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만 꺼낼 수 있나" 화마 덮친 군산주점 의인 임기영씨

김준희 입력 2018. 6. 22. 00:02 수정 2018. 6. 2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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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알자마자 신속 대응해 사망자 줄여
"주점 부부와는 친형제·자매 같은 사이"
지난 18일 전북 군산시 장미동 한 주점에서 합동감식반이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전날 오후 9시 50분쯤 이모(55)씨가 주점에 불을 질러 3명이 숨지고, 3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뉴스1]


술값 10만원 때문에 주점에 불 지른 방화범

50대 방화범은 휘발유에 불을 붙이기 전 주점 출입문에 걸레 자루를 걸고 비닐봉투로 두 번 묶었다. 불길에 휩싸인 주점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유독가스와 시커먼 연기가 삽시간에 퍼지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불바다가 된 주 출입구 대신 반대편에 있는 무대 옆 좁은 비상구로 몰렸다.

'병목 현상' 탓에 사람들은 서로 뒤엉켜 쓰러졌다. 유독 가스와 연기를 들이마셔 의식을 잃어갔다. 그 순간 유일한 탈출구인 비상구 문이 밖에서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비상구 안쪽에 쓰러진 사람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모여든 다른 이들도 손길을 보탰다. 이윽고 119 소방대원과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33명의 사상자를 낸 전북 군산 주점 방화 사건의 전말이다.

군산 주점에 불을 질러 33명의 사상자를 낸 혐의로 경찰에 긴급체포된 이모(55)씨. [연합뉴스]


불바다 속 '유일한 탈출구' 열어준 화물차 기사

선원 이모(55)씨는 지난 17일 오후 9시 50분쯤 군산시 장미동의 한 라이브카페(유흥주점)에 불을 질러 3명을 숨지게 하고, 30명을 다치게 했다. 경찰은 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혐의로 이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이씨는 경찰에서 "외상값이 10만원 있었는데 주점 주인이 20만원을 달라고 해서 화가 나 불을 질렀다"고 말했다.

그나마 화마가 덮치자마자 누군가 신속히 주점 비상구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사망자는 훨씬 늘어났을 것이라는 게 소방 당국의 분석이다. 그 '누군가'는 군산시 경암동에 사는 화물차 기사 임기영(68)씨다. 불이 난 당시 가게 근처에 있던 그는 불길이 심한 정문을 피해 카센터에 연결된 주점 비상구 문을 제일 먼저 열었다. 평소 주점 주인 부부와 친해 건물 구조를 잘 알고 있던 덕이었다. 주점 안에 있던 아내 김모(62)씨가 걱정돼 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아내를 포함해 7명 이상을 구했다. 유우종 군산소방서장은 "당시 주점 비상구 문을 연 건 임씨가 최초"라며 "임씨가 비상구 쪽에서 (밖으로) 못 나온 사람 7명을 구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주위에서는 임씨를 '의인'이라 부른다. 하지만 정작 그는 "여러 주민들이 협조해서 구했다"며 쑥스러워했다.

조종묵 소방청장(노란 점퍼)이 18일 오후 전북 군산 유흥주점 방화 사건 현장을 방문해 중앙합동조사단에 철저한 조사를 당부하고 있다. [뉴스1]


"각시 구하려다 다른 사람들도 구했죠"

임씨는 2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각시 꺼내려는 욕심에 (주점) 뒷문을 열고 (사람들을) 꺼냈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김씨는 얼굴과 팔 등에 화상을 입고 현재 전남대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임씨 부부와 불이 난 주점을 운영하던 송모(54)씨·전모(55·여)씨 부부는 20년 전부터 친형제·자매처럼 지내온 사이다. 사건 당일도 두 부부는 주점 인근 커피숍에서 함께 커피를 마셨다. 임씨 아내만 사건 발생 40분 전 주점 여주인을 따라 가게에 들어갔다 봉변을 당했다.

임씨에 따르면 조선대병원에 입원한 주점 부부 중 남편 송씨는 겨우 의식이 깨어났으나, 아내 전씨는 위독한 상태다. 임씨는 "우리 각시도 억울하지만 (주점 부부도) 저렇게 돼 마음이 아프다"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은 임씨와 일문일답.

-불이 난 당시 상황은 어땠나.
"당시 주점에서 5m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불이 나서 갔더니 입구가 (불길에 휩싸여) 들어가질 못하게 생겼다. (주점) 뒤로 가서 문을 열고 사람을 꺼냈다. (비상구 문을) 여니 다 쓰러져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느냐. 꺼내다 보니 각시도 구했다. (아내는) 다섯째로 나왔다."

-몇 명을 구했나.
"초기엔 다섯 명을 꺼냈지만, 다들 협력해서 꺼내 몇 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주점 안에 쓰러져 있던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 발로 못 나오고, 나와서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내가 구했다기보다 여러 사람들이 협조해서 구했다. 나도 꺼내고, 다른 사람들도 꺼냈다. 혼자서 큰 길까지 10m를 못 끌고 가지 않느냐. 소방관도, 주민들도 구했다. 119와 경찰 순찰차도 (환자를) 옮기고, 개인 승용차와 택시, 시내버스도 옮겼다."

송하진 전북도지사(가운데)가 19일 전북 군산시 장미동 유흥주점 화재 현장을 찾아 전북소방본부 관계자의 보고를 받고 있다. [뉴스1]
-사람들이 '의인'이라 부른다.
"각시 꺼내려는 욕심에 (주점) 뒷문을 열고 꺼낸 거다. (아내가) 없으니 위부터 꺼내야지. 그래야 밑에 깔린 사람을 찾을 것 아닌가. 사람들이 서로 밖으로 빠져 나오려고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겹쳐 있었다. 대부분 기절한 상태였다. (밖으로) 꺼냈을 땐 신음 소리만 하고 아무 반응도 없었다. 거의 죽은 목숨과 같았다. 사람이 처지니 무거워서 혼자는 도저히 못 든다. 여럿이 도왔다."

-방화범은 봤나.
"석유를 찌끄리는(붓는) 건 못 보고 (한 남성이) 세차장 쪽으로 뛰어가는 건 봤다. 나중에 들으니 '그놈'이 불을 질렀다고 들었다."

-아내와는 왜 같이 술을 안 마셨나.
"나는 술을 아예 못한다. 각시도 술 먹으러 (주점에) 들어간 게 아니다. (주점) 사모(여주인)와 친자매처럼 지낸다. 근처 다방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주점 여주인을) 따라 들어갔다 40분 만에 (방화 사건이) 터진 거다. 그래서 내가 더 억울하다."

-아내 몸은 좀 어떤가.
"오늘 병문안을 다녀왔다. 팔뚝을 붕대로 싸매 놓고, 얼굴도 부분적으로 싸매놨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데, 유독 가스와 연기를 많이 마셔 폐에 그을음이 꼈다. 병원에선 '패혈증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의식은 좀 돌아왔는데, 자가 호흡을 못하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다. 범인이 한 짓이 너무 괘씸하다."

18일 전북 군산시 장미동 유흥주점 화재 현장에서 합동감식반이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뉴스1]
-주점 부부와는 평소 잘 알던 사이인가.

"(부부끼리) 20년 전부터 절친한 선·후배다. 지금은 내 것, 네 것 먹는 게 아니라 (서로) 입에서 빼먹을 정도로 형제간처럼 지낸다. 모임도 같이 하고, 쉬는 날 놀러도 간다. (불이 난) 그날도 일요일이어서 싸드락싸드락(시위적시위적) 주점에 간 거다. (두 부부가)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커피숍이 문을 닫으니 아내가 사모(주점 여주인)와 같이 간 거다. 나는 더워서 (주점) 밖에 있었다."

-주점 부부의 몸 상태는 어떤가.
"(남편) 송씨는 의식이 좀 깨어났는데, (아내 전씨는) 화상도 입었지만 자가 호흡이 불가능해 생사가 불투명하다. 마음이 아프다."

지난 17일 불이 난 전북 군산시 장미동 유흥주점 모습. [연합뉴스]
-화재 당시 비상구 앞을 쇳덩이가 막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제가 열 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문이 열리지 않았겠나."

군산소방서와 군산경찰서에 따르면 해당 주점에서 카센터 쪽으로 난 비상구에서 1.2m 떨어진 위치에 차량 수리용 리프트가 있었다. 유우종 군산소방서장은 "화재 당시 카센터 쪽 비상구 문을 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고, '비상구 앞을 쇳덩이가 막고 있었다'는 주장은 주점 안에 쓰러진 사람들을 밖으로 옮기는 데 리프트가 방해돼 장비 일부를 뜯어내 치운 게 와전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소방 당국의 조치는 어땠다고 보나.
"잘했다. 죽은 사람이 별로 없지 않나. 제천 화재와 비슷한데, (불이 난) 주점 건물이 1층에 있어서 사람들을 빨리 구할 수 있었다."

군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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