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페미 정치를 만나다

2018. 6. 2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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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서울 신지예·제주 고은영 페미니스트 후보 선전

정치판 유리천장 깨는 과감한 여성할당제 도입해야

선거 유세 중인 고은영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왼쪽). 6월6일 서울 수서경찰서 앞에서 선거 벽보 훼손에 대한 경찰의 적극적 수사를 촉구하고 있는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연합뉴스/ 한겨레 박종식 기자

‘#투표용지에_여성정치인’.

지방선거 투표일인 6월13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타임라인을 가든 메운 투표 인증사진 행렬 가운데 ‘#투표용지에_여성정치인’이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이 잇따라 올라왔다. 자신의 지역구에 여성 후보가 없을 경우 투표용지에 ‘여성정치인’이라고 써서 무효표로 만들자는 목소리였다. 빨간펜을 들고 찍거나, 투표소 팻말 주변에 ‘여성정치인’이라고 쓴 종이를 붙여서 찍는 등 인증사진이 이어졌다. “왜 사표를 만드느냐”는 비판엔 “무효표도 정치적 선택이자 의사 표현”이라는 반박이 이어졌다.

#미투와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등을 통해 터져나온 여성들의 목소리가 6·13 지방선거에서 ‘여성정치인’과 ‘여성정치’란 키워드로 옮겨간 것이다.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혐오에 분노를 터뜨린 이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성들을 대변하는 정치가 필요하다”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문제의식’에 다시 공감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의당 제치고, 자유한국당 넘었다

지방선거에서 ‘여성’과 ‘페미니즘’을 공론장에 끌어낸 것은 신지예(28)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다. 거대 양당의 50~60대 남성으로 대표되는 한국 정치에서 처음 ‘페미니스트 정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가 페미니즘을 꺼내들자 ‘남성 중심 정치’는 바로 거부반응을 보였다. 선거기간에 선거 벽보가 27차례 훼손됐다. “칼로 가슴을 도려내고 싶다” “쇠파이프로 머리를 때리고 싶다” 등의 메시지와 댓글이 그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됐던 지방선거에서 어떤 후보보다 주목받았고, 8만2874표(1.7%)를 얻었다. 1.6%(8만1664표)를 얻은 김종민 정의당 후보를 제치고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인, 김문수 자유한국당 후보, 안철수 바른미래당 후보에 이어 4위에 올랐다. 지난해 대선에서 유일한 여성이던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방송 토론회를 거치며 20~30대 여성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았던 것처럼 신 후보 역시 ‘벽보 논란’으로 20~30대 여성들의 지지를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내세운 ‘성평등계약제’(서울시와 계약한 모든 기업, 기관, 시민단체에 성평등 이행각서 제출 의무화), ‘불법촬영 피해자 지원’ ‘낙태죄 폐지 찬성’ ‘젠더건강센터 설립’ 등의 공약은 모두 최근 여성들이 분노를 터뜨리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신 후보뿐만 아니라 여성인 고은영(33) 녹색당 제주도지사 후보도 3.5%(1만2188표)를 얻어 자유한국당 김방훈 후보(3.3%)를 제치고 3위를 차지하며 이변을 보였다.

신 후보는 지방선거 다음날인 6월14일 통화에서 “2016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낙태죄, 혜화 시위 등 여성문제에 대한 목소리는 오랫동안 나왔지만 정치권에선 제대로 된 해결책 대신 미봉책만 제시해왔다”며 “페미니즘을 지지하거나 페미니스트인 분들은 그동안 ‘나를 대변하는 정치가 없다’고 느껴왔다. 정치인이 페미니스트가 되면 ‘내 삶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 ‘이런 정책이 나올 수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 페미니스트 정치의 시작점은 제로가 아니라 1.7%다. 2018년 지방선거는 페미니즘 정치의 용감한 첫걸음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지방선거 전후로 터져 나온 여성들의 문제 해결 요구를 정부도 외면할 수 없었다. 정부는 6월15일 교육부·법무부·행정안전부·여성가족부·경찰청 등 5개 관계부처 합동으로 불법촬영(몰카) 범죄를 근절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특별 메시지를 발표했다. 신지예 후보의 ‘성평등 계약제’ 공약과 비슷한 공약을 내기도 했던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도 공공기관과 위탁 계약을 체결할 때 표준계약서에 성평등 조처 강화, 성폭력 대응 체계 강화를 강제 조항으로 넣어 이행하지 않을 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더불어남자당’의 한계

녹색당 여성 후보들의 도전이 주목받고, ‘투표용지에_여성정치인’이라는 해시태그가 나온 배경을 이해하려면 중년 남성으로 가득한 지방선거 공보물과 벽보로 눈을 돌려야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통계를 보면 6·13 지방선거 전체 후보자 중 여성 후보자는 총 1307명으로 전체의 16.2%에 그쳤다. 광역단체장 후보 중 여성 비율은 8.5%, 기초단체장 후보 중 여성 비율은 4.7%다. 지방선거 초기 민주당이 전국 17곳 광역단체장 후보를 확정한 뒤 공개한 ‘후보지도’에 여성이 한 명도 없어 ‘더불어남자당’이라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 당선 여부를 따져봐도 남성 중심 정치의 공고한 벽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선거(7회)를 포함해 1995년 1회 지방선거가 시작된 이래 여성 광역단체장 당선인은 한 명도 없다. 선관위 통계를 보면 1~6회 지방선거 당선인 2만6413명 가운데 여성 당선인의 비율은 9.4%(2496명)에 그쳤다. 선관위는 “전체 여성 당선인의 99%가 지방의원선거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공직선거법에서 비례대표 지방의원선거에서 50% 이상을 공천하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전체 당선인(3993명) 가운데 여성은 1068명(교육감·교육의원 제외)으로 26.7%를 보였지만, 역시 약 90%가 기초의회 당선인들이다. 전국 226명을 뽑는 기초단체장 선거에선 모두 35명의 여성 후보 가운데 8명이 당선돼 2014년 지방선거(9명)보다 1명이 줄었다.

물론 “여성 정치인이 없다”는 목소리는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의 수가 늘어야 한다는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미투 운동 등으로 여성이 스스로 말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라며 “이번 선거가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정치가 우리의 영역이어야 되겠구나, 그래야 문제가 해결되겠구나’라는 의식을 환기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국회젠더불평등연구팀이 <한국일보>와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국회입법조사처와 공동으로 실시해 지난해 7월 공개한 ‘20대 국회의원 정치 대표성 인식조사’를 보면 여성 의원의 가장 큰 관심 분야는 여성·복지·노동이었다.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여성 후보들도 여성의 안전과 육아·일자리 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공약을 내놓았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부대표는 “여성 의원 비율이 높아진 17대 국회부터 남성 정치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던 여성·보육 등의 법안 발의가 늘어났다. 남성 의원들도 그걸 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스웨덴 여성 정치인 비율 40% 넘어

이에 대해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등 기존 거대 정당은 “경쟁력 있는 여성 후보가 없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조직과 인맥이 좌우하는 지방선거에서 동창회, 향우회 등 끈끈한 ‘남성 네트워크’를 여성이 자력으로 넘어서기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서 현재 권고사항인 정당의 ‘지방선거 여성 후보 공천 30% 할당’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스웨덴에선 1990년대 초반부터 정당들이 각종 선거에서 여성 후보 공천 할당제를 적극적으로 실천해 현재 여성 정치인 비율이 40%가 넘는다. 능력이 떨어지는 여성 정치인이 당선된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할당제 도입 뒤 의원들의 자질이 동반 상승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권 부대표는 “스웨덴의 경우 기존 남성 정치인들이 위기를 느꼈고, 이 과정에서 능력 있는 정치인들이 선출된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할당제의 효과다”라고 설명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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