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 전성시대]밀레니얼 칠드런

2018. 6. 13. 09: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ㆍ노력해도 길이 없다면 잘못된 게 아닐까?

작가는 학교라는 축소판 사회를 통해 보다 많은 권력의 영구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식능력은 물론이고 생각까지 주무르려 드는 지배층의 제어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춘다.

작품의 배경인 ‘학교’는 수용소 같은 시설로 아이들을 바깥으로부터 강제 격리시킨다. | 비룡소

민주주의의 요체 중 하나가 ‘기회의 공평’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세상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다,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인 채로. 최근 연이어 터지는 취업비리 메들리는 우리 사회가 과연 ‘기회의 공평’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 반문하게 한다. 금융권의 제 식구 챙기기는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니나 공기업과 교육계라 해서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코레일 임원들이 자회사 신입 선발에 사사로이 관여하고 산업자원부 공무원이 강원랜드 채용비리에 연루되는가 하면, 총신대에서는 총장이 직접 친인척 채용에 앞장섰다. 2012~2013년 강원랜드 신입사원의 95%가 청탁 입사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런 사회 부조리에 부산시외버스와 기아자동차 사례에서 보듯 누구보다 노동자 권익보호에 앞장서야 할 노조 간부들까지 가세하는 판국이니 기가 찰 노릇이다. 젊은이들이 ‘88만원 세대’와 ‘헬조선’이라는 자학적 표현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자원과 부(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라기보다 그것의 분배가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서가 아니겠는가.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날 수 없게 구조적으로 틀어막는 사회에서 어찌 제대로 된 인재가 충분히 배출되겠으며, 그러한 나라가 어찌 국제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추겠는가?

학교에서 서열화에 길들여진 비주류

장은선의 〈밀레니얼 칠드런〉(2014)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풍자적으로 비꼰 근미래 디스토피아 이야기다. 과학소설이 단지 미래 전망만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을 꿰뚫어보고 일깨우는 데에도 아주 유용한 문학 형식임을 잘 보여주는 이 장편은 무대를 학교라는 작은 공간으로 축소해 놓아서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기가 훨씬 쉽다. 가까운 미래, 의학기술 발달로 평균수명이 대폭 늘어난다. 정부는 인구 증가를 막고자 부부당 1명씩만 아이를 갖게 제한하고 이로도 모자라 아이를 가진 부부에게 ‘자식세’를 부과한다. 만일 몰래 아이를 낳아 기르다 발각되면 부모는 처벌받고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국립보육시설이나 학교에서 집단관리된다. 그 결과 이런 저런 이유로 합법적인(?)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준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소위 ‘학교’라는 일종의 격리시설에 강제 수용된다. 그 중에서도 아예 낳자마자 버려진 아이들은 이름 없이 번호로만 불린다. 이를테면 이오(25)나 사칠(47) 같은 식이다. 이들은 스무 살이 되어 사회에 나오기 전까지 끊임없이 암기 위주 공부를 하며 성적에 따른 서열화에 길들여진다. 오직 극소수 성적 우수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애완견처럼 성적(性的)으로 거세된 채 교문 밖을 나오는데, 이는 누구나 장수하는 사회에서 부자격자들이 함부로 자기 씨를 늘리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다.

어느 날 불법적인 출생의 아이들만 수용된 학교에 부모가 갑자기 사망하는 통에 졸지에 고아가 된 바깥세상 아이(문도새벽)가 잡혀 들어온다. 덕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교라는 감옥 안에서만 살아온 학생들은 유전적으로 구(舊) 호모사피엔스의 모든 단점을 제거한 완벽한 아이 ‘문도새벽’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처음으로 세상이 뿌리 속까지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품는다. 특히 그동안 학교 수석이었던 이오(25)의 자살사건이 극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그는 밤잠 아껴가며 공부했건만 건성건성 공부하는 문도새벽에게 번번이 전교 1등 자리를 내주자 공포에 사로잡힌다. 졸업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하지 못하면 성인의 몸으로 밖에 나갈 때 생물학적 거세를 당해야 한다. 그리고는 평생 허드렛일이나 하며 사회 밑바닥을 전전해야 한다. 아무리 용 써봤자 유전공학의 혜택을 입지 못한 불법출생자들은 타고난 IQ에서부터 밀리니 어떻게 공부한들 바깥세상 아이들과 경쟁이 될 리 없다. ‘각고의 노력을 해도 길이 없다면 이건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게 아닐까? 바깥세상 사람들이 모두 문도와 같다면 나란 존재는 얼마나 보잘 것 없나?’ 이오는 삶을 개선하려는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기득권층 학교체제 타파의 길 모색

소설 속 캐릭터들 모두 비관주의자는 아니다. 졸지에 주류에서 밀려난 낙오자 문도새벽부터가 그렇다. 그는 학교체제가 허울만 교육기관이지 실상은 피지배자들의 머릿속에 철저한 노예근성을 새겨 넣는, 기득권층을 위한 억압기제임을 깨닫고 이를 분쇄할 길을 모색한다. 아울러 ‘악어’(별명)같이 일찌감치 공부 포기하고 주먹질로 세상에 대한 울분을 토하던 아이들도 문도새벽의 학교 전복 시나리오를 처음에는 가당치 않게 여기지만 그의 집요한 노력에 탄복해 동참한다. 문도새벽은 동료학생에게 학교 시스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한다.

<밀레니얼 칠드런>의 표지 | 비룡소

“학교시험에는 분명 목적이 있어. 표면적 구실이 아닌 진짜 목적이.”

“진짜 목적?”

“그래. 시험으로 등급을 가르고 순위를 정해. 그리고 등수 따라 특권을 조금씩 나눠주지. 더 많은 특권을 주고 하위등급에게선 있던 권리도 빼앗아. 그러면서 오랜 시간 몸으로 학습시키는 거야. 이게 세상의 이치라고. 잘난 사람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게 당연하다고 말이야.”

“그 규칙에 어릴 때부터 길들여지면 아무도 불평하지 않게 돼. 내가 갖지 못한 건 내가 못나서라거나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여기지.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끌어내리려 하게 돼. 누군가를 짓밟거나 짓밟히는 것도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해. 모든 사람을 한 줄로 세우는 이 구조에서는 항상 패배자가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이런 제도를 왜 만들었을까?”

“우리가 세상에 나갔을 때 반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야.”(책 112~113쪽)

작가는 학교라는 축소판 사회를 통해 보다 많은 권력의 영구유지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생식능력은 물론이고 생각까지 주무르려 드는 지배층의 제어 메커니즘에 초점을 맞춘다. 어려서부터 서열 나누기와 성적 평가에 길들여진 비주류 인생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그렇게 사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마치 카스트제도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수천 년간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 위에 군림해온 인도처럼. 조작된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흡수하고 그것이 대단한 지혜인 양 여기는 바보들이 단지 학생들뿐이랴. 일단 손에 쥔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예를 역사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당신 혹은 당신의 아들딸이 땀을 흘린 만큼 대가를 받는 세상을 원한다면 공짜 점심을 기대하지 말라. 문도새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조차 못했어. 태어나고 싶다면 세계를 파괴해야 해.”(책 115쪽) 당신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었는가.

<고장원 SF평론가>

©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