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라이카에 담긴 폐허의 남대문, 아버지의 한국전쟁 기록

2018. 6. 2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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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3대 사진가 임인식·정의·준영, 한국사 80년 ① 전쟁과 평화, 국방부 사진대 대장 임인식의 한국전쟁 사진 최초 공개

1950년 9월28일 서울 수복 당시 폐허가 된 남대문 모습. 한국전쟁 때 종군 사진대 임인식 대장이 한국전쟁 중 찍은 4만5천여 점의 사진·필름 중 하나로, 최초로 공개한다. 임정의 제공

“서울 거리는 술렁거리고 갈팡질팡. 신문호외 가두방송. 우리 정예부대 적 격퇴 중”

기울어진 글자에 긴장감이 역력하다. 1950년 6월26일치,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 임인식(1920~1998)의 종군일기다. 이틀 전만 해도 임인식은 한강 모래사장에서 동료들과 해 질 녘까지 ‘서머타임’을 즐기며 ‘어린아이들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일요일 아침, 임인식은 ‘나의 유일한 무기’라 했던 독일제 라이카 스리에프(Leica 3F) 카메라에 렌즈 2개를 들고 전선에 합류했다. 사진이 집안의 대를 잇는 숙명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1950년 10월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이 찍은 북진하는 유엔군 탱크 사진. 농민이 평화롭게 농사를 짓는 모습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임정의 제공

“삼각지 지날 무렵 천지진동 폭음이”

1950년 6월25일 아침, 임인식은 비상소집 회의가 열린 명동 정훈국에 도착했다. 정훈국장이 북한군 공격으로 개성지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어수선했다. 임인식은 각 신문사 기자들을 데리고 문산으로 출동했다가 길이 막혀 서울로 돌아와 호외를 뿌렸다.

6월27일 밤, 서울은 정전으로 암흑이 됐다. 굵은 비까지 쏟아졌다. 임인식은 천지진동하는 폭음 속에서 후퇴 중 삼각지 자신의 집 앞을 지나다가 가족들 생각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6월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모두 폭파돼 발이 묶였다. 임인식은 한강으로 몰려드는 피난 행렬부터 사진에 담았다. 버려진 나룻배를 건져 피난민들과 간신히 강을 건넜는데, 돌아보니 사진대원들은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6월29일, 영등포 한강방어선에서 자격지심에 계급장을 뗐다. ‘다리가 폭파되지 않았다면 수많은 서울 시민들과 군인들이 살았을 텐데….’(6월29일치 일기 중) 임인식은 안타까웠다. 돌아갈 길은 모두 막혔다.

“비통, 애통, 그런 거지. 임무는 다 해야 하니 가족을 먼저 챙기진 못하고…. 우리 가족은 3개월 동안 지하에 숨어 있다가 국군이 다시 올라왔을 때 기적처럼 만났어요.” 당시 여섯 살이었던 임인식의 아들 임정의(73)가 아버지가 남긴 종군일기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임인식은 이후 1952년까지 진군과 퇴군을 반복하며 셔터를 눌렀다. 국방부 사진대를 이끌고 주둔하는 도시마다 사진관을 먼저 접수해 필름을 현상하는 것은 그의 임무였다. 임인식은 함께 다닌 <에이피>(AP) 통신의 신화봉 도쿄지국 특파원(도쿄지국장)에게 사진을 전달해 외신에 보낼 수 있도록 했다.

1950년 10월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이 찍은 폐허화된 남대문 주변 시가지의 모습. 임정의 제공

“아버지는 학도병 사진 죽을 때까지 바로 보지 못했어. 그만큼 애달파했어요”

“결국 한 집안에 한국전쟁 시작부터 휴전까지 사진이 다 남은 거예요. 50년 8월 경북 월성에서 교복 입고 전선으로 배치된 ‘군번 없는 학도병’들을 찍었는데, 아버지는 눈감는 날까지 그 사진을 바로 보지 못했어. (어린 학도병의 출병과 죽음을) 애달파했어요. 당시 어린 내가 잠깐 사진들을 본 적이 있어요. 끔찍한 것이 많았어요. 훗날 아버지가 사진 중 일부를 한데 모아 정리하기도 했어요. 자식들한테 워낙 엄해서 속내는 잘 안 보이셨지만, 분명 말도 못 하고 여러 가지로 괴로웠겠지.”

임인식의 사진첩에는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 모습이 유독 생생하게 남았다. 화염에 사라진 종로 보신각, 부서진 동대문과 남대문 거리, 지게를 지고선 어딘가로 부단히 걸어가는 사람들의 흑백사진들…. 집으로 돌아와 잔해 속에서 무언가를 골라내다가 카메라와 마주치곤 물끄러미 바라보는 피난민들, 청량리역 열차에 매달린 행렬들, 교복을 차려입고 바삐 걷는 여학생들, 녹번동에서 수습 중인 이름 모를 주검들…. 그 옆에 늘 임인식이 있었다.

1950년 10월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이 찍은 폐허화된 서울 시가지 모습. 폐허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줍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임정의 제공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임인식의 이름

임인식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1944년 스물넷 젊은 가장은 가족들과 상경해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에 가면 사진으로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해방 무렵,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던 라이카 카메라를 장만해 목숨만큼 귀중하게 여겼다. 같은 해 삼각지에 ‘한미사진기점’을 차렸다가 해방 후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 특2반으로 입교했다.

임인식이 1950년부터 1952년까지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으로 종군하던 중 1950년 7월10일 충남 연기군 전의 부근에서 촬영한 ‘손이 뒤로 묶인 채 학살당한 미군 사진’이 <에이피> 통신을 통해 7월12일자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지에 실렸다. 이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외신에 알린 ‘최초의 사진’이었다. 미 전역이 뒤집혔다. 사진을 보고 죽은 아들을 알아본 어머니로부터 바다를 건너 편지도 왔다. 임인식은 기사와 편지를 앨범에 넣어 평생 간직했다.

1951년 1월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이 찍은 서울역. 혹한 속에서 피난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임정의 제공

임인식은 1952년 육군 대위로 예편하고 6월1일 남대문로에 ‘대한사진통신사’를 차렸다. “군인이 전시 중 예편은 있을 수 없는데, 아버지는 군에서 찍는 사진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자유롭게 본인의 사진을 찍고 외신과 교류하길 원했어요.” 임정의가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그때부터 뒷면에 ‘케이피에스’(KPS: Korea Photo Service·대한사진통신사) 파란색 도장을 박은 사진이 외국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거리로 나가 사진을 찍어오면 가족들은 삼청공원으로 나가 ‘수세’(네거티브 필름을 현상·인화한 뒤 필름을 씻는 일)를 하고, 건조를 했다. 집 안은 곧 암실이었다.

한국전쟁기간중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오른쪽 세번째)이 전쟁중 제대한 뒤 1952년 6월1일 설립한 대한사진통신사 앞에서 개업 기념으로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임정의 제공

임인식은 ‘최초’란 수식어를 여러 개 달았다. 대한사진통신사 최초 설립, ‘항공사진’을 최초 촬영한 민간인, 훗날 인사동에서는 ‘사진화랑’을 최초로 개업한 사진가로 기록에 남았다. 그 밖에도 ‘을지로에서 사죄하는 일본인들’(1945), ‘서울 효창공원 백범 김구 선생 안장식’(1948), ‘대한민국 정부수립행사’(1948) 등 해방 공간부터 굵직한 기록물을 찍어왔으나 어쩐지 이름 석 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 베트남전쟁까지

한국전쟁은 임인식 인생에 ‘큰 회한’을 남겼다고 했다. “신의주까지 북진해 고향인 평북 정주 근처까지 갔는데, 부모님을 못 모시고 코앞에서 후퇴한 거예요. 아버지는 그게 그렇게 절망적이었다고 해요. 생전 명절만 되면 북에 둔 가족들 생각에 애통해하고 괴로워했어요. 거기다 21대 장손이었거든.” 임정의의 말이다.

1953년 서울역 앞에서 피해 복구 중인 서울 시민들.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이 찍은 것이다. 임정의 제공
1954년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서울 명동에서 복구 작업하는 인부들과 건물 옆을 지나는 여인. 국방부 정훈국 임인식 사진대장이 찍은 것이다. 임정의 제공

육사를 졸업했던 임인식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당시 ‘한자리 맡으라’는 제안을 거절한 뒤에도 쿠데타에 동참하라는 군사정부의 압박을 받았다. “정치와 결탁은 있을 수 없었지요. 평소 사진과 기록만이 본인의 업이라고 생각하셨으니까. 프로 의식 같은 게 있으셨어요.”

권유를 뿌리치면서 임인식이란 존재도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갔다. 살길이 막혀 미국 이민을 가려다가 장남 임정의의 군입대 문제가 걸려 창신동에 쪽방 한 칸을 얻어 살았는데, 잡일을 하고 수입산 식용 토끼를 키우면서 온 가족이 연명했다. 임정의는 아버지를 무서워했지만 “그거 좀 타협하면 안 되냐”며 대들었다. 임정의는 1961년을 가장 힘들게 회고했다.

“아버지가 훗날 자리에 누워 마지막에 한 말씀이 ‘정의야, 펜과 종이를 가져와라’였으니까. 늘 일기를 쓰셨어요. 하여간 뭔가에 늘 앞서서 살고, 기록 관리에 지독한 사람이었어요.” 임정의가 풀 먹는 토끼 사진을 내보이며 “다 같이 끔찍했던 시절의 이야기”라며 사진가로서 가난한 삶을 전했다.

임정의도 아버지처럼 ‘사진 외길’을 걸었다. 서울 광진구 외곽에 터를 잡은 뒤 1970년부터 한국방송(KBS), <코리아헤럴드>를 거쳐 (주)공간사 사진부장을 지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6년 군에 입대해 국방부 정훈국 촬영병으로 복무했는데, 베트남 파병을 지원했지만 ‘집안 장손’이란 이유로, 남동생이 대신 갔다.

“월남에서 죽으면 비행기에 싣고 와요. 전사한 장병들을 관에 넣어 얼음주머니로 채워서. 일주일에 한두 번,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할 때마다 <국방뉴스>에서 내가 그걸 촬영하는 거예요. 많은 장병이 죽어서 왔어요. 쏟아지듯이. ”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였다. “월남 패망 후 아버지가 앞마당에서 사진을 일부 태운 기억이 있어요. 얼핏 봤는데 끔찍한 거예요…. 우리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멸공통일’을 외치던 국가는 임정의가 제대한 1969년 무렵부터 ‘잘살아보세’를 외치고 있었다. 서울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임정의는 70년대 전후 보도사진을 찍다가 1975년 공간연구소에서 건축가 김수근을 만나 ‘광복 30주년 종합전시관’ 프로젝트 사진 총감독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일이 몸에 잘 맞아 ‘건축사진’을 업으로 삼고 1978년 ‘청암사진연구소’를 차렸다.

“그 시대, 서울에 많은 것들이 너무 쉽게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다 밀어버리더라구. 어딘가 재개발이 들어간다는 소문을 들으면 허물어지는 동네마다 찾아다녔어요.” 임정의는 70년대 서울 달동네, 80년대 행정수도 이전계획안 모형 촬영, 88서울올림픽 경기를 앞둔 서울 도시재개발 사업 건축설계 경기에 참여하면서 건축전문사진작가로 자리잡았다.

임정의는 1976년 아들 임준영(42)을 낳았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그해 서울 인구는 725만5천여 명, 한국전쟁 직후인 1952년과 비교해 열 배나 불어 있었다. 임준영이 입대한 1996년에 서울 인구는 이미 1천만 명을 넘었다. ‘반공’과 ‘멸공’ ‘새마을운동’도 기억에서 빠르게 밀려났다.

3대 임준영 “할아버지·아버지가 찍은 판문점, 나도 찍고 싶어요”

3대 사진가가 말하는 ‘전쟁과 평화’

임준영도 아버지처럼 촬영병으로 군 복무를 했다. 어땠을까. “대체로 평화로웠어요. 물론 훈련은 힘들었지만, 큰일 없이 평범했어요. 그저 전우애만 돈독히 쌓았던 것 같아요.” 필름카메라와 디지털카메라 세대의 간격만큼이나 임준영에게 ‘전쟁’은 어느새 먼 이야기였다.

1999년 제대한 임준영은 뉴욕으로 8년 동안 유학을 떠났다. 그 후 아버지처럼 건축전문사진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아버지가 사실 그대로 도시사를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해왔다면, 임준영은 실험과 창작을 허용하는 ‘예술사진’에 무게를 두었다. 작업을 인정받아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2018 독일 디자인 어워드’ 건축 사진 부문에서 ‘위너’(winner)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 4월의 봄, 임준영은 생애 처음으로 선대의 캐비닛을 열었다. 임준영은 평생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어려워하며 컸다고 한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눠본 일이 드물다고. 어렸을 때 카메라도 못 만지게 했던 아버지였다. <서울&>에 ‘3대 사진가의 기록’을 연재하기 위해 캐비닛에서 시대의 한 장면씩을 꺼내 보고 있는데, 하루는 판문점 ‘평화의 집’ 사진을 발견했다고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1990년 촬영하신 판문점 ‘평화의 집’ 완공 사진이 캐비닛에서 나온 거예요. 할아버지가 50년대 판문점에서 촬영하신 필름도 남아 있거든요. 평화의 집은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 처음 본 거죠. 저는 그 사진들이 ‘기록물’(다큐멘터리 사진)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여겼어요. 그때 문득 ‘나도 평화의 집에 가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 당장은 접근이 힘들지만, 금방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애초 전쟁이라는 소재에 큰 관심이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고, 청암사진연구소의 캐비닛에 ‘거북함’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었던 임준영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카메라에 담긴 한국 현대사의 현장을 마주하기 시작한 듯하다.

임준영은 세대 변화를 거쳐 우리나라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지 않겠느냐며, 앞으로의 작업이 기대된다고 했다. “사진을 보면 부모 세대가 저희를 위해 노력해오셨다는 걸 알게 되잖아요. 저는 서울이 과거보다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느껴요. 건물도 마찬가지죠. 한국이 전쟁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도 있고, 새로 지은 건물도 있고, 과거에 지은 건물이 리모델링을 통해 재탄생도 하고. 일반 사람들은 전쟁 중에도 일상을 살아갔듯, 오늘날 사람들도 아침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며 바쁘게 살아가죠. 제 아이들이 어른이 될 즈음엔 분명 지금보다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살아갈 거예요.”

기억을 딛고, 손잡고 선을 넘는다

지난해 11월 중순, 청암사진연구소는 설립 40년 만에 ‘보유자료 기록화’ 작업에 들어갔다. 청암사진연구소 설립 후 몇 번의 자료 공개 의지가 좌절된 뒤 세상과 ‘적당한 선’을 긋고 지내던 참이었다. 청암사진연구소는 별안간 ‘전쟁터’가 됐다.

임정의는 죽은 필름 더미들 사이에서 산 필름을 건져내고, 애써 묻은 과거의 기억을 직면하는 것이 쉽지 않은 듯했다. 결국 청암사진연구소에 겹겹 쌓인 상자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을 가까이서 목격한 사진가들의 대를 물린 증언이었다. 1950년 전후 ‘한국전쟁’ 관련 작업에만 꼬박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지난 5월, 임인식의 ‘잊혀진 상자’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군인들의 젊은 날 초상사진 200여 점이 새로 나왔다. 일부는 자손들과도 연락이 닿았다. 확인 결과 청암사진연구소가 보유한 사진과 필름, 자필 편지 등 기록물 등은 총 50만 점으로 추정됐다.

1951년 1차 휴전협정 당시 개성 내봉장에서 인민군 병사(가운데)와 환담하는 임인식(오른쪽)과 대한사진통신사 취재부장이었던 문재안 기자(왼쪽). 2008년 펴낸 <우리가

본 한국전쟁>에 수록된 사진으로 신문지면 공개는 처음이다.'>

지난 6월12일부터 15일까지 청암사진연구소는 <서울&> 지면에 실을 사진을 별도로 스캔했다. 신문지면 최초 공개 사진들이다. 결국 “태울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겨우 살아남은” 기록물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청년들이 할 일이 있겠지. 역사를 제대로 아는 건 중요한 일이거든.” 임정의는 장고 끝에 ‘응시의 고통’을 택하기로 했다. 세대 간에 거의 단절된 채로 지내던 아버지와 아들의 악수까지 반년이 걸렸다. 선 너머 저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손을 잡고선 그 선을 넘어보기로 했다.

기획·글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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