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정치는 허업”이라던 영원한 2인자…묘비엔 ‘무항산 무항심’읽음

정환보 기자

박정희 정권서 산업화 기여·독재 권력 부역 공과 갈려

10·26 이후 1인자 노렸지만…정치 활동 금지로 ‘부침’

고비마다 킹메이커 역할…말년 ‘보수의 큰 어른’ 대접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7년 11월22일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경기 포천에서 유세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7년 11월22일 신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경기 포천에서 유세하는 모습. 연합뉴스

영원한 2인자, 킹메이커, 영욕의 현대사 증인….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삶 전체가 영광과 오욕으로 굴곡진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일생이었다. “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던 노(老)보수정객은 스스로의 말처럼 평생을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있다 사라졌다.

김 전 총리는 2015년 2월22일 부인 박영옥씨의 빈소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정치는 잘하면 국민이 그 열매를 따먹지만 정치인 본인에게는 허업”이라고 말했다. 평생의 정치를 압축하는 한마디이자, 본인의 졸수(卒壽·아흔살)를 반추하는 한마디였다. 당시 이 전 대통령에게 건넨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정치인의 희생정신이지, 정치인이 열매를 따먹겠다면 교도소밖에 갈 데가 없다”고 한 말도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김 전 총리는 굴곡과 반전이 이어진 삶을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주도했다. 박정희 정권 2인자로 산업화에 기여했지만, 군부독재 30년의 그늘을 만들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보수대연합을 만들었지만 1997년에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으로 첫 수평적 정권교체에 기여했다. 30대 후반부터 숱한 정치적 곡절을 겪으면서 정치생명을 잃고 되찾기를 반복했다. 권력형 부정부패 원조라거나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갈등을 조장했다는 원죄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면장 집안의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공주중·고를 졸업한 뒤 일본 주오대(中央大)에 들어갔으나 중퇴한 뒤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사범학교 졸업 후 충남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직을 2개월 만에 그만두고 경성제대(서울대의 전신) 사범대에 입학했고, 그해 광복을 맞았다.

1948년 육군 사병으로 복무하다 1949년 1월 육사 8기생으로 입교, 그해 5월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받아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났고, 1951년 박 전 대통령 조카인 박영옥과 결혼했다.

김 전 총리는 35세 때인 1961년 5·16 쿠데타 주동자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혁명공약은 물론 이후 민정이양 스케줄, 정치·사회 개혁 등의 계획서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같은 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창설을 주도하고 1963년까지 초대 부장으로 재임하면서 ‘권력의 2인자’로 떠올랐다. 중정부장 재임 시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에 특사로 파견돼 ‘김·오히라(大平) 메모’를 통해 한·일회담을 매듭지었다.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했지만 ‘혁명 동기들’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4대 의혹 사건’ 당사자로 지목돼 중앙정보부장을 사임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이란 말을 남기며 외유길에 올랐다. 8개월 후 귀국한 그는 1963년 12월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16대까지 9선을 기록했다.

김종필 “정치는 허업”이라던 영원한 2인자…묘비엔 ‘무항산 무항심’

‘김·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2차 외유를 떠났다. 1968년 박정희의 3선개헌에 반대한 것이 빌미가 돼 다시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지만 1971년 국무총리에 기용됐다. 1979년 10·26으로 권력 진공상태에서 공화당 총재에 선출되며 ‘1인자’ 자리에 오르는 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9년 12·12,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이후 신군부는 그를 부패정치인으로 낙인찍으며 재산을 압류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1987년 민주화는 그에게도 기회를 열어줬다. 그해 대선에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출마하며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고, 1988년 13대 총선에서 신민주공화당이 충청권을 석권했다.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와 손을 잡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집권당 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충청 핫바지론’을 앞세워 1996년 15대 총선에서 50석 돌풍을 일으켰다.

1997년 대선에서 다시 ‘킹메이커’로 나섰다. 내각책임제 개헌을 조건으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손을 잡았고, 1998년 ‘DJ 대통령, JP 총리’ 체제의 공동정권이 이뤄졌다. 유신·민자당 정권에 이어 다시 집권여당 실권자로 변신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와도 내각제 개헌, 대북 문제 등으로 갈등을 거듭하다가 2001년 9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 가결을 계기로 결별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자민련 총재 시절인 2001년 12월28일 서울 마포당사 총재실에서 ‘맹자’에 나오는 이화위존(以和爲尊·화합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다)이라는 신년 휘호를 쓴 뒤 뜻을 설명하고 있다.  국회사진공동기자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자민련 총재 시절인 2001년 12월28일 서울 마포당사 총재실에서 ‘맹자’에 나오는 이화위존(以和爲尊·화합하는 것이 가장 존귀하다)이라는 신년 휘호를 쓴 뒤 뜻을 설명하고 있다. 국회사진공동기자단

2004년 총선에서 재기를 노리던 그에게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은 치명타였다. 총선 결과 충남 4석이라는 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마저 낙선했다. 이후 충청권 지역정당으로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이 명멸했지만, 김 전 총리 위상은 예전만 못했다. 말년에는 보수정당의 ‘큰 어른’으로 대접받긴 했지만, 실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는 허업’이라고 했던 그는 스스로 작성한 묘비글 ‘무항산이무항심(無恒産而無恒心·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견지하기 어렵다)’으로 40년 정치 인생의 영욕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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