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의 한숨.."학점이라도 잘 따두자" 시험족보 사고팔아
◆ 최악의 청년실업 ◆
지난주 말 기말고사가 임박한 고려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시험 족보'를 사고파는 거래 글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족보'는 대학가에서 해당 과목 기출문제와 요약본을 부르는 은어다. '○○○ 교수님 재무회계 족보 삽니다' '○○○ 교수님 마케팅이론 필기 삽니다(사례 有)' 같은 제목을 단 족보 거래글이 대학에 따라 적게는 수십 건에서 많게는 수백 건까지 게재됐다.
학생들이 시험과 관련해 사고파는 항목은 빈출 문제 족보, 전체 필기 복사본, 강의 녹취 파일 등으로 다양했다. 가격은 2만~5만원으로 일회성 용도를 감안하면 부담스러운 편이지만, 학생들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시험자료를 얻으려 하는 분위기다. 취업난에 따른 '스펙 관리'와 학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과거 '공유' 대상이던 족보가 '거래' 대상이 된 셈이다.
극심해진 취업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분야는 금융권이다. 최근 잇따라 드러난 은행권 채용 비리의 여파로 금융권 채용 시험에 필기시험이 부활하면서 취업준비생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10년 만에 은행 입사에 '고시'가 부활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금융권 취업을 희망하는 청년들 사이에서는 긴장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고졸 출신이 주로 응시하는 단순사무직 은행텔러 시험 준비를 위한 사교육도 성행하고 있다.
주요 인터넷서점에는 '○○은행 직업기초능력평가' '신(新)필기시험 완벽 대비' 같은 은시 교재 신간이 속속 뜨고 있다. 권력자들의 로비전으로 얼룩졌던 은행 입사 전쟁이 이번엔 필기시험 확대에 따른 사교육전 양상으로 변모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취업준비생들은 갑작스러운 필기시험 부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기존 필기시험에 비해 난도가 향상되는 것은 물론 갑작스럽게 진행된 탓에 방안을 찾기도 어렵다는 입장이다.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일단 합격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기업별 기출문제나 새로 필기시험을 도입한 은행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서울 광화문 대형 서점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김 모씨(26)는 "경제 금융 시험이라는데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 서점을 찾았다"며 "시험 때까지 기간이 길지도 않은 상황에서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고 토로했다.
대학 커뮤니티, 취업정보사이트 등에서 은행고시 강의를 찾는 수요가 많아지면서 강의 개설을 예고한 학원도 급증하고 있다. 인기가 높은 주요 국책은행 필기시험을 대비할 수 있도록 '최근 채용공고 완전 분석' 같은 인터넷강의 광고문구가 수험생들의 애간장을 볼모 삼아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은행권 필기시험 강의 개설을 준비 중인 학원 관계자는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채용공고에 기재돼 있지 않고, 다수 기업이 시험과목을 공개하지 않아 기출문제나 언론을 통해 공개된 출제 방향에 의존해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행 실무진은 시중에서 성행하는 은시학원이나 은시 인강이 실제 은행 입사 준비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기본적인 금융상식과 최근 트렌드 및 이슈 등을 신문과 도서 등으로 꾸준히 습득하는 것이 필기시험 대비 요령"이라며 "기존 은행 필기시험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출제되어 과거 은행 취업문제와 차별화했다"고 설명했다.
청년·대학생들이 이처럼 취업을 위해 발버둥을 치지만 청년 취업난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17일 교육부에서 건네받은 전국 대학생 졸업유예자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졸업유예자는 1만5898명으로 확인됐다. 2015년 1만7744명, 2016년 1만7741명보다는 다소 줄었으나 꾸준히 1만명대 중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양질의 일자리가 날로 줄어드는 와중에 '덜 나쁜' 일자리를 찾으려고 졸업유예자에서 취업유예자로 신분을 바꿔 기약 없는 배수진을 치는 새로운 유형의 취업준비생도 늘어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졸업 이후 취업을 미루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학교에 소속을 가지고 원하는 일자리를 찾는 것과 달리 소속 없이 취업활동을 벌이다 실패할 경우 실직 상태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굳이 구직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박대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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