최장 5년까지 합법적으로 한국에 머물 수 있다. 유럽 국가처럼 난민 수백 명이 지역사회에 함께 사는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21일부터 사흘간 ‘제주(Jeju)’에 사는 ‘예멘인(Yemeni)’인 이른바 ‘제메니(Jemeni)’를 직접 만나봤다.

주방 허드렛일을 하는 무함마드는 식당 바로 뒤편에 살고 있다. 13.2m² 규모의 컨테이너 안에는 침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에어컨과 선풍기도 있었다. 야외에 간이 샤워시설도 설치돼 있었다. 그는 “예멘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사립학교 영어교사로 일할 땐 생각도 못 한 시설이다. 하지만 이것도 감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달 중순 열린 취업설명회에서 그는 지금의 일자리를 얻었다. 300명가량의 예멘인이 그처럼 제주 곳곳에서 일하고 있다. 대부분 숙식을 제공하는 조건이다. 정부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일자리를 이들에게 주선했다.

22일 찾은 제주 서귀포시의 한 양어장에선 예멘인 두 명이 양식 광어에게 사료를 주고 있었다. 이날 예멘인들은 쇠고기가 들어간 볶음 요리와 쌀밥으로 점심 식사를 해결했다. 할랄 고기(이슬람 율법으로 도축한 고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음식을 남기지 않았다. 아흐메드(가명·24)는 “지금은 할랄인지 아닌지 따질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제주시의 한 돼지고기 가공업체에서도 예멘인 3명이 일하고 있다.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멀리한다. 하지만 이 공장에서 일하는 예멘인들은 돼지고기를 손으로 만지며 비닐로 포장한다. 이들은 이곳에서 돼지를 처음 봤다고 한다.

23일 낮 12시경 제주의 한 호텔. 입구 근처에 예멘인 6명이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이 호텔은 한때 예멘인 150명이 머물렀던 곳이다. 2차례 취업설명회를 통해 상당수가 일자리를 얻어 나가면서 지금은 30명가량 숙박 중이다. 보통 2인실에 4명이 쓰고 있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칼레드(29)는 “혹시 전공 관련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 대학 성적표를 가지고 다닌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대학 성적표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A학점이 많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제주에 있는 예멘인의 30% 정도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 가시지 않는 ‘가짜 난민’ 우려

사흘간 만난 20명 가까운 ‘제메니’들은 대부분 예멘에서 대학을 다녔거나 교사 기자 등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다루고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으로 정보를 교류하며 한국 여론도 매우 신경 쓴다고 한다.

하지만 우려는 여전하다. 무엇보다 ‘가짜 난민’ 걱정이 크다. 예멘인이 정치적 박해 등을 피해 온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치안이 불안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크다. 시민 김모 씨(39)는 “시내에 무리를 지어서 다니니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이들이 앞으로 사고 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느냐”며 걱정했다. 다만 지금까지 예멘인과 관련해 경찰에 접수된 신고는 이들이 소란을 피웠다는 2건이 전부다.

기존 외국인 근로자와 갈등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예멘인에게 특혜를 준다는 이유다. 양어장을 운영하는 박모 씨(56)는 “최근 스리랑카 근로자들이 일 못하는 예멘인보다 돈을 더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고 말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지역단체는 30일 집회를 열 예정이다.

논란이 커지자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24일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예멘 난민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신속한 심사 절차, 엄격한 난민 수용 판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직접 설명하고 건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제주=황성호 hsh0330@donga.com·신규진 기자  

:: 제메니 ::

‘제주(Jeju)’와 ‘예멘인(Yemeni)’의 합성어. 제주를 통해 입국한 예멘인 수백 명은 앞으로 상당 기간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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