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위의 촛불 악연을 대물림하다

2018. 6. 1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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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부친과 악연에도 자신을 임명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한 김수남 전 검찰총장

2015년 12월10일 김수남 전 검찰총장이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서 임명장을 받은 뒤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편할 때 전화 부탁합니다.” 2015년 11월14일 오후 기자의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김수남 당시 대검찰청 차장검사였다. 그는 막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검찰총장에 내정된 상태였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총장 후보자가 기자에게 통화를 요청한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날은 신문을 제작하지 않는 토요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쉬는데 전화 달라고 해서 미안합니다만….”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 살짝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오래 안 가 맥이 풀렸다. 그의 ‘용건’이 다소 싱거웠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일선 지검장 시절 한 대학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기사화할 것인지 물었다.

당시 <한겨레> 법조팀은 총장 후보자 검증을 위한 취재 과정에서 그의 옛 강연 내용을 알게 됐다. 그는 청주지검장 시절 관내 로스쿨 재학생을 상대로 한 강연에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을 비판했다. 대통령이 지명한 검찰총장 후보자가 대통령의 아버지가 했던 일을 비판한 것은 예삿일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기사는 쓰지 않기로 일찌감치 결정했다. 상식을 가진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의 비판이라서 자칫 ‘낯 뜨거운’ 기사가 될 수 있었다. 민주정부의 검찰총장이라면 헌정을 파괴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아버지와의 악연

그러나 그는 다른 이유로 기사화를 바라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것 같고… 청문회 앞두고 민감한 때라서….” 그는 청와대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당시 공직사회에선 대통령 아버지 때의 일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됐다.

김 총장이 몸을 사린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고 김기택 전 영남대 총장이 박 대통령과 ‘악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1988년 노태우 정부가 사학비리 수사를 할 때 영남대 재단 이사였다. 그는 검찰 수사 결과 자신의 측근들이 부정입학 대가로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자 재단에서 손을 뗐다. 재단의 실질적 주인인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여론이 일었기 때문이다. 김기택 당시 총장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자신을 총장에 앉힌 재단 오너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악연은 그로부터 20년 뒤 일어났다. 김 전 총장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이명박 캠프 쪽에서 영남대 재단 비리 의혹을 이슈화하는데 도움을 줬다. ‘영남대의 실질적 이사장은 박근혜’라는 내용의 사실 확인서를 써준 것이다. 이로 인해 박근혜 캠프는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결국 박 대통령은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다.

이런 이유로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을 때 검찰 안팎에서 김수남 총장의 중용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실제 김 총장은 박 정권 출범 직후 단행된 검찰 고위 간부 인사에서 고검장 승진에 실패했다. 사법연수원 동기들은 물론 후배 기수에게도 추월당해 충격은 더욱 컸다. 그는 사표를 쓸 생각까지 했지만 검찰 출신 선배들의 만류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김 총장을 살려낸 것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었다. 그는 수원지검장으로 있던 2013년 8월 이 전 의원의 수사를 지휘했다. 이 수사는 통진당을 나락에 빠뜨렸지만, 김 총장에겐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줬다. 통진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2012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박 전 대통령에게 “충성 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 뿌리는 속일 수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박 전 대통령이 아버지를 욕보인 자를 가만둘 리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11월 헌법재판소에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했고, 1년 뒤인 2014년 12월19일 헌재는 재판관 8 대 1로 통진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이 전 의원에 대한 수사 기록은 통진당 해산에 중요한 증거로 사용됐다.

그는 당시 전국에 생중계된 수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보통 수사 결과는 지검장이 아닌 차장이 발표하는 게 관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사를 지휘한 내가 직접 설명하겠다”며 기자들 앞에 섰다. 이는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됐다. 청와대에 확실히 눈도장을 찍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2013년 12월 고검장급 인사에서 ‘검찰 넘버2’로 꼽히는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석기 전 의원 수사로 청와대 ‘눈도장’

2013년 9월5일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이 구속되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그의 ‘총장 가도’에 경쟁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수사 때 박 전 대통령의 ‘구원투수’로 나섰던 최재경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박 전 대통령 쪽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원로 자문그룹 ‘7인회’ 멤버인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의 조카다. 친박 실세인 최경환 전 의원은 그의 대구고 선배다. 최 전 수석은 2014년 7월 세월호 사건과 관련해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 대한 수사 실패의 책임을 지고 인천지검장을 끝으로 옷을 벗었지만, 든든한 ‘빽’ 덕분에 박근혜 정부의 ‘영원한 검찰총장 후보’로 간주됐다.

그러나 최 전 수석에겐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그는 김 총장에 견줘 재산이 많았다. 부동산 투기로 의심할 만한 위장전입도 있었다. 반면 김 총장에겐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이라는 확실한 우군이 있었다. 우 수석은 청와대 안에서 ‘김수남 대세론’이 확산되는 데 일조했다.

김 총장과 우 수석의 밀월 관계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국정 농단 사건 수사 때 다시 부각됐다. 김 총장이 우 수석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16년 8월 두 차례나 우 수석과 통화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검찰총장이 민정수석과 통화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일 뿐 아니라(민정수석의 파트너는 법무부 검찰국장이다) 우 수석이 검찰 수사까지 받고 있었기에 김 총장의 통화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전임 김진태 총장은 우 수석이 민정수석으로 승진했을 때 안부 전화를 하면서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통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로는 단 한 차례도 통화하지 않았다. 그만큼 검찰총장과 민정수석의 통화는 금기시됐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취임 당시 야권과 시민단체들로부터 ‘정치검찰의 전형’이라는 야유를 받았다. 그가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지휘했던 ‘정윤회 문건’ 수사를 비롯해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 박근혜 정부의 입맛에 맞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국정 농단 사건 초기엔 소극적 수사

그러나 검찰 안에선 그가 정치권력의 눈치만 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가 ‘소장검사’ 시절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나라종금 사건’ 수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대검 중수부 3과장으로 있으면서 수사 실무를 지휘해 당시 여권 거물급 인사인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 염동연 민주당 인사위원을 구속 기소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민주당 의원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도 불구속 기소했다. 그는 이후 정기 인사에서 대구지검으로 좌천됐는데, 당시 수사 과정에서 검찰 수뇌부와 갈등을 빚은 탓이라는 말이 나왔다.

김 총장이 아버지와의 악연을 무릅쓰고 자신을 검찰 총수로 임명한 박 전 대통령을 구속한 것을 두고 법조계에서 여러 말이 나왔다. ‘다수설’은 그가 촛불집회에서 분출된 여론을 의식해 어쩔 수 없이 구속 수사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이는 국정 농단 사건 초기에는 그가 수사 착수에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다.

그는 2016년 9월 <한겨레>와 TV조선의 보도로 최순실씨 관련 의혹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만 해도 최씨의 K스포츠재단 출연금 모금 행위 등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김 총장은 박 전 대통령을 구속 기소한 뒤 기자에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당시 보도 내용은 미르재단·K스포츠재단 설립을 최씨가 주도했고, 재단 설립도 이례적으로 빨리 진행됐고, 출연금은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을 통해 모금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이 곧바로 출연금은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냈다고 반박 기자회견을 했다. 그 상황에서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에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강제 모금이 아니었다면 재단을 빨리 설립한 것만 남는데, 그게 무슨 죄가 되나.’ 그게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김 총장의 판단은 과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해재단 비리 수사와 궤를 같이한다. 1995년 전두환·노태우 비리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일해재단 모금 행위에 대해 “강제성이 없다”며 뇌물 혐의로 기소하지 않았다. 김 총장은 최씨의 재단 모금 행위가 일해재단과 같은 구조로 이뤄졌다고 본 것이다.

김 총장의 판단에 대한 반론도 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검찰 고위 간부는 “<한겨레>의 보도 내용만으로도 강제수사가 충분히 가능했다. 전경련의 해명은 누가 보더라도 거짓일 가능성이 컸다. 과거 일해재단 수사도 뇌물 혐의를 적용하지 않아 부실 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한 달 뒤 JTBC의 태블릿PC 보도 직후에는 태도가 확 달라졌다. 특별수사본부를 출범시키며 성역 없는 수사를 지시하는가 하면, 검찰 소환을 거부하는 박 전 대통령을 향해 “직접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수사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임기가 1년4개월 정도 남아 있었다. 탄핵 재판과 검찰 수사가 없었다면 아직 레임덕(권력 공백)이 올 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총장이 임면권자를 향해 검찰에 나와 조사를 받으라고 한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법불아귀’ 지킨 것일까

김 총장의 ‘돌변’은 2016년 10월2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만여 명으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과 맞물린다. 집회 현장에선 ‘적폐 청산’ 대상으로 검찰이 지목됐다. 검찰 안에선 “박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지 못하면 촛불이 검찰로 몰려올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김 총장은 취임사로 <한비자>에 나오는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신분이 귀한 사람에게 아부하지 않는다)를 말해 화제가 됐다. 박 전 대통령 수사는 이 말을 지킨 것으로 봐야 할까.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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