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전엔 간첩조작 피해자, 이젠 재판거래 피해자 됐다"

2018. 6.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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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운씨, 재심 무죄뒤 받은 배상금
대법서 '소멸시효' 들어 반환 판결

대법-청와대 뒷거래 정황 드러나
2015년 작성한 법원행정처 문건

'국정운영 협조..국가배상 제한' 명시
박씨 "대법, 철저한 자기반성 해야

[한겨레]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 박동운(73)씨가 과거 안기부의 혹독한 고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국가가 벌인 범죄를 마지막으로 완성한 곳이 다름 아닌 대법원입니다.”

1981년 ‘진도 간첩단’ 조작 사건의 희생자 박동운(73)씨는 지난 13일 <한겨레>와 만나 연신 밭은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양승태 사법 농단’ 사건이 불거진 뒤 다른 피해자들은 대법원 앞으로 달려가 항의집회를 했다. 몸이 불편한 고령의 박씨는 멀리 전남 진도에서 홀로 울분을 삭이고 있다.

박씨와 법원의 ‘악연’은 19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협에 다니던 그는 아내가 셋째를 임신 중이던 그해 봄 진도까지 찾아온 안기부 요원에 의해 서울 ‘남산’으로 끌려갔다. 안기부는 “북한 공작원인 아버지의 지령을 받아 간첩 활동을 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그가 자백을 거부하자 고문은 60일간 계속됐다. 함께 잡혀 온 어머니까지 “알몸으로 ‘통닭’처럼 매달아 고문하겠다”는 위협에 그는 무너졌다.

법정에서 고문에 곪은 다리를 판사에게 보여줬다. 판사는 서류를 집어 던지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역정을 냈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18년 옥살이를 하고 쉰세 살이 되던 1998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달라진 세상에서 박씨는 법원의 재심 절차를 거쳐 무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송두리째 빼앗긴 인생을 보상받으려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심과 2심에서 법원은 ‘국가가 17억여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1심이 끝나고 박씨는 배상금의 절반 남짓인 8억여원을 가지급금으로 받았다. 박씨는 빚을 갚고 진도에 여생을 보낼 집을 지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2014년 12월24일, 대법원은 과거엔 문제 삼지 않았던 ‘소멸시효’를 들어 박씨가 배상금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조작간첩 사건에서도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 안에 손해배상 소송을 내야 한다”는, 전에는 없었던 비상식적인 기준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에 국가는 재빠르게 박씨 등을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냈다. 세 아이의 아빠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18년 옥살이를 한 보상이 졸지에 ‘부당이득금’이 됐다. 곧 법원은 박씨가 받은 ‘부당이득금’에 이자까지 더해 10억여원을 토해내라고 판결했다. 고문만큼 잔인한 국가폭력에 박씨는 또 무너졌다.

최근 ‘양승태 사법 농단’ 문건이 공개되면서 박씨는 비로소 자신에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법원행정처가 2015년 11월 작성한 문건에는 “그동안 사법부가 VIP(대통령)와 BH(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해 온 사례를 상세히 설명”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 첫 번째 항목에 ‘①합리적 범위 내에서의 과거사 정립(국가배상 제한 등)’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박동운씨가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보낸 탄원서.

2015년 7월 법원행정처가 만든 또 다른 문건에도 “사법부는 그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음”이라고 적혀있다. 그 노력 중 하나로 ‘과거사정리위원회 사건’에서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한 것을 강조했다. 18년 무고한 옥살이를 한 박씨같은 이에게 배상금 한 푼 주지 말라는 판결의 다른 표현이다.

박씨는 당시 신문에서 봤던 한장의 사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 2심 끝나고 1년이 넘도록 대법원 판결이 안 나왔어요. 그런데 2014년 9월13일 신문에서 양 전 대법원장과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이 대화를 나누는 사진을 봤죠. 불안했는데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요. 양승태는 반드시 감옥에 가야 합니다.” 그는 단호했다.

법원행정처가 지난해 12월 박동운씨에게 보낸 민원회신

박씨는 다른 곳도 아닌 법원이 억울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해 9월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탄원서도 썼다. “과거사 사건에서 대법원은 검찰보다 더한 잘못을 저질러온 만큼 처절한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또 대법원의 오만으로 피해를 입은 모든 분을 구제할 대안을 선언하고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

소용 없었다. 석 달 뒤 법원행정처는 한장짜리 민원회신을 보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는 헌법 조문과 함께 “대법원 재판은 최종적인 것이므로 법률이 정한 특정한 경우 이외에는 불복을 신청할 수 없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기계로 찍은 듯 어떤 고민도 느껴지지 않는 문서였다.

그래서인지 박씨는 지금의 대법원도 못 미더운 듯했다. “김 대법원장이 (사법 농단 관련) 고위 법관들의 의견을 들을 게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해요.” 그의 힘겹고 밭은기침이 계속됐다.

글·사진 진도/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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