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년의 숫자로 읽는 경제]'낙하산 인사' 뒤엔 '빅 배스', 정권이 조장하는 '회계 적폐'

김도년 입력 2018. 6. 16. 02:30 수정 2018. 6. 16.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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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미래당이 청와대 장하성 정책실장(왼쪽 사진)의 ‘포스코 회장 인사 개입 의혹’을 제기했고, 청와대는 ’명백한 허위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연합뉴스]
지난 2015년 2월5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권오준 전 포스코 회장은 투자자들을 모아 취임 첫해(2014년) 실적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2014년 말 포스코의 당기순이익은 5567억원으로 사상 최저 수준이었지요. 권 회장은 세무조사 추징금과 강릉 마그네슘 환경 정화비 등 1조2000억원에 달하는 일회성 비용 탓에 저조한 실적을 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시장은 권 회장 취임 이후 발생한 이 같은 대규모 손실을 전형적인 '빅 배스(Big Bath)' 탓으로 봤습니다. 빅 배스란 신임 경영진이 향후 경영 성과를 강조하기 위해 앞으로 발생할 비용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추정, 임기 초 미리 반영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임기 초반 감소한 이익이 나중에 정상으로 회복되면 이익을 나타낸 그래프가 마치 목욕통처럼 'U'자 모양을 띠게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용어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제대로 목욕을 해 전임 경영자가 털지 않은 '묵은 때'를 지운다는 의미도 있지요. 포스코는 현재 차기 회장 선임 작업에 한창인데요, 다음 달 주주총회에서 신임 회장이 선임되면 또다시 '빅 배스'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어, 투자자들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포스코·KT 등 '낙하산 인사' 잦은 기업, 빅 배스도 잦아
재미있는 점은 삼성이나 LG·SK그룹처럼 재벌계 대기업보다는 명확한 지배주주가 없는 기업에서 '빅 배스'가 더 자주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KT도 황창규 회장 취임 직후인 2014년 9661억원의 당기순손실을 인식했고, KB금융지주도 역대 회장이 취임할 때마다 경쟁 금융지주사보다 초라한 성적을 거둘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포스코나 KT·KB금융지주처럼 국민연금공단이 최대주주인 대기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논란'으로 잡음이 많지요. 낙하산 인사가 잦은 회사일수록 빅 배스도 자주 목격되는 이유는 전임 경영자와 신임 경영자 사이에 경영의 연속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흔히 빅 배스는 신임 경영자가 회사의 손실을 전임자의 탓으로 몰아가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데요, 낙하산 인사가 있는 기업에선 전임자를 예우하기보다 깎아내려야 신임 경영자가 더 돋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잦습니다. 빅 배스는 신임 경영자 입장에선 일종의 '회계적 적폐 청산'인 셈이지요.

KT CI


분식회계는 아니지만, 반갑지 않은 이벤트 '빅 배스'
빅 배스로 기업의 실적은 크게 출렁이게 되지만, 이는 고의로 실적을 조작한 분식회계(거짓으로 재무제표를 꾸밈)는 아닙니다.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미래에 대한 손실 추정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하는 방식을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어떨 땐 빅 배스가 더 정확한 회계처리를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가령 대우조선해양은 정성립 사장 취임 직후인 2015년 7월, 3조400억원 규모 영업손실을 2분기에 한꺼번에 인식했는데요, 이는 결국 전임자들의 분식회계를 바로잡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검찰 조사 결과 회계사들은 과거 자신들의 분식회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오히려 정 사장의 빅 배스 시도를 방해하는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지요.

다만 주주 입장에서 빅 배스는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손실이기 때문에 반가울 리가 없습니다. 신임 경영진의 경영 능력을 믿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손실 폭탄'을 입고 상처받는 일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은 시장경제가 가장 기피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될 수 있으면 빅 배스를 해야 할 필요가 없이 매번 회계를 보수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빅 배스 관행 없애려면, '낙하산 인사' 적폐 없애야"
포스코·KT처럼 지배주주가 불명확한 기업의 잦은 빅 배스 관행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정권이 이들 기업의 인사에 개입하지 않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어 보입니다. 지배구조 전문가들은 정권이 이들 대기업의 회장 자리를 '전리품'으로 생각하기보다 기업가치를 드높인 훌륭한 경영자의 연속적인 경영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포스코의 경우 5대 유상부 회장이나 8대 권오준 회장 등을 임기 말 한창 주식가치를 끌어 올렸지만, 결국 사퇴로 이어졌지요.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경영자가 본인의 성과와 관계없이 사퇴하게 되면, 결국 기업 지분에 투자한 국민연금에도 손실을 끼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역대 정부로 나누어 본 포스코 주가 흐름.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역대 포스코 회장은 주식 가치나 실적을 얼마나 키웠는 지에 상관없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체돼 왔다"고 분석했다. [김우진 서울대 교수]

어쩌면 우리 경제에서 청산해야 할 적폐는 경영진이 바뀔 때마다 갑작스러운 손실을 반복해 온 빅 배스 관행일 것입니다. 선임된 시기에 따라 경영자를 '적폐 인사'로 낙인 찍기보다, 전임자의 경영 성과들이 신임 경영자로 넘어오며 계승될 수 있는 풍토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시장은 이번 포스코 회장 인사 이후에는 더는 빅 배스를 보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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