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광구 '검은 진주 꿈' 사라지나

2018. 6. 13. 09:2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ㆍ일본, 한·일 공동개발에 부정적… 협상시한 2028년 앞두고 허송세월

‘나의 꿈이 출렁이는 바다 깊은 곳/ 흑진주 빛을 잃고 숨어 있는 곳/ 제7광구 검은 진주.’

1980년 가수 정난이가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제7광구’의 첫소절이다. 산유국의 꿈을 꾸며 국민들을 설레게 했던 이 곡은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리며 정난이를 스타덤에 올렸다. 2011년 김지훈 감독은 한국형 SF영화 ‘7광구’를 선보였다. 제7광구에서 석유를 캐던 석유시추선을 괴생명체가 공격한다는 설정이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자원외교가 한창일 시점에 개봉됐던 이 영화는 19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제7광구란 제주도 남쪽바다부터 일본 오키나와 해구 직전까지 이어진 대륙붕으로, 8만여㎢가 한·일 공동개발구역(South Korea-Japan Joint Development Zone·JDZ)으로 지정돼 있다. 미국 우드로윌슨연구소의 분석을 보면 제7광구가 위치한 대륙붕 전체에 매장된 천연가스는 세계 최대 산유국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10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원유 매장량도 1000억 배럴로 미국 전체 매장량의 4.5배 규모로 추정됐다. 이 같은 추정이 맞다면 제7광구는 ‘아시아의 페르시아만’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제7광구의 석유 시추는 멈춰선 지 오래다. 일본이 공동개발에 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일본이 없이 한국이 단독으로 시추할 수 없다. 문제는 공동개발을 할 수 있는 시한이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양국의 협상시한은 2028년이다. 자원개발은 시추부터 생산까지 8년은 잡아야 한다. 향후 1~2년을 이런 식으로 흘려보내면 석유 한 방울 얻지 못한 채 협정이 종료될 수 있다. 제7광구의 3분의 2는 거리상 일본 측 해역에 가깝다. 협정이 종료되면 상황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될 수 있다.

제7광구 논란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유엔 극동경제위원회(ECAFE)는 동중국해 대륙붕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1970년 한국, 일본, 중국(대만)은 자국의 국내법에 따라 17개 해저광구를 설정했는데 서로 중첩되는 수역이 발생했다.

한국은 1970년 1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제정하고 한국 주변 해역 8개 해저광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한·일 간 중첩이 되는 것은 제7광구였다. 한국은 대륙붕이 시작된 나라에 대륙붕의 영유권이 있다는 ‘대륙연장론’에 따라 제7광구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은 ‘중간선’ 경계를 내세웠다. 양국 사이 등거리로 중간선을 긋고 그 안에 속한 대륙붕만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협정 종료되면 일본에 유리한 지역

논란이 지속되자 양측은 1974년 1월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협정’을 맺고 이 지역을 한·일 공동개발구역(JDZ)으로 설정해 공동개발하기로 합의했다. 협정기간은 1978년부터 2028년까지 50년 동안이었다.

공동개발이 처음에는 괜찮았다. 1987년까지 1차 탐사에서 7개 광구를 탐사했다. 한국은 한국석유개발공사와 KOAM(미국계 석유회사 웬델필리스, 유니버스오일, 루이스지위크스, 해밀턴브라더스오일 등이 한국에 설립한 법인으로 ‘코리안아메리칸석유주식회사’를 의미), 일본은 일본석유(NOEC)에 조광권을 줬다. 하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2차 탐사에서는 소구역을 지정하고 당사자를 확정했다. 한국 측 조광권자는 한국석유개발공사와 영국계 석유회사 BP, 일본은 일본석유(NOEC)였다. 하지만 탄성파 탐사는 없었고 1차 탐사기간 동안의 탐사자료만 검사하는 데 그쳤다. 1992년 영국 BP는 광구를 반납했고, 나머지 회사들도 광구를 포기했다. 제3차 한·일 공동위 자료를 보면 일부 소구역은 개발가치가 어느 정도 있지만 당시 유가로는 경제성 있는 발전이 어렵고, 투자리스크는 큰 것으로 봤다.

한동안 중단됐던 탐사는 2002년 한국석유공사와 일본석유공사(JNOC)가 공동운영 체결계약을 하면서 재개됐다. 양측은 2004년 공동운영위원회를 열고 탐사 내용을 교환하기로 했지만 일본은 “경제성이 없었다”며 공동탐사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1개 시추공을 뚫는 데 드는 돈은 1000억원 내외로 알려져 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민간 차원에서 한·일 간 공동연구가 추진됐지만 일본은 이마저도 일방적으로 종료시켰다. 당시 한국은 석유의 부존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지만 일본은 부정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3월 일본은 공동연구를 종료한다는 의사를 밝혔고, 지금까지 공동탐사는 잠정중단된 상태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관계자는 “이후 일본에 수차례 협정 이행을 촉구했지만 일본 측은 부정적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며 “조광권자를 지정하지 않는 등 협정 이행을 기본적으로 해태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재판소 제소방안 검토해야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협정을 보면 한·일 양국은 공동개발을 위해 탐사권과 채취권을 가지고 있는 조광권자를 선정해야 한다. 조광권자는 8년간 탐사권을 가지며 자원이 있는 것이 확인되면 30년간 채취권을 가질 수 있다. 협정에 따르면 한쪽이 조광권자를 지정하지 않으면 개발을 할 수 없다. 한국 정부는 2009년 한국석유공사에 조광권을 줬지만 일본은 조광권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경제성이 없어 신청하는 기업이 없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한국석유공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8년을 보냈고 지난해 조광권이 기한 만료됐다.

일본이 협정 종료를 위해 시간을 끄는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협정 체결 당시 일본 내에서는 말이 많았다. 중간선 경계를 하지 않고 대륙연장론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측 손해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 국회에서 비준을 받는 데도 4년이나 걸렸다. 당시에는 대륙연장론이 대세였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 상황이 반전됐다. 1982년 유엔 해양법협약이 만들어지면서 중간선 경계가 힘을 얻었다. 1985년 리비아와 몰타는 대륙붕 경계 획정을 놓고 분란이 생기자 국제사법재판소에 합의를 의뢰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982년 유엔 협약을 근거로 대륙붕 경계는 중간선 경계로 해야 한다고 판정했다. 한·일 공동개발구역(JDZ) 협정 이행기구인 한·일 공동위원회는 이듬해인 1986년 이후 열린 적이 없다. 업계 관계자는 “제7광구 탐사가 중단된 1986년은 영유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판단기준이 바뀌는 시기와 맞물린다”고 말했다.

2009년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UN CLCS)는 51개국에 자국의 대륙붕 관할을 주장할 수 있는 정식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인접국 간 영토분쟁 해결을 위한 기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중국도 대륙연장론을 앞세워 제7광구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상황이 더 복잡해졌다. 대륙붕이 향후 국가 간 해양경계 획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일본과 분쟁 중인 중국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제7광구는 석유와 가스가 상당히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핑후유 가스전 인근에 있다. 지질구조도 유사해 석유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협상 종료일이 다가올수록 한국은 애타고 일본은 느긋한 이유다.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양국 간의 협의 자체가 없다.

현대송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연구센터장은 “일본이 조광권자를 지정하지 않는 것은 조광권을 의무적으로 부여하도록 규정한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협정에 위반된다”며 “국제법에 따라 협정의 시행 중지를 통해 종료시점을 연장하거나 국제재판소에 제소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