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인사동 가는 길 묻더니.."덕이 부족한데 같이 가서 제사 지내자"

이승진 2018. 6. 2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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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인에겐 “길 좀 알려주세요” 외국인에겐 “한국 문화 소개해주겠다”
접근 방식 다양해진 ‘도를 아십니까?’
홀로 다니는 외국인 여성들만 불러 세우기도
금전 피해 생겨도 처벌은 쉽지 않아

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문호남 기자)


[아시아경제 이승진 기자] “죄송한데 인사동 가는 방향이 이쪽 맞나요?”

지난 20일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두 여성이 서울 광화문 대로에서 길을 물으며 붙잡아 세웠다.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자 중년 여성은 “초행길이어서 헷갈리는데 조금만 같이 걸어가 달라”고 요구했다. 간절한 요구에 못 이겨 함께 발길을 옮기자 중년 여성이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여성은 “쌓인 업보가 많아 함께 제사를 지내고 덕을 쌓아야 한다”며 “본인이 부담 가능한 금액으로 성의 표시만 하면 제사를 지내주겠다”고 설득했다.

과거 ‘도를 아십니까?’로 유명했던 특정집단이 최근엔 내국인을 상대로는 길을 물으며 접근하고, 외국인에겐 ‘한국 문화를 소개해주겠다’는 등의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단순 포교를 넘어 금전까지 요구해 피해가 이어지고 있지만 피해 금액이 비교적 소액이고 피해자 의지에 의해 비용을 치러 처벌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날 만난 두 여성은 20여분간 끊임없이 설득을 했다. 중년여성은 “이 활동을 10년째 이어가고 있다”며 “나를 통해 제사를 지냈던 모든 분들이 인생에서 막힘없이 잘 풀렸다”고 말했다. 20대 초반 여성에게 ‘정말 좋아서 활동을 하는 것이냐’고 묻자 여성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들은 2인1조로 다니며 선임자가 후임자에게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교육하는 듯 보였다. 이들에게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으니 제사를 지내는 장소를 알려 달라’고 한 뒤 주소를 얻고 헤어졌다.

'공부방'이라고 소개 받은 곳은 과거 웨딩홀로 사용되던 곳으로 2층과 3층에 나뉘어 '덕'을 쌓기 위해 모인 아이들과 성인 수십여명이 있었다.


같은 날 오후 8시 여성이 알려준 서울 성수동의 한 건물을 찾아갔다. 여성이 ‘공부방’이라고 알려준 곳은 예상 밖의 규모였다. 과거 웨딩홀로 사용됐던 건물 입구엔 유모차와 유아용 자전거가 가득했다. 2층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이용하는 공간으로 30여명이 있었고, 성인들이 모여 있는 3층엔 2~3명의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작은 책상을 펴고 3~4명씩 모여 앉아 알 수 없는 책을 보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더욱 모여들었다. 갓난아기를 업고 온 여성부터, 직장을 마치고 온 듯 한 정장차림의 남성까지 다양한 사람이 찾았다. 건물 입구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어떤 공부를 하는 곳인지 물었다. 이 여성은 “조상에게 정성을 드리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정성을 들이는데 비용이 들진 않는지 묻자 여성은 “교회에서도 헌금을 내는데 무슨 문제냐”고 쏘아 붙였다. 이후 공부방을 방문하는 다른 이들의 의심의 눈초리가 커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공부방 2층 신발장에 빼곡히 들어서 있는 아이들과 청소년들 신발.


이들 집단은 2~3년 전부터 외국인 포섭활동에 열중하는 모양새다. 특히, 혼자 다니는 외국인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접근해 우리나라 이미지를 먹칠할 우려가 있어 보였다. 21일 서울 명동 인근 거리를 1시간여 동안 지켜본 결과 여성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포섭활동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같은 단체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둘이 짝을 지어 혼자 있는 외국인 여성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말을 걸고, 이에 화답하면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으면 소개해 주겠다”는 식의 대화로 이어졌다. 일부는 지나가는 외국인 여성의 손목이나 어깨를 갑자기 붙잡고 불러 세워 해당 여성이 깜짝 놀라는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자 피해자들이 페이스북 등 외국인 커뮤니티에 피해사례를 알리며 대처법을 공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포섭활동으로 인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피해사례까지 발생하고 있지만 마땅한 해결책은 없는 상황이다. 외국인에게 ‘문화행사’라고 소개하는 것의 범위가 넓어 외국인을 데리고 가는 것 자체를 사기죄 등 범죄로 보긴 어렵다. 또 돈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이들은 “본인의 능력껏 지불하면 된다”는 등으로 유인하며 돈을 본인의 의지에 따라 지불하게 해 강요죄로 보기에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경찰 관계자는 “이들의 활동 행태가 교묘해 처벌하기 쉽지 않고, 실제 피해를 입었다고 사건이 접수되는 경우도 드문 것으로 안다”며 “본인 스스로가 꾐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피해를 입었다고 판단될 시 진정서를 접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승진 기자 promotion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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