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책방]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

박예원 입력 2018. 6. 19. 07:00 수정 2018. 6. 1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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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난세에 홀연히 나타나는 걸까요. 이순신 장군이나 김연아 선수를 떠올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답할 것 같습니다. 주변의 무지와 시기를 딛고, 타고난 재능으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는 존재가 천재라고요.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밤이라도 유전자의 축복을 받은 누군가가 출현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각자의 신에게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를 한 단계 도약하게 할 천재를 내려주세요.”

"천재는 특정 시기에 특정 도시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이 책의 전제는 다릅니다. 천재는 드문드문 한 명씩, 우연히 출현하지 않았다는 거죠. 대신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장소에서, 유전이 발견되듯 그야말로 '터져 나왔'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저자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아테네, 피렌체, 항저우, 에든버러, 콜카타(캘커타), 빈 그리고 실리콘밸리로 떠납니다. 꿈꾸는 휴가지 목록이 아닙니다. 이번만은, 천재 제조법을 찾기 위한 여정입니다.

천재는 무작위로-한 번은 시베리아 다음번에는 볼리비아 같은 식으로-나오는 게 아니라 무리지어 등장한다. 천재는 군집한다. 기원전 450년 아테네가 그랬고 서기 1500년 피렌체가 그랬다.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에서 명석한 정신과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가 풍성히 배출되었다...이 천재 집단의 성향은 한 가지일까, 여러 가지일까? 이런 장소들의 공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을 텐데 그건 같은 것이었을까 다른 것이었을까?

높은 교육수준, 깨끗한 환경,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생각하셨다면 틀렸습니다. 천재를 낳은 그때, ‘그 도시’들은 더럽고 공교육은 보잘것없었으며 심지어 주권을 빼앗긴 직후이기도 했습니다. ‘질서정연’은 우리에게 필요한 재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냥 어수선해서 천재들이 쏟아진 것도 아닙니다. 저자는 ‘그 도시’의 거리와 박물관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천재들의 집이나 작업실에서, 또 도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사는 현대의 사람들을 통해서 천재가 쏟아지는 조건을 밝혀갑니다.

수많은 천재를 낳은 도시들의 비밀은?

분명 ‘그 도시’들에는 개성이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얘기해봅니다. 아테네는 개방성, 항저우엔 전통이 있었죠. 피렌체엔 돈, 에든버러에는 실용의 정신, 콜카타엔 동서양의 충돌에서 나온 수많은 우연이 있었습니다. 빈에는 커피숍과 유대인이 있었고요, 실리콘밸리에는 낙천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도시에 살던 천재들은 나 말고 또 다른 천재를 가까이 느끼고 자극받으며 살아간 데다 –모차르트와 베토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천재를 알아보는 청중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갸우뚱해집니다. 매력적인 도시들은 지금도 곳곳에 있는데, 사실 어떤 도시에 가도 그럴듯한 매력 하나쯤은 얼마든지 꼽을 수 있는데 왜 ‘그 도시’들만 천재를 쏟아냈을까요. 저자도 이런 모순을 순순히 인정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때 그 도시의 특징과 거기 살았던 천재들의 모습을 함께 살피는 ‘두 단계 작전’으로 나아갑니다. 결론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특성과 도시의 조건이 만나는 그 중간쯤에서 ‘로또’가 터진다는 겁니다. 아주 사소한 조건 하나만 어긋나도 로또는 꽝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 도시’들에 특별한 게 있긴 있었지만 그 조건을 완벽하게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천재 제조를 위해 도시에 뭘 얼마만큼 언제 넣었는지는 신만이 아니까요.

천재를 순전히 내면적 현상으로 여기는 태도가 지나친 단순화인 것과 마찬가지로 천재를 특정한 시간과 장소의 직접적 산물로 여기는 생각도 오해다. 빈이 모차르트를 ‘생산한’ 것은 도요타가 신차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르다. 장소와 천재의 관계는 그보다 더 복잡하고 더 치밀하게 얽혀있다. 더 친밀하다.

따라서 황금기의 개별 요소를 살필 수는 있지만 그런다고 언제 어디서 황금기가 나타날지 예측할 수는 없다. 작은 투입이 크고 뜻밖의 산출로 부풀어 오르지만, 어떤 작은 투입이 가장 중요한지는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모든 나비가 허리케인을 일으키지는 않듯, 흑사병이 창궐한다고 반드시 르네상스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천재의 비밀을 찾는 동안 찾아오는 '통찰'

허무하죠. 압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권할만한 이유는 있습니다. 천재를 쫓아가며 우리는 ‘재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태도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천재는 오로지, 그걸 알아봐 줄 감별사가 있는 데서만 나타날 수 있죠. 창의적인 재능이라는 건 ‘아니오’를 외칠 수 있는 문화에서만 꽃핍니다. 설사 그 ‘아니오’가 말도 안 되는 논리에서 나온다고 해도, ‘아니오’라고 외치는 집단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집단과 다릅니다. 돈? 천재 나는 게 그만한 게 없습니다. 실패를 딛게 해 주는 건 돈이죠. 대체 우리 회사에 왜 인재가 없지? 라고 묻는 사장님에게 이 책을 권해주셔도 좋을 겁니다.

자신이 뭔가를 ‘못한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나 정도면 훌륭하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 메디치가의 후원 철학이 “명백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골라 그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는 것”이었다는 사실. 독창성은 사실 원천을 지우는 기술, 그러니까 모방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비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뛰어넘지 못하는 제자는 이류다”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언. 이런 사소하지만 반짝이는 통찰이 책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운전 실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는 평균 이하여야 한다.) 우리 중에 왜 천재 아닌 사람이 더 많은지도 이로써 설명된다. 모든 도약의 첫 단계는, 도약이 필요함을 깨닫는 것, 자신의 앎이 불완전함을 깨닫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속속들이 의식적인 무지'라고 이름 붙인 이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보다 창조적 도약을 해낼 가능성이 크다.

위험을 감수하는 전통은 예술계에도 흘러들었다. 부유한 후원자들은 승산이 낮은 말에 돈을 걸었다. 미켈란젤로와 시스티나 성당이 그 좋은 예다.…물론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대부분 소품이었으며 프레스코화는 거의 없었고 규모도 훨씬 작았다. 하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로 낙점했다. 교황은 메디치가의 후원 철학을 따랐다. 명백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골라 그에게 불가능한 임무를 맡기는 것. 그가 그 임무에 어울리지 않더라도. 그가 그 임무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더더욱.


우리 사회에, 우리 회사에 천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천재가 나오는지 알게 되면 더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제가 천재일 것 같아서도, 천재를 키우고 싶어서도 아니고 천재의 덕을 보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그저 사람이 이끌어가는 진보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제보다 내일이 낫길 바라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 제목을 보고 저와 같은 이유로 흥미를 느끼셨다면, 결론이 좀 허무하더라도 읽는 경험이 시간 낭비로 느껴지진 않으실 겁니다. ‘맛있는 라면을 끓이는 법’을 보다 보면 라면이 먹고 싶어지는 것처럼, 이 책을 읽다 보면 창의성과 재능을 다시 한 번 원하게 됩니다.

두꺼운 책을 다 읽기 힘에 부친다면 피렌체 편만 우선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내 자녀를 천재로 키우고 싶어서 읽으시려거든 ‘후기’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다만 “국영수 위주로 열심히 공부하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릴 거라고 미리 말씀드립니다.

천재가 아니라도 당신은 '천재를 알아볼 청중'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진짜 천재들은 아마 이런 책 안 읽겠지요. 그럼 좀 어떤가요. 서점의 수많은 책 사이에서 이 책을 꺼내 재미있게 읽을 당신은, 적어도 천재적인 창조성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입니다. 내 능력이 충분히 뛰어나다고 우쭐대는 게 아니라 나보다 더 뛰어난 누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가짐으로써 이 도시 서울은 적어도 천재가 태어날 한 가지 조건은 갖춘 셈입니다. 천재를 알아보고 천재에 열광할 청중이요.

『천재의 발상지를 찾아서』에릭 와이너 지음, 노승영 옮김, 문학동네, 2018년 5월

박예원기자 (ai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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