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이 탐냈던 '이상의 얼굴'

2018. 6. 19.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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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켜올라간 눈매에, 허연 파이프 담배를 물고 '삐딱하게' 정면을 쏘아보는 이 남자.

오늘날 많은 이들은 이 그림을 통해 <오감도> <날개> 로 기억되는 이상의 기인 같은 풍모를 떠올리곤 한다.

때마침,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초대주간을 맡아 발간할 예정이던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에 한국 문학사의 숨은 대가들 초상을 싣기로 하고 그림을 구하고 있었다.

전해듣고 반색한 이어령은 당장 그림을 사겠다며 50만원짜리 수표를 건넸는데, 이구열은 고심 끝에 사양하고, 미술관을 다시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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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운명] ③ 구본웅의 걸작 '친구의 초상'
구본웅이 '절친' 이상 그린 1935년 작품
유족 뒤늦게 '발견' 이경성·이구열 찾아와
이어령 사려했지만 결국 국립미술관으로
72년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 실려 유명세

[한겨레]

화가 구본웅이 1935년 그린 <친구의 초상>. ‘우인상’으로도 불리워온 이 작품은 작가의 절친이던 문인 이상(김해경)의 기인 같은 몰골을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에 실려 처음 공개된 이래 대중에게 이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유명해졌다.

치켜올라간 눈매에, 허연 파이프 담배를 물고 ‘삐딱하게’ 정면을 쏘아보는 이 남자. 그는 누구인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전시실에 내걸린 화가 구본웅(1906~1953)의 1935년작 <친구의 초상>은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로 일컬어지는 문인 이상(1910~1937)의 몰골을 담고있다. 이상이 일본 도쿄에서 요절하기 2년 전, 연상 친구 구본웅의 캔버스 앞에서 내보인 모습이다. 검붉은 색조로 뒤덮인 바탕 화면에서 이상은 허름한 푸른빛 모자·작업복 차림으로 그늘진 얼굴에 냉소와 경멸, 울분의 정서를 토해낸다. 야수파·표현주의풍의 날선 채색과 거친 필치로 옮긴 형상 구성이 특출하다. 식민지 예술가, 지식인들의 짓눌린 내면 의식이 단박에 느껴지는 초상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이 그림을 통해 <오감도><날개>로 기억되는 이상의 기인 같은 풍모를 떠올리곤 한다.

구본웅과 이상은 인왕산 기슭에서 자랐다. 신명소학교를 함께 다닌 것을 인연으로 평생 친구로 지냈다. 총독부 건축기사를 그만두고 낭인이 된 이상을 구본웅은 친형처럼 보살폈다. 부친이 만든 출판사에 이상을 취직시켰고, 황해도 배천 온천에 휴양여행을 떠나거나, 문예지 <청색지>에 이상 사후 유작을 싣기도 했다. <친구의 초상>은 이런 끈끈한 인연을 업고 그려졌다. 일설에는, 소공동에 구본웅이 차린 골동점에서 창작돼 이상이 운영한 종로 제비다방에 내걸렸다고도 한다.

1972년 10월 나온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 푸른색조의 배경에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도판을 실었다. 이상을 그린 초상화로는 당시 처음 공개된 작품이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친구의 초상>은 두 사람이 별세한 뒤 한참 지난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이 끝난 뒤 세간에 처음 알려졌다. 구본웅 작품들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대부분 사라졌고, 남은 작품들도 집안에 내력을 모른 채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 소식을 들은 유족들이 뒤늦게 작품들을 미술관 쪽에 들고와 매입을 타진했지만, 구본웅이 누군지도 몰랐던 공무원들은 구입예산이 없다며 외면했다. 애가 탄 유족들은 전시 기획위원이던 평론가 이경성과 당시 <서울신문> 이구열 기자에게 작품중 이상의 초상이 있다면서 사정을 알렸다.

때마침,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초대주간을 맡아 발간할 예정이던 <문학사상> 창간호 표지에 한국 문학사의 숨은 대가들 초상을 싣기로 하고 그림을 구하고 있었다. 이구열은 친했던 <문학사상> 편집장에게 이상 초상이 있다고 귀띔했다. 전해듣고 반색한 이어령은 당장 그림을 사겠다며 50만원짜리 수표를 건넸는데, 이구열은 고심 끝에 사양하고, 미술관을 다시 설득했다. 이씨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미술관서 안산다니까 <문학사상>에 알렸던 거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구본웅 대표작들은 너무 적고,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해 반드시 미술관에 있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수표를 물렸습니다.”

화가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척추장애로 체구가 작았던 구본웅과 키가 훨씬 크고 비썩 마른 이상이 함께 경성 시가를 거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됐다고 전해진다.

이경성, 이구열의 설득 끝에 당시 장상규 미술관장은 특별예산을 편성해 <친구의 초상><나부>를 포함한 구본웅 유작 8점을 72년 연말 사들였다. 이어령은 수중에 들어올 뻔했던 이상의 초상화를 결국 놓쳤다. 하지만, 초상도판이 실린 <문학사상>창간호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3판까지 찍으며 1만2000부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오늘날 이상 문학의 재조명을 알리는 기폭제가 된 셈이다. 이어령 평론가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원본을 갖지못해 아쉽지만, <문학사상>에 이상초상이 실린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상은 물론 구본웅까지 우리 문예사의 주역으로 부각시킨 단초가 됐고, 내 인생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명작으로 남게 됐다”고 느꺼워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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