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양승태 대법원의 '거래의 기술'

천관율 기자 입력 2018.06.1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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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이 상고법원 로비 재료로 재판을 활용한 문건이 날것으로 공개됐다. 98개 문건을 사건의 궤적을 따라 재구성한 결과, 조사 보고서로는 알 수 없었던 맥락이 선명히 드러났다.

6월5일 대법원(대법원장 김명수)은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을 보여주는 문건 98건을 공개했다. 대법원 1·2차 조사단에 이어 3차 특별조사단(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보고서에서 문건 내용의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으나, 문건이 날것으로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판사 사찰, 청와대와의 재판 거래 의혹, 심지어 재판 개입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목까지, 공개된 문건 내용은 충격적이다. 하나만 나와도 사법부를 뒤흔들 문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개별 문건의 파괴력이 세다 보니 오히려 전체 그림을 보기가 어렵다. 사안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나와야 하는 질문이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하 양승태 대법원)은 왜 재판 거래를 시도했을까? 판사 사찰과 재판 거래는 무슨 관계일까? 청와대는 왜 상고법원을 추진한 대법원과 거래를 성사시켜주지 않았나? 문건이 날것 그대로 공개된 후에야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연합뉴스

2015년 3월26일,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은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79번)’이라는 문건을 작성한다(BH는 청와대를 뜻한다. ‘79번’은 특별조사단이 붙인 일련번호다). 상고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의 최대 역점사업이었다. 대법원은 대법관 한 명이 1년에 3000건을 처리해야 하는 과부하 상태다. 상고법원은 대법원으로 오는 소송 중 비교적 사안이 단순하고 사회적 의미가 크지 않은 사건을 가져가 처리하는 법원이다. 상고법원을 설치하려면 국회 입법이 필요한데, 이를 위한 대법원의 전방위 로비가 여러 문건에 기록되어 있다. 상고법원 로비는 이 사건을 이해하는 첫 번째 축이다.

청와대는 시큰둥했다. 79번 문건은 이렇게 쓴다. ‘전임 비서실장 영향에 따른 부정적 분위기 고착되어 있는 상황. VIP(대통령) 핵심 보좌진의 친검찰 구성에 큰 변화 없음.’ 전임 비서실장이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말한다. 김 실장이 청와대를 떠나면서 무게중심은 그의 후계자 격인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으로 쏠린다. 79번 문건은 ‘우병우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법원이 국정 운영에 비협조적’이라는 인식을 우 수석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79번 문건은 영어를 병기하며 힘줘서 제안한다. ‘발상의 전환. 우회(Bypass) 전략.’ 김기춘 실장 후임으로 온 이병기 비서실장을 설득하고, 우병우 수석의 검찰 선배인 이명재 민정특보를 통해 우 수석을 견제하는, 우병우 우회 전략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정치권 동향을 부지런히 살폈다. 2015년 4월9일에는 성완종 전 새누리당 의원이, 자신이 정치자금을 준 친박계 핵심 정치인들을 밝히고 자살한다. ‘성완종 리스트’ 정국이 열린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은 ‘성완종 리스트 영향 분석 및 대응방향 검토’ 문건을 쓴다. 152번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책임론에 휩싸일 것이며, 이후 발언권과 위상이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썼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완벽한 오판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의 ‘전략가들’이 분석과 희망사항을 뒤섞은 흔적이다.

2015년 7월28일에 쓴 문건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한 BH 설득방안(80번)’은 상고법원 로비의 결정판이다.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카드가 이 7월28일 문건에 등장한다. 2015년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입법을 따내지 못하면 상고법원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어조도 절박해지고, 카드도 천박해진다. 80번 문건은 사법부와 청와대의 “공고한 유대관계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해야 한다면서, 1)정부 운영에 사법부가 기여해온 구체적 판결례 언급 2)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지원과 협조 약속 3)사법 운영에 대한 우려 해소 등을 전략으로 제시한다.

‘정부 운영에 기여한 판결’로 예를 드는 사례는 이렇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 판결로 국가관 정립에 기여했다. 통상임금 판결에서 경제 전체가 안게 될 부담을 고려했다. KTX 여승무원 판결에서 여승무원들이 코레일과 근로계약관계가 아니었다고 판결했다. 전교조 시국선언 사건에서 정부의 교육개혁을 뒷받침했다. 이 외에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무죄 취지 파기환송 등 청와대 관심사건이 열거된다.

80번 문건은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 결과를 청와대를 향한 ‘로비자산’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이 ‘로비자산 재판’에 양승태 대법원이 실제로 개입했는지, 아니면 써먹기 좋은 결과들을 사후에 모은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대법원이 재판을 로비용으로 사용했다는 본질은 같다.

로비는 ‘앞으로도 대법원이 협조적일 것’이라는 신호를 청와대에 보낸다. 80번 문건은 상고법원에 대한 청와대의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며 이렇게 쓴다. “정부 운영과 관련되는 의미 있는 사건은 대법원 심판 사건으로 정해질 것.” 상고법원이 생겨도 정부가 관심을 가질 사건은 계속 대법원이 보겠다고 청와대를 설득하자는 얘기다. “정부 운영에 기여해온” 대법원이자, “단순한 소극적 암묵적 지지가 아니라 적극적 참여 및 지원을 기초로 한 국정 협조”를 약속하는 그 대법원이다. 80번 문건에는 사법부가 쓰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문장까지 등장한다. 상고법원 도입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제도 개혁의 완성으로 내년 총선에서 정부 여당의 승리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80번 문건 13쪽).” “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사법 한류 추진(80번 문건 23쪽).”

ⓒ연합뉴스 2015년 10월1일 박근혜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오른쪽)이 계룡대에서 열린건군 제67주년 경축연에서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박근혜 청와대는 왜 상고법원에 시큰둥했을까? 양승태 대법원의 분석은 ‘검찰 출신 김기춘·우병우 때문에 막혔다’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 80번 문건에서 비로소 체계가 잡힌다. 크게 셋이다. 첫째, 상고법원 판사는 대법원장이 임명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개입할 경로가 없다. 둘째, 상고법원이 생기면 청와대가 관심을 갖는 주요 시국 현안 사건을 상고법원이 처리할 수 있는데, 대법원보다 상고법원이 더 통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셋째, 청와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대법원이 국회를 통해 상고법원 입법을 추진했다. 대법원이 독자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의심했다. 결국 박근혜 청와대는 상고법원을 내어주면 사법부에 대한 장악력이 낮아진다고 본 것이다. 80번 문건은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공개 발언을 인용한다. “VIP에게 상고법원 판사 지명권을 달라. 그러면 찬성할 수 있다.” 80번 문건이 추론한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은 이렇다. “대통령의 영향력에 포섭되지 아니하는 독립된 사법권에 대한 불만 및 불편함.”

삼권분립의 원칙이 각인된 법관이라면, 대통령의 ‘독립된 사법권에 대한 불만 및 불편함’을 중대한 헌법적 문제로 인식하고 그를 물리칠 방법을 고민할 것이다. 반대로 조직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로비스트라면, 대통령의 ‘불만 및 불편함’을 달래고 오해를 풀어주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할 것이다. 80번 문건은 정확히 후자로 움직였다. 박근혜 청와대의 세 가지 반대 이유에 이렇게 응답한다. “BH의 반감을 없앨 수 있는 새로운 임명 절차 제시(80번 문건 17쪽).” “상고법원안에 대한 우려 해소→중요 관심사건은 대법원에서 처리(80번 문건 19쪽).” “시기적 불가피성으로 인해 ‘의원입법’ 형식 선택(80번 문건 20쪽).” 대통령에게 실질적인 상고법원 통제권을 쥐여줄 방법을 찾고, 청와대 관심 사건은 대법원이 계속 맡겠다고 약속한다. 의원 입법은 ‘청와대 패싱’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의 회동

2015년 8월6일 박근혜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오찬 회동을 한다. 여기서 상고법원 문제가 화제에 오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상고심 기능 개편이 필요하나, 상고법원안은 상고법관 임명의 민주적 정당성 결여, 위헌 시비, 4심제 논란 등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문제점 해결을 위해 법무부와 협의하여 창조적 대안을 창출해주기 바란다.”

양승태 대법원은 이 발언을 상고법원 지지 발언으로 해석한다. 면담 14일 후인 8월20일, 대통령 발언을 지렛대로 한 후속 전략 문건이 작성된다. ‘VIP 면담 이후 상고법원 입법추진 전략’이다(358번). 358번 문건의 평가는 이렇다. “VIP의 평소 단호하고 직설적인 발언 스타일로 보아, 상고법원안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 나타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음.”

양승태 대법원은 대법원과 법무부가 모두 이익을 얻는 협상안을 준비한다. 상고법원을 별도 조직이 아니라 대법원 내의 재판조직으로 설치할 경우, 법무부는 이에 상응하는 조직인 송무차관직을 신설할 명분이 생긴다. 법무부에 2차관이 생기는 것인데, 이러면 신설 차관 아래로 실과 국 등이 줄줄이 늘어난다. 모든 정부부처의 핵심 이해관계인 ‘자리 확대’를 무기로 협상을 설계한다. 이것은 행정부의 각 부처들이 핵심 자원인 예산(기획재정부가 키를 쥔다)과 조직편제(행정안전부가 키를 쥔다)를 놓고 벌이는 내부 정치와 무척 닮았다. 이게 사법부에서 나온 문건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일련의 상고법원 추진 기획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크게 둘이었다. 첫째, 사법부가 삼권분립을 수호할 의무가 대체로 무시됐다. 둘째, 상고법원 추진 기획 중 다수가 희망사항이거나 오판이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첫째 문제가 이 사건을 비극으로 만든다면, 두 번째 문제는 거기에 희극적 요소를 집어넣는다.

3월부터 설득해야 한다던 이명재 민정특보(79번)는 8월에도 ‘설득 필요성’만 강조되고 있다(358번). 우병우 민정수석을 우회해 목표를 달성하자는 ‘우회(Bypass) 전략’의 실패는 보기 민망한 수준이다. ‘삼계탕 1500그릇 일화’까지 학습하며 우회 경로로 노린 이병기 비서실장(79번)은 이맘때쯤 사실상 실권을 잃었다고 법원행정처도 자인했다(80번). 대통령이 말했으니 협상할 수밖에 없을 거라던 법무부(358번)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82번). 대통령의 발언을 상고법원 지지로 해석한 문건은 희망사항을 걸러내지 못한 오류로 판명 났다.

ⓒ연합뉴스 2014년 8월11일 이석기 의원(맨 오른쪽)에 대한 항소심 선고 재판이 열렸다.

정기국회 기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11월19일, 법원행정처 2인자인 차장이 직접 문건을 쓴다. ‘상고법원 추진을 위한 협상추진 전략[민정수석]’이다(82번). 80번 문건이 상고법원 로비의 결정판이었다면, 82번 문건은 실패가 눈앞에 온 상황에서 등장한 가장 극단적인 버전이다.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고 입법 성공을 견인할 수 있는 최후의 협상전략 모색해야 할 시점.” 3월부터 가동한 ‘우병우 패싱’은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병우 민정수석에게 사법부가 패싱당했다. 이제는 우 수석을 직접 설득할 수밖에 없다고 82번 문건은 결론 내린다. 내내 불가능하다고 했던 그 길을 이제는 가야 했다. 다른 길이 없었다.

비상한 각오는 비상한 무리수를 낳았다. 82번 문건은 사법부가 원활한 국정 운영에 협력해온 사례(80번)를 다시 상세히 설명한 후, 이렇게 쓴다. “국가적·사회적 파급력이 큰 사건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BH와 사전 교감을 통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예측 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 수행.”

‘조율’은 80번 문건의 ‘협조’보다 한발 더 나간 표현이다. 양승태 대법원이 청와대 관심사건 판결을 놓고 청와대와 교감하였으며, 재판에도 어떤 식으로든 개입했다는 기록이다. 재판 ‘조율’이 실제로 있었는지 ‘우병우 압박용 허세’인지는 문건만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조율’이 실제 있었는지를 우 수석은 당연히 알 만한 위치에 있었으며, ‘조율’이 있었다면 우 수석 본인이 청와대 측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를 상대로 압박용 허세를 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조율’의 바로 다음 문장은 이렇다. “그러나 상고법원 추진이 BH의 비협조로 좌절될 경우 사법부도 더 이상 BH와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명분과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고지해야 함.” 이것은 사법부의 중립성을 확인하는 원론적인 선언일까? 문건의 맥락은 정반대다. “원론 차원의 중립 의지 표방이라 하더라도 단호한 어조와 분위기로 민정수석에게 일정 정도의 심리적 압박은 가할 수 있을 것.”

80번 문건은 이미 결과가 나온 재판을 사후에 묶어서 포장했다는 해석이라도 가능했다. 하지만 82번 문건은 과거 재판의 ‘조율’과 미래 재판을 건 ‘압박’을 동시에 말한다. 82번 문건에 이르면, 재판은 로비 자산을 넘어 전략무기가 된다. 사법부가 재판을 무기로 간주했다는 비극 위에, 그것이 전혀 먹히지 않았다는 희극이 다시 포개진다. 상고법원을 추진하며 법원행정처 엘리트들이 내놓은 전략과 기획은 놀라울 정도로 늘 작동하지 않았고, 예측과 분석은 마지막까지 틀렸다. 박근혜 청와대는 상고법원 프로젝트를 끝내 좌절시켰다.

양승태 대법원은 상고법원을 줄기차게 추구하면서, 청와대가 좋아할 재판 결과를 긁어모아 거래를 기획했다. 더 나아가 재판 자체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표현과 정황도 남겼다. 의혹의 배양액은 이 지칠 줄 모르는 로비였다. 양승태 대법원은 왜 재판까지 베팅해가며 상고법원을 원했을까?

대법원이 과부하 상태여서 상고심 제도를 개선해야 할 필요는 확실히 있었다. 하지만 대안이 상고법원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장 판사들과 법률정책 연구자들은, 판사를 늘려 1심인 사실심을 충실하게 해서 항소를 줄이자, 상고허가제를 도입해 대법원으로 가는 사건 수를 줄이자, 13명인 대법관 수를 크게 늘리자 등 여러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은 상고법원 외의 모든 대안을 기각했다. 사실심 충실화는 판사 수를 대폭 늘려야 하니 현실적이지 않다고 했다. 대법관 정원 확충 제안을 상대로는 거의 색깔론까지 꺼냈다. 80번 문건은, 대법관을 증원하는 대안은 “진보 인사의 최고법원 진출 교두보”가 될 것이며, 이것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복심”이라고 썼다.

ⓒ연합뉴스 2015년 2월9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가운데)이 항소심 선고공판을 위해 법원에 들어섰다.

왜 상고법원만을 원했을까. 한 소장 판사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공교롭게도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폐지하기로 한 후부터 상고법원이 본격 추진됐다. 더 공교롭게, 상고법원이 좌절된 후에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가 은근슬쩍 살아났다.”

헌법으로 독립성이 보장된 법관을 대법원장이 컨트롤할 방법은 마땅치 않다. 선호도 낮은 지역으로 보내는 징계성 인사 발령도 어렵다. 훗날 대법관이 되는 박시환 판사는 초임 시절인 1985년 인천지법에서 전두환 정권의 지침에 반하는 판결을 냈다가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보복성 발령이 났다. 군사정권 시절인데도 대법원장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는 큰 논란으로 비화했다. 이후 ‘박시환 모델’은 사실상 봉쇄됐다. 그러니 승진 인사는 대법원장에게 사실상 유일하게 남은 법관 통제 도구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전임인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이던 2011년, 법원은 ‘법관 인사 이원화’를 추진해 2015~2016년께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고등법원 법관 트랙과 지방법원 법관 트랙을 분리하여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개념을 없애는 안이었다. 대법원장 인사권의 핵심 무기가 사라진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이런 상황에서 취임했다. 상고법원은 ‘승진’이라는 무기를 대법원장의 손에 되돌려준다. 상고법원이 좌절된 2016년, 법원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를 부활시킨다. 우연이라면 절묘한 우연이다.

판사 사회에는 ‘기획·공보법관-법원행정처 심의관-고등법원 부장판사-법원행정처 차장-대법관’으로 이어지는 출세 코스의 ‘정답’이 있다. 승진과 출세를 원하는 판사라면, 인사권자의 의중을 살필 이유가 분명하다.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은 대법원장의 의중이 실리는 분명한 경로다. 법원행정처는 출세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코스가 된다. 판사를 평가할 때 재판 경력보다 사법행정 경력을 더 쳐주는 묘한 문화가 정착했다.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고 사법행정처가 손발이 되는 사법부 통제 구조는 이렇게 완성된다.

문건은 왜 ‘승포판’을 거론했나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퍽 역설적인 결론이 나온다. 대법원장의 권력에 큰 위협은 무엇일까? ‘출포판’ 또는 ‘승포판’, 그러니까 출세와 승진을 포기한 판사다. 출세를 포기한 판사는 대법원장의 유일한 무기인 승진에 구애받지 않는다. 법원의 수직적 통제에 맞서 독립성을 주장할 위험이 높아진다. ‘출포판’이라고 하면 유유자적하고 위협적이지 않다는 인상을 주지만, 법원 특유의 구조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최대 위험요소다.

양승태 대법원은 꼼꼼했다. ‘승포판’ 대응책도 문건으로 만들었다. ‘문제법관 시그널링 및 감독 방안(167번)’은 “승포판은 직무윤리의 문제”라면서 사법행정권을 발동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명분으로는 직무태만과 불성실 문제를 내걸었다. 하지만 법관 세계에서 통용되는 ‘승포판’ ‘출포판’의 의미를 고려하면, 승진이라는 무기가 안 먹히는 ‘승포판’에 통제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167번 문건은 문제 법관에 대해 전보 조치가 가능하다고 썼다. 실현되었다면 ‘박시환 모델’의 부활이다. 이제 이야기의 나머지 반쪽, 법관 사찰과 통제를 기획한 문건이 등장했다.

최초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은 양승태 대법원이 판사들의 연구모임을 사찰했다는 의혹에서 불거졌다. 그래서 법원행정처를 조사하다 보니 상고법원 로비라는 또 다른 의혹이 불거진 것으로 여론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수 여론은, 두 사건 중에 재판 개입 의혹과 직결된 상고법원 로비가 더 중요하고, 법관 사찰은 잘못이지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문건 공개는 전체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두 사건이 사실상 한 덩어리라는 중요한 사실을 드러냈다. 법관 사찰·통제 문건의 목표는 분명했다. 사법부 통제 구조에 균열을 낼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다. 우선은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타깃이 되었다. 2015년 7월6일 작성된 ‘상고법원에 대한 사법부 내부 이해도 심층화 방안(36번)’은 “내부 설득에도 불구하고 언론 등을 통해 반대 의견을 표방하는 경우 위기 대응체제를 가동”해야 한다고 썼다. <시사IN>에 상고법원 대신 하급심을 강화하자는 기고를 연재한 차성안 판사는 상고법원 문제에 대법원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재산 내역까지 사찰당했다.

ⓒ시사IN 윤무영 6월5일 ‘대법원 사법 농단’을 규탄하는 법률가들이 대법원 동문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고 있다.

2015년 7월7일 판사들의 연구조직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산하에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이 생긴다. 법원행정처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8월23일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 대응방안(2번)’ 문건은 인사모의 문제점을 이렇게 쓴다. “대법원 정책에 반하는 의견을 법원 내외부에 표출할 가능성.”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실제로 2년 후인 2017년에 국제인권법연구회는 법관 인사제도를 주제로 연세대와 공동학술대회를 꾸린다. 여기서 인사모는 대법원 구성의 문제점, 법관인사 이원화 등을 주제로 준비한다. 대법원장의 사법부 통제력을 뿌리부터 건드리는 주제다. 2017년 1월24일 작성된 문건 ‘인사모 관련 검토(312번)’는 이 학술대회가 “사법부 독립 및 인사제도의 근간을 뒤흔들 위험성”이 있다고 붉은 색 글씨로 강조했다.

2016년 3월25일, 법원행정처는 반격을 위한 전략교본을 완성한다. ‘전문분야 연구회 구조개편 방안(181번)’이라는 제목의 이 문건은 연구회 제도를 정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실상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사모를 특정해 와해 공작을 기획한다. 181번 문건의 내용은 정보기관 공작 문건과 큰 차이가 없다.

181번 문건은 선배 법관들이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집단 탈퇴해 학회를 ‘기피 대상’으로 인식시키자고 제안한다. “선배 법관들의 탈퇴를 통해 인권법연구회가 논란 대상이라는 인식 확산.” 탈퇴의 방법도 구체적으로 적었다. “명분 없이 일거에 탈퇴할 경우 행정처가 배후에 있다는 공격을 받게 될 위험이 크므로, 적절한 명분을 갖추어 탈퇴하되, 대거 탈퇴할 필요.”

심지어 명분도 직접 만들어준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장이 인사모가 연구회 취지에 반한다는 문제를 제기하도록 한다. 그래도 인사모가 해산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명분 삼아 선배 법관들이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대거 탈퇴할 수 있다. 181번 문건은 작전의 효과를 이렇게 기대했다. “종전 우리법연구회 사례에서 보듯 연구회 활동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의 확산만으로도 상당수 법관이 자연스럽게 탈퇴할 가능성이 있음.”

이제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다(아래 <표> 참조). 법관 사찰·통제 문건에서 드러나는 충돌은, 대법원장이 통제하는 사법부 대 법관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사법부의 싸움, 통제 대 독립성의 싸움이었다. 상고법원 로비 문건에서 드러나는 충돌은 그와는 달랐다. 이것은 통제 대 독립성의 싸움이 아니라, 사법부 통제권의 지분 조정 싸움이었다. 박근혜 청와대도 양승태 대법원도 사법부의 통제력을 원했다. 다만 누가 통제할지를 놓고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 두 전선은 왜 하나인가. 상고법원 로비 전선에서, 양승태 대법원의 핵심 판돈은 결국 재판이었다. 재판을 판돈으로 걸려면 상대가 가치를 높이 쳐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 판돈의 가치가 극대화되는가? 대법원장이 재판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상대가 믿을 때다. 그러니 내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 안 된다. 다시 상고법원 로비의 정본인 80번 문건으로 돌아가자. 13쪽에 이런 문장이 있다. “사법부의 진정한 힘은 판사들의 단단한 결속력에 있음. 내부의 하나 된 여론을 외부에 표출하여 설득의 추동력으로 활용.”

삼권분립을 다시 물어야 하는 이유

이렇게 해서 양승태 대법원은 뜻하지 않던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에서 사법부를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라는 중대한 문제를 던졌다. 이런 의미다. 소수자 보호는 사법부의 중요한 사명이다. 그러므로 다수가 지배하는 기구인 입법부와 행정부의 견제로부터 사법부는 어느 정도 보호받아야 한다. 삼권분립 원리가 사법부 독립성을 보호하는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법관의 권한은 견제받지 않아도 좋은가?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는 법관의 권한에 견제와 균형을 작동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입법부나 행정부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결국 사법부 자체가 법관을 견제할 힘을 가져야 한다. 그게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역할이다. 일련의 문건에서 양승태 대법원이 삼권분립과 사법부 독립을 말할 때는 이런 논리가 깔려 있었다.

양승태 대법원은 이런 논리가 왜 자가당착인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의 장악력이 높으면, 역으로 사법부 독립과 삼권분립도 취약해진다. 최고 권력인 대통령이 사법부와 거래를 하기가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판사 3000명이 독립성을 갖고 독자 행동을 하는 사법부와는 대통령도 거래가 불가능하다. 반대로 대법원장이 컨트롤하는 사법부는 대통령이 거래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역으로 대법원은 거기서 로비의 공간을 발견한다. 이것은 양승태 대법원의 권한 남용에 대한 묘사인 동시에, 사법부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한국 사회가 떠안아야 할 위험에 대한 묘사다.

2004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은 잠시 법원을 떠나 있던 박시환 변호사를 청와대로 불러 조언을 구했다. 법원 안팎 개혁 성향 법조인들의 리더 격이었던 박 변호사는 동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법원(헌법재판소) 인적 구성에 대한 의견’이라는 문건을 쓴다.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강한 보수 성향하에 관료적으로 움직이는 사법부는 그 폐단이 극에 달하여 사법부 본래의 기능이 심하게 훼손되었다(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사법부의 수직적 통제, 그러니까 ‘사법부의 관료화’는 오랫동안 되풀이해 지적된 문제다. 그 말은 법률가들이 한 세대 넘게 문제 제기를 해왔음에도 공론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법부 내부의 작동원리에 시민이 관심을 갖기는 어렵다. 사법부의 관료화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왜 문제이며, 그것이 보통 시민의 삶을 어떻게 나쁘게 만드는지, 시민에게 생생히 보여주기란 아주 어려웠다. 어쩌면 그 어려운 일을 양승태 대법원이 해낼지 모른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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